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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북한]에 해당되는 글 38

  1. MB “박근혜 대표는 참 고마운 분” 2012/02/20
  2. [특집] 북한 정권 교체론 “김정은도 도발 예상… 北 민주화 유도해야” 2012/02/03
  3. [뉴스추적] 편법 모금 통로 된 국회의원 출판기념회 - 정치권 실세들, 총선 앞두고 수억씩 챙겨 2012/01/03
  4. "김정일 정권은 악마다" 2011/12/26
  5. 김정일 사망에 대한 단상 2011/12/20
  6. “(제1연평해전은)김대중 반역집단이 옷로비 등 위기탈피 위해 무장도발을 조작한 것” - 단독입수 ‘북한 보도지침’ 2만8500쪽 全文 분석 2011/11/21
  7. 납북자 21명 평양에 살고 있다 - 평양 거주 단독 확인 2011/11/02
  8. “핵심정보 유출은 정권붕괴 임박한 것” 박선영 의원 “송환촉구 결의안 제출” 2011/11/02
  9. 북한 독침테러 사건의 전모 - 박상학뿐 아니라, 김성민·이민복도 노렸다 2011/10/19
  10. 왕재산 간첩단 총책 "출소하면 국가유공자 될 것" 호언장담 2011/09/19
  11. 北인권법•역사교과서 방치하고 포퓰리즘에 동참한 한나라당 2011/08/22
  12. 로버트 박과 함께 한 하루 "그는 기도와 성경에 '중독'된 사람" 2011/08/19
  13. 로버트 박 월간조선 기고문 - 북한, 인권 위기를 넘어서 2011/08/19
  14. “엄마 옛날 이름이 김현희였어?” - 김현희씨의 12년 만의 서울 나들이 2011/08/16
  15. 김현희를 가짜로 모는 사람들 - ‘김현희의 편지’ 공개 후 ‘남북한 정부 공동조사’ 주장하기 시작 2011/08/16
  16.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한 일본 古지도 "일본해가 아니라 조선해였다" 2011/08/15
  17. 오세훈의 편지와 김상곤의 편지 2011/08/15
  18. 6·25 납북희생자 기억의 날 "그들이 대한민국을 함께 세웠습니다" 2011/07/27
  19. “김정은 특별지시로 납북자들 평원으로 비밀이송… 다구치는 위독” 2011/07/26
  20. 김현희 “北 공작원 되자 담뱃재로 얼굴 점까지 빼버렸다” 2011/07/26
  21. 북한發 동해 표기 소동… 무지한 일부 언론과, 무관심한 국민의 합작품 2011/07/15
  22. 北 정치범 수용소 전시회 연 한동대 북한인권학회 <세이지> 2011/04/16
  23. 정기열이란 사람의 한국 비난 시리즈 2011/01/24
  24. 北 사이버 공격시 15분 만에 주요시설 초토화 2011/01/03
  25. [단독입수] 김대중-시진핑 면담록 全文 - 박지원이 말한 시진핑의 ‘평화 훼방꾼’ 발언 없었다 2010/11/25
  26. 최대 규모 對北 逆공작 ‘Z작전’의 전모 - 통혁당 간부 구출 시도한 北 간첩선 검거는 한국 中情의 逆공작이었다 2010/09/27
  27. 단독입수 / 北 억류 미국인의 수상한 메일 - 아이잘론 곰즈, 入北 아니라 拉北 가능성 2010/08/19
  28. 김현희 “일부에서 23년째 가짜라는 나는 ‘살아 있는 프로펠러’다” 2010/06/23
  29. 秘話 / “28년 전 백령도 海上에서 對北 보복作戰계획 있었다” 2010/05/26
  30. 2박3일 동행취재 / 육군 이기자부대 혹한기 훈련 2010/05/26
박선규 前 청와대 대변인의 회고

⊙ MB “나, 어청수 청장이 일하는 스타일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내가 임명한 사람도 아니잖아”
⊙ “2008년 8월 국민과의 대화 때 KBS가 청와대와 한 약속 전혀 안 지켜 실망”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이명박과 박근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가 2009년 9월 16일 청와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이날 독대로까지 이어진 유럽 순방 보고 후 이명박 대통령은 박 전 대표에 대해 “참 고마운 분”이라고 했다.

2009년 9월 16일, 이명박(李明博) 대통령과 박근혜(朴槿惠) 전(前) 한나라당 대표(現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가 만났다. 박 전 대표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유럽 4개국을 순방한 후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였다.
 
  당시 박 전 대표는 “일정이 빡빡했지만 만날 사람은 다 만났다”며 “대통령께서 당선자 시절부터 유럽에 대한 아쉬움이 많은 것을 알아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고, 이 대통령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주신 것으로 안다”며 “중요한 시기에 특사단이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해 줘 향후 국정 운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감사를 표했다.
 
  100분 넘게 계속된 이날 회동은 시종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당시 여론은 대선 전부터 시작된 친이(親李)-친박(親朴) 갈등이 어느 정도 회복될 가능성이 보인다고 분석했다. 두 사람은 배석자 없이 40여 분간 단독회동을 가졌고, 이때 남북관계, 4대강, 세종시 문제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만남 후 이 대통령은 접견실 밖까지 나와 손을 흔들며 박 전 대표를 배웅했다. 차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본 후 돌아선 이 대통령이 한마디 했다.
 
  “참 고마운 분이에요.”
 
 
 
“李-朴 관계, 그렇게 심각하진 않았다”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박선규(朴先圭) 전(前)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이 최근 펴낸 저서 《희망과 맞팔하다》에서 밝힌 내용이다. 박 전 차관은 “소문과 기사를 통해 이 대통령과 박 위원장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당사자가 가장 잘 안다”며 “전혀 문제가 없다곤 말할 수 없지만,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수준은 아니라고 확신한다”고 전했다. 결국 ‘갈 데까지 간’ 친이-친박 갈등과 달리, 막상 당사자들 간 관계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는 얘기다.
 
  2011년 4월, 박 전 대표는 한 차례 더 유럽특사로 나섰다. 정부가 동남권 신공항 계획을 백지화한 것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약속을 어겼다”며 유감 표명과 반대입장을 밝힌 직후였다. 당시 “두 사람 사이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됐다”는 분석이 나왔고, 대통령 주변에선 “박 대표가 사사건건 정말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왔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특사를 제안했고, 박 전 대표는 받아들였다.
 
  박 전 차관은 두 사람 사이가 나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사례로 정진석(鄭鎭碩) 의원의 경우를 들었다. 2010년 6월 지방선거 패배 후 정 의원을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한 것 자체가 이 대통령의 정확한 심중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라는 것이다. 책 내용 중 일부다.
 
  “정 수석은 박근혜 전 대표가 특별하게 챙길 정도로 가까운, 대표적 친박 의원이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세종시 문제가 지방선거 패배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적됐고, 특히 박 전 대표가 분명한 반대입장을 밝힌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런 상황에서 친박 의원을 정무수석으로 발탁한 것이다. 정무수석이 어떤 자리인가? 청와대 안에서 대통령의 숨소리까지 다 챙길 정도로 핵심 중의 핵심인 자리다. 대통령과 관련된 모든 일은 물론 의중까지도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위치다.”
 
  박 전 차관은 “많은 사람이 의심하듯 ‘청와대에서 박 전 대표를 견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쁜 일들을 꾸미고 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인사”라며 “그런 일들이 있다면 다 박 전 대표의 귀에 들어가고 문제가 더 복잡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MB “총무원장 차라고 안 뒤지면 경찰이 아니다”
 
2008년 여름 조계사 입구에 걸린 어청수 경찰청장 파면 요구 플래카드.
  책은 이 대통령이 불교계와 여야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 어청수(魚淸秀) 경찰청장을 경질하지 않았던 이유도 밝혔다. 2008년 촛불시위 진압 과정에서 야당과 시민단체의 어 청장 사퇴요구가 시작됐고, 7월 말 경찰이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이 탄 차량을 검문검색해 문책 여론은 불교계와 여당으로까지 번졌다. 불교계는 어 청장의 즉각 파면을 요구하며 대규모 집회를 이어나갔고, 박희태(朴熺太) 대표 등 당시 한나라당 지도부도 청와대에 어 청장 경질을 요구했다.
 
  박 전 차관은 당시 청와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게 된 사연도 기록했다. 책에 따르면, 어 청장 사퇴요구 분위기가 이어지던 2008년 어느 날 아침 이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내가 어청수 청장을 왜 안 자르는지 아나?”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한 참모들에게 대통령이 스스로 답했다.
 
  “나, 어청수 청장이 일하는 스타일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어 청장은 내가 임명한 사람도 아니잖아.”
 
  박 전 차관은 그 얘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그는 당연히 이 대통령이 어 청장을 임명한 것으로 알았다. 사실 어 청장은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이 퇴임 한 달여 전 공식 내정한 사람이다. 책에 기록된 대통령의 당시 발언이다.
 
  “어 청장은 자신의 책임을 충실히 했다. 경찰의 수배를 받는 사람들이 총무원장 차를 타고 빠져나가려 한다는 첩보가 있는데 총무원장 차라고 안 뒤지면 그건 경찰이 아니다. 또 총무원장 차를 수색할 경우 안 그래도 반발하는 불교계가 거세게 항의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것도 경찰청장 자격이 없는 것이다. 어 청장은 이리저리 계산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다했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청장을 자르라는 주장은 억지다. 대통령이 억지주장에 밀려 책임을 다한 사람을 자를 수 있겠나. 그러면 내가 어떻게 전국 공무원들에게 각자 위치에서 소신껏 최선을 다해달라고 주문할 수 있겠나.”
 
  박 전 차관은 “못 이기는 척 들어주면 아무런 시비 없이 지난 정권 사람을 내칠 수 있는데다, 종교편향 시비에서 벗어나 야당과 시민단체를 달래고, 권위적인 이미지를 바꾸는 등 어 청장 경질 효과는 일석이조였지만,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며 “결국 돌아온 것은 ‘민심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소통을 정말 못한다’는 무거운 비판이었다”고 덧붙였다.
 
 
  “임기 초 빅3 모두 노무현 사람”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박선규 전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이 최근 펴낸 《희망과 맞팔하다》.
  박 전 차관은 “이른바 ‘빅3’로 불리는 국정원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모두 이 대통령 자신의 사람이 아닌 전 정권의 핵심인사를 임명하거나 유임시켰다”며 “이들을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했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초대 국정원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성호(金成浩)씨였고, 임채진(林采珍) 검찰총장은 노 전 대통령이 임기 4개월을 남겨놓고 임명한 사람이다. 노 전 대통령 수사 당시 “MB 정부가 검찰을 동원해 억지수사를 하다 전직 대통령 자살이란 초유의 비극을 불렀다”는 비판을 받은 사람과, 촛불시위 때 ‘강경 진압’이란 명목으로 사퇴 압력을 받은 사람 모두 노 전 대통령이 선택한 인사들이다.
 
  박 전 차관이 대변인 시절 “왜 그분들을 바꾸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이 대통령의 대답은 “법이 정해놓은 임기를 지켜주고 싶었다. 정치적 바람을 타지 않고 국민에게 책임지며, 정권과 관계없이 원칙이 지켜지는 모습을 만들고 싶었다”였다.
 
  KBS 앵커 출신인 박 전 차관은 자신의 ‘친정’과 불편했던 일화도 털어놨다. 2008년 8월, 취임 후 첫 ‘국민과의 대화’ 방송을 준비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방송사 선택이었다고 한다. 공영방송인 KBS와 하는 게 당연했지만, 촛불 정국에 정연주(鄭淵珠) 사장을 중심으로 ‘사사건건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며 노골적인 적대감까지 보인’ KBS가 부담스러웠다. 고민을 보고하자 대통령은 “왜 그렇게 사고가 경직돼 있느냐”며 그를 질책했다. “KBS가 정부와 갈등 관계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공적인 영역으로 연결할 순 없다”는 이유였다.
 
  문제는 결국 터졌다. 박 전 차관은 KBS의 전문성을 믿고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했다고 한다. 본인도 과거 기자 시절 ‘위로부터의 간섭’에 안 좋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합의 과정에서 KBS는 “청와대가 과거와 분명 달라졌다”고 반겼지만, 청와대 내부에선 “방송사에 지나치게 끌려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고 한다.
 
  KBS의 생각은 청와대의 기대와 달랐다. 박 전 차관은 “KBS는 정말 독한 방송, 대통령을 곤란하게 만들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며 “3명의 전문가 패널을 모두 비판 성향이 강한 인사로 선정했고, 일반 패널은 시위 전력자까지 포함되는 등 거의 ‘경악할 수준’이었다”고 했다.
 
 
  믿었던 KBS에 ‘발등 찍힌’ 사연
 
  진행상황을 보고하자 대통령으로부터 “무슨 일을 그렇게 하느냐”는 질책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문제를 제기할 경우 “청와대가 압력을 행사한다”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어 그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대통령은 두 가지를 주문했다. “첫 번째 질문부터 독하게 나오면 표정관리가 안 될 수 있으니 첫 질문을 조금 부드럽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과 “(비전문가 패널 중 한 명인) 노조위원장이 질문을 빙자해 자기 회사 문제를 얘기해선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달라”는 요구였다.
 
  이에 대해 KBS도 “그것은 당연하니 아무 걱정 말라”며 청와대 측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첫 질문도 제안해 줬다. 진행자가 대통령을 맞으며 “오늘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는데요,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라고 물으면 대통령이 “예,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라 하며 베이징 올림픽에 다녀온 것과 장미란 선수가 세계신기록을 세운 얘기 등으로 풀어가는 식이었다.
 
  방송 당일, 시작부터 박 전 차관은 땀을 흘려야 했다. 첫 질문을 포함해 예상이 모두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사회자는 ‘부드러운 질문’ 없이 바로 패널에게 질문권을 넘겼고, 날카롭고 곤혹스러운 질문이 쏟아졌다. 노조위원장은 질문 대신 2분 이상 회사에 대한 입장을 강변했다. 대학생 패널은 ‘백골단’이란 용어를 써가며 경찰을 비난했다.
 
  다음 날 한 매체는 ‘좌파단체와의 토론회’라고 방송을 평가했고, 박 전 차관은 “결과적으로 허위보고를 한 셈이 됐다”며 대통령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 대통령은 “당신이 죄송한 일이 아니라 약속을 안 지킨 그 친구들이 문제”라며 “그렇게 노골적으로, 비신사적으로 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했다고 한다.
 
  박 전 차관은 이외에도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를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표기하자 아프리카 순방 중이던 이 대통령이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해 강하게 설득했던 사례, 천안함 폭침(爆沈) 이후 사상 처음 열린 대통령 주재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대통령이 군복을 입으려다 취소한 사연, 한ㆍ미(韓美) 정상회담 때 “6ㆍ25전쟁 직후 미군 선교사에게 헌 바지 하나 얻어 입으려고 줄 섰던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는 이야기로 오바마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은 일화 등을 공개했다.

월간조선 2012년 3월호 - 기사 원문 보기

▶ 이명박 정부 납북자委에 ‘재취업’한 노무현 정부 과거사委 조사관들
▶ 박태준과 포스코 - 짧은 人生을 영원 조국에, 그리고 제철 報國에
▶ 인터뷰 / “세종시法 무효” 5년째 법정투쟁 중인 崔大權·全基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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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先 질적 변화, 後 교류·협력”(송대성) “北 주민에게 개방의 필요성 알려야”(김석우)
⊙ “南北관계 개선보다 北 변화가 더 절실”(김태우) “탈북자 중심의 北 재건계획 세워야”(안찬일)
⊙ “개입 성격 강한 對北 포용정책 펼쳐야”(고유환) “주한미군 전술核 재배치로 北核 타개”(전성훈)
⊙ “1년 기다리다가 또 반세기를 잃는다”(김성민) “北 정권교체는 사실상 헌법의 명령”(하태경)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독재자는 죽었고, 아들은 별 탈 없이 ‘왕위’를 계승했다. ‘정세안정’이란 미명 아래 전 세계가 ‘김정은 체제’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활발히 논의하던 북한 정권교체론은 ‘비현실적 강경대책’으로 치부됐고, 새로 출범한 북한 지도부는 새해 첫날부터 대남 비방에 열을 올렸다. 세계 주요국이 초유의 3대(代) 권력세습을 묵인할 뿐 아니라, 오히려 눈치를 보는 형국이다. 북한 정권교체론과 김정은 체제의 전망을 국내 전문가들을 통해 분석했다.
 
 
 
송대성, “북한판 고르바초프가 나와야”
 
송대성 세종연구소 소장.
  송대성(宋大晟) 세종연구소 소장은 “북한 군부 내 불만이 커지는 가운데 김정은 세력은 ‘유훈 (遺訓)’을 내세워 체제정비를 시작했다”면서 “김정은의 북한이 제대로 사는 길은 ‘선군(先軍)’ 대신 ‘선(先) 질적 변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정은의 북한을 어떻게 전망하나.
 
  “현재 북한의 상황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플로팅(floating)’, 즉 ‘부유(浮遊) 상황’이다. 물 위에선 어느 정도 정세가 안정된 듯하지만, 물 밑의 상황은 전혀 가시화하지 않았다. 김정일(金正日) 사후(死後) 유훈통치랍시고 장례식과 추도식을 통해 김정은에 대한 우상숭배화를 밀어붙였지만, 결국 ‘따르지 않으면 잔혹한 폭력이 뒤따를 것’이란 협박에 지나지 않는다.”
 
  ―변화의 가능성이 있나.
 
  “1994년 김일성 사망과는 상황이 판이(判異)하다. 김일성-김정일 세습 땐 북한 주민의 불만지수가 이 정도로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2010년 9월 3대 세습 공식화 직후 계속 불안 징후가 이어져 왔다. 지난해 2월 북한이 내부 소요 사태에 대비해 폭동진압 경찰조직인 ‘특별기동대’를 창설하고, 6월엔 중국에서 시위진압용 장비까지 대량으로 사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민란의 가능성이 분명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레짐체인지(regime change·정권교체)가 가능할까.
 
  “외형적으론 레짐(체제)이 그대로 이어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여러 변수가 있다. 김일성 사망 후 그런대로 유지됐던 인민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더욱 체제를 흔드는 요소는 탈북자다. 국내 2만3000여 명, 중국 접경지에 10만명의 탈북자가 여전히 존재하며, 그 수도 계속 늘고 있다. 이들과 그 가족 및 지인으로 연결된 최소 수십만 명의 불만세력은 북한의 골칫거리다.”
 
 
  “군부 內 불만세력 많다”
 
  ―북한 체제가 어떻게 흘러갈 것으로 전망하나.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북한 정권의 바람대로 김정일의 유훈이 이어져 선군정치를 지속하는 것이다. 둘째는 군부의 쿠데타 가능성이다.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張成澤)과 고모 김경희(金敬姬)에게 대장이란 호칭을 준 것은 어떻게 보면 군 출신 엘리트들을 믿지 못한다는 반증이다. 군부 내 불만이 꽤 있을 것으로 본다. 셋째는 민란 또는 폭동이다.”
 
  ―어떤 변화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는가.
 
  “김정은은 선군정치를 고수하고 있다. 북한의 군사력은 체제 옹호력과 대남(對南) 협상력을 갖고 있다. 남한과 국제사회가 대북(對北)지원을 해 봐야 모두 ‘선군’에 희생될 뿐이다. 이를 포기하는 질적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가정은 북한에 고르바초프(Gorbachev) 같은 사람이 등장해 선군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을 통해 북한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큰 가능성은 없지만, 가장 좋은 시나리오다. 핵심은 ‘선(先) 질적 변화, 후(後) 교류·협력’이다.”
 
 
  김석우, “개방없는 생존은 北 주민만 고생시켜”
 
김석우 전 통일원 차관.
  통일원 차관을 지낸 김석우(金錫友)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은 “‘정권교체’란 시한폭탄은 어느새 가까워졌고, 북한은 계속 오픈되고 있다”면서 “개방을 하면 잘살 수 있다는 사실을 북한 주민에게 전파해 개방을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혼란기다. 어떤 대북정책이 필요한가.
 
  “개혁·개방을 하는 방향으로 북한을 유도해야 한다. 무작정 무리하게 할 것이 아니라, 개혁·개방을 하면 충분히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면 된다. 실현 가능성이 작지만, 그래도 정답은 이것밖에 없다. 김정일 사후 북한은 큰 딜레마에 빠졌다. 인민을 살리고 위기를 극복하려면 개방을 해야 한다. 정권유지를 위해 개방을 막으면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유도해야 하나.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공산권 국가는 모두 개혁·개방을 선택했다. 그 외 국가는 모두 망했다. 종북(從北)세력들은 지금도 ‘북한은 예외’라며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개혁과 개방이 없는 북한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 개방 없이 생존하려면 햇볕정책식(式)으로 연명하는 방법밖에 없다. 북한 주민만 더욱 고생하는 결과를 낳았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힘을 쏟아 유도해야 한다.”
 
  ―북한의 개방이 가시화할 수 있다고 보는가.
 
  “가능성은 분명 존재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미국, 중국, 러시아 등 북한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국가 모두가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영원한 폐쇄국가’일 줄 알았던 북한도 IT와 통신으로 조금씩 열리고 있다. 개방을 하면 잘살 수 있다는 사실을 북한 주민에게 전파해야 한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연말 사설을 통해 “지상 최악의 나라의 정권교체를 바라기만 해선 안 되고 계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충분히 동의한다. 《이코노미스트》뿐 아니라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자료 등 영국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북한은 다른 곳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남한의 역사를 보면 된다. 대한민국이 OECD 회원국으로 번영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 비전과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북한의 장래에 대해서도 비전과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야 한다.”
 
 
  김태우, “北 정세를 국내정치에 이용하는 학자들이 문제”
 
김태우 통일연구원 원장.
  김태우(金泰宇) 통일연구원 원장은 “정치학자들이 무조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탓하는 것은 큰 문제”라며 “남북관계 개선보다 북한의 변화가 더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김정일 사망이 우리에게 준 의미는.
 
  “다섯 가지 복합적 메시지가 있다. 첫째는 남북관계 개선을 시도해야 할 때라는 것, 둘째는 북한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핵(核)포기, 개혁·개방, 인권개선 등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의미다. 셋째, 우리 안보를 추슬러야 한다. 북한은 여전히 어디로 갈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 넷째, 통일을 대비해야 할 시점이다. 다섯째는 중국의 과제다. 중국은 지난 2년여 동안 핵실험, 천안함, 연평도 사태 때 막무가내로 북한을 지원했다. 또 김정일 사망 후 김정은 체제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큰 외교적 과제를 남긴 케이스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논란이 많은데.
 
  “상당수 정치학자가 TV에 나와 무조건 ‘이명박 정부가 잘못했다, 유화정책으로 돌아서서 남북관계 개선하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는 첫 번째 메시지에 불과하다. 일부는 맞는 말이지만, ‘우리 정부가 잘못해서 악화했다’는 식으로 계속 얘기하면 정부가 북한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의 원칙 있는 대북정책이 보이지 않는 성과를 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하는 학자들이 있다. 전문가일수록 국민에게 정확한 메시지를 줘야 한다. 독일의 경우, 정부 공식 트랙과 비공식 트랙이 별도로 존재했다. 행간의 뜻을 심어 주는 역할을 학자들이 해야 하는데, 무조건 ‘대통령이 잘못했다’고 한다. 총선용인가, 대선용인가.”
 
  ―차기 정권이 현 정권의 대북정책을 유지하겠는가.
 
  “누가 정권을 잡든 대북정책만은 이명박 정부의 틀을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유연성 차원에서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다고 본다. 금강산의 경우 관계 개선을 충분히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극히 일부분이다.
 
  혼란기일수록 국민이 현명해야 한다. 대북정책에 다양한 목표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과 북한을 변화시키는 것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 마리 토끼다. 서로 다른 목표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맞춰야 한다. 분명한 것은 남북관계 개선도 필요하지만, 북한의 변화가 더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안찬일, “1000명 탈북 엘리트 양성해 재건계획 세워야”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탈북 박사 1호’ 안찬일(安燦一)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3~4년 내에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하면 또 60년이 간다”며 “국내 탈북자 중 1000명의 청년 엘리트를 ‘통일인재’로 양성해 구체적 재건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정권교체가 가능한가.
 
  “북한 정권교체를 3~4년 내 못하면 또 60년이 간다. 김정은 자체가 ‘김일성의 재현’이라며 등장했다. 김씨왕조 체제를 중간부터가 아닌 시초부터 출발하겠다는 의미다. 김정은 시스템이 정착할 경우 또 60년이 흐르고, 남북은 영구 분단된다.”
 
  ―정권교체 방법은.
 
  “꼭 북한을 자극하는 정책만 펼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남한이다. 우리가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현하면, 그 정보가 북한 주민에게 전달된다. 결국 행동은 북한 주민이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나.
 
  “탈북자가 2만3000여 명 있고, 그중 1000여 명의 청년 엘리트가 있다.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한 20~30대 그룹이다. 통일 직후 북한 재건을 실행할 인재들이다. 김일성이 소련에서 젊은 ‘인텔리’들을 데려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것과 같은 방식이지만, 내용은 정반대다. 남북 양쪽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북한에 정착시키면 된다.”
 
  ―탈북 인재 양성이 정권교체에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나.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고 있다는 자체가 북한 주민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북한 내 최고위층을 제외한 중간고위층, 즉 군인·간부·상인 상당수가 남한식 통일을 바란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통일을 이루는 가장 빠른 방법은 탈북자를 중심으로 한 액션플랜을 세우는 길이다.”
 
  ―정부 주도로 이뤄져야 하나.
 
  “통일부는 싱크탱크, 이북5도청을 액션탱크로 만들어야 한다. 이북5도민과 탈북자들을 통일역량으로 삼고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 된다. 현재 남한의 국회의원이 299명,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687명이다. 북한이 2배가 넘는 ‘의원’을 가진 이유는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란 정당성을 선점하기 위해서다. 국회의원을 무작정 늘리자는 얘기가 아니라, 이북5도에 대한 의석을 주자는 얘기다. 헌법도 북한을 우리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 당연히 정치인이 있어야 한다.”
 
 
  고유환, “MB, 유연정책으로 기존 정책 잘못 인정한 셈”
 
고유환 동국대 교수.
  고유환(高有煥) 동국대 교수(북한학)는 “이명박 정부가 강경에서 유연으로 돌아선 자체만으로도 기존의 정세판단이 잘못됐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개입의 성격이 강한 대북 포용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분석했다.
 
  ―현재 대북 정책을 어떻게 보나.
 
  “지금까지 이명박 정부가 추진해 온 방식으론 북한을 변화시키기 어렵다. 김정일이 사망하면 북한에 급변사태가 올 가능성이 커진다 했는데, 막상 죽고 나니 김정은 정권이 안정되길 바라는 듯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김정일 사망을 기회 삼아 급변사태를 유도하자는 논리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 결과론적으로 전략이 달라졌다는 것은, 이전의 전략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김정은 체계가 정착할 것이라 보는가.
 
  “일단 외견상으론 권력승계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주변국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3대 세습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지만, 막상 상황이 벌어지니 미국도 조의를 표하고 안정적 권력이양을 바라는 듯한 입장을 내세웠다. 지금은 북한 내부에 김정은을 대체할 만한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도 현상을 유지하는 입장이다. 취약한 김정은이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중국식 개혁·개방을 촉구해 영향력 아래 묶어 두겠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북한이 개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옳지만, ‘지금 김정은이 개혁·개방 안 하면 망한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논리다. 소련과 동유럽의 사례는 아시아와 다르다. 아시아엔 중국과 베트남의 모델도 있다. 이를 혼용해서 나름의 북한식(式) 모델을 모색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한국은 이미 상반된 두 정책을 다 써 본 상태다. 적극적 포용도 해 봤고, 적극적 개입도 해 봤다. 결국 개입의 성격이 강한 포용으로 가야 한다.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개입이 이뤄져야 한다.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대다. 과거 남북관계에서 온갖 불미스런 일을 벌인 장본인이 죽었다. 물론 새 지도부에 상당수가 계승됐지만, 그렇다고 모두 떠넘길 수도 없는 상황이다.”
 
  ―현재 정부의 입장에 동의한다는 얘긴가.
 
  “개입을 안 하면 주도권을 놓친다. 류우익(柳佑益) 통일부 장관이 현재 스탠스(stance·입장)는 제대로 잡았다고 본다. 고위급회담을 제안하고 공을 북한에 넘겼다. 예전엔 선행조건을 걸었는데, 이번엔 그 조건들을 의제화했다. 그 자체가 큰 변화다.”
 
 
  전성훈, “北, 올해 또 핵실험 가능성”
 
전성훈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전성훈(全星勳)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올해 하반기쯤 미사일·핵실험으로 도발할 가능성이 크다”면서 “주한미군 전술핵 재배치 등 구체적 대응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급변사태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최근 몇 해 동안 급변사태에 대한 논의가 지속돼 왔다. 그리고 김정일 사망으로 급변의 단초가 열렸다. 원하든 원치 않든 나름의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대한민국의 의무이자 권리다. 상당수가 북한의 안정을 바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북한 내부가 구조적 모순이 극에 달한 막바지에 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그들’의 바람과 달리 급변사태가 전개될 가능성이 시간이 갈수록 높아진다.”
 
  ―향후 북한정세를 예측한다면.
 
  “올해 하반기에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 남한 대선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다. ‘김일성 탄생 100주년’인 4월까진 생일상까지 차려 놓고 난리를 피우진 않겠지만, 여름이 지나면 여러 형태로 도발을 시도할 것이다. 외교안보연구원의 <국제정세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미사일·핵실험 가능성이 가장 크다.”
 
  ―북핵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1990년대 중반부터 우리 정부를 비롯해 전 세계가 북한의 핵 포기를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6자회담에 참가하는 전문가 중 누구도 북한이 핵을 포기할 거라고 믿지 않는다. 북한은 이미 김정일의 최대 유산을 ‘핵과 미사일’로 규정했다. 북한의 자발적인 핵포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 국민은 의도와 상관없이 북한의 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한다. 초반에 포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핵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냉정하게 판단해 대북정책을 재정립해야 한다.”
 
  ―핵협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인가.
 
  “6자회담, 남북회담 등 양자·다자회담을 포기할 순 없다. 협상과 동시에 안보적으로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해 초 《조선일보》 김대중(金大中) 고문이 ‘남한이 핵을 가져야 북한이 협상한다’고 주장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전략이 중요하다. 핵무장하자는 주장은 협상을 위해선 좋지만, 실제 핵무기 개발은 국가적으로 손해다. 이런 상황에서 주한미군의 전술핵 재배치는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다. 핵무기 직접개발에 대한 위험부담은 덜면서, 남북 쌍방이 핵군축을 시도하는 길을 모색할 수 있다.”
 
 
  김성민, “1년 기다리다 반세기 잃어”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김성민(金聖珉)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에겐 죄가 없다는 생각이나,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는 생각은 모두 헛수고”라면서 “1년 기다리다가 또 다른 반세기를 북한에 끌려다닐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정은 시대’의 북한이 변화할 수 있다고 보는가.
 
  “김정은은 김정일과 다를 거란 얘기들을 한다. 나이도 어린 데다 통치경험도 적어 변화가 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과거 우리가 김정일을 적으로 규정한 가장 큰 이유는 김일성이 세운 시스템의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테러와 학살 등 수많은 악행을 벌였지만, 김정일 체제 초기엔 이를 제대로 규명하기 어려웠다. 북한에 남한은 여전히 무력통일의 대상이다. 이미 김정은은 김정일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김정일 시스템’의 후계자가 됐다.”
 
  ―‘김정은 시스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1~2년 지켜본다는 것은 어린 김정은에게 체제를 갖출 기회를 주는 셈이다. 1년을 기다리다가 반세기를 잃을 수 있다. 빠른 시일 내에 적으로 규정하고, 불안한 정권을 바꿔야 한다. 더 나아가면 정권붕괴다.”
 
  ―북한 내부에서 김정은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한가.
 
  “주민들은 큰 관심이 없다. ‘어린놈이 뭘 하겠나’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주민 대신 상층부의 결집력은 높아졌다. 하지만 이도 얼마 못 갈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북한이 아니라 남한 국민의 정서다. 전략적, 외교적으로 김정은에게 김일성-김정일의 시스템을 부정하라는 압박을 가할 수 있다. 탈북자나 대북 민주화 운동가들은 결국 개개인보다는 남한을 적화통일의 대상으로 여기는 노동당 정권과 전쟁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적으로 규정한 독재정권을 왜 우리는 적으로 규정 못하나.”
 
  ―김정은 체제는 앞으로 어떤 대남전략을 쓸 것으로 보이나.
 
  “김정은은 현재 상당히 불안한 심리일 것이다. 겉으론 온갖 폼을 잡고 있지만, 스스로도 충분히 위기를 절감할 것이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계속 대남 강경책을 펼치고, 내부통제를 위해 추가도발을 계획할 수 있다. 하지만 천안함 이후 남한의 대응이 바뀌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도발은 어렵다. 미사일·핵실험은 사실상 간접도발인데, 부담은 적고 국제사회에 대한 영향은 크기 때문에 이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하태경, “北 정치개혁이 성공 가능성 크다”
 
하태경 열린북한방송 대표.
  하태경 열린북한방송 대표는 “18년 동안 성과를 거두지 못한 북핵폐기 협상보단 정치개혁 전략이 성공 가능성이 크다”면서 “북한 내부의 민주화 세력을 육성해 정권교체를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권교체가 가능한가.
 
  “정권교체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 북한도 남한의 정권교체를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종북세력이 남한의 정권을 잡고, 연방제를 통해 북한 주도의 통일을 하는 것이 북한의 궁극적인 목표다. 남한은 헌법에 평화적 통일을 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사실상 북한의 정권교체를 헌법이 명한 셈이다. 결국 북한 내부에서 정권교체가 일어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수밖에 없다. 북한 내부의 민주화 세력을 육성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결국 실패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말은 많지만 대부분 레토릭(rhetoric· 미사여구)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요약하면 ‘대한민국 지키기’ 정도다. 북한 내부에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은 안 썼다. 오히려 미국이 적극적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현재 목표는 남은 임기 1년 동안 대화를 통해 북한의 도발을 어떻게든 막자는 것이다.”
 
  ―대북정책이 바뀌어야 하나.
 
  “새로운 대북접근법을 짜야 한다. 북한은 한 시대가 갔고, 새로운 시대가 들어섰다. 과거 김정일을 대상으로 한 모든 정책을 재검토해서 새 판을 짜야 한다. 초당적·장기적 관점이 필요하다. 시급한 것은 북한 내부의 변화를 촉진하는 것이다. 공식 정책도 있고, 비공식 전략도 있다. 민간단체도 활용할 수 있다.”
 
  ―북한을 변화시키는 바람직한 방법은.
 
  “지금까지 대북정책은 정치개혁보단 핵문제에 집중했다. 1994년부터 18년 동안 북핵 폐기를 위한 협상을 시도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핵협상에 쏟을 에너지 중 일부를 정치개혁에 쏟으면 된다. 정치개혁이 선행하면, 핵도 자연스럽게 폐기될 것으로 본다.”
 
  ―북한에서 정치개혁이 가능한가.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 직전 취한 정책이 정치개혁이다. 북한은 수령 종신제를 폐지하고, 간부 정년제를 도입하면 된다. 현재 북한 최고위급 인사의 평균연령이 70~80대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틀어쥐니까, 새로운 발상이 안 나온다. 김정은 체제를 호화롭게 출범시키면서 한다는 소리가 또 ‘선군’이다.”⊙

월간조선 2012년 2월호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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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박 "김정일 정권… 죽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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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추적] 편법 모금 통로 된 국회의원 출판기념회
정치권 실세들, 총선 앞두고 수억씩 챙겨

⊙ 2011년 출판기념회 개최 의원 101명 전원에게 참석자수ㆍ축하금 공개요청… 응답은 2명
⊙ 정치자금법 피하는 ‘남는 장사’… 親朴, 多選, ‘알짜 상임위’는 3大 흥행보증수표
⊙ 평균비용 3000만원, 수입은 1억~2억원… ‘적자’ 난다면 “한 번 더 출판”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취재지원 = 장재진 월간조선 인턴기자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2011년 11월 28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은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뤘다. 입구부터 도로까지 줄이 길게 이어졌다. 행사장 입구에선 한 국회의원 내외가 방문객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친박(親朴) 성향의 이 중진의원은 자신의 책 출판을 기념하기 위해 모여든 지지자 수가 예상을 훌쩍 뛰어넘자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로비도 상황이 비슷했다. ‘돈 봉투’와 ‘책 봉투’를 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빼곡히 차려진 모금함과 방명록 앞으로 봉투 든 사람들은 또 줄을 섰다. 명목상 ‘책 판매대금’이지만, 이를 책값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상 없었다. 대놓고 “‘축하금’, ‘후원금’은 어디 넣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봉투 액수는 천차만별이다. 지역구 단체에서 온 한 인사는 30만원을 넣었다고 했고, 의원과 친분이 있다는 한 교수는 20만원을 넣었다고 했다. 두툼한 봉투 너덧 개를 가져온 한 남자는 신분을 묻는 기자의 질문을 끝까지 피하며 급히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모두 액수와 상관없이 받아간 책은 단 한 권이었다.
 
  약 550석 규모의 행사장은 당연히 만석(滿席)이었고, 홀 뒤편 공간까지 만원(滿員)이었다. 많은 사람이 인사만 하고 돌아간 것을 감안하면 2000명 이상이 온 것으로 추산된다. 양쪽 벽은 모두 주요 정치인과 기관장들이 보낸 화환으로 가득했다. 급하게 보냈는지 의원 이름이 잘못 적힌 화환도 보였다.
 
  마술쇼와 사물놀이패 공연이 이어졌고, 30분 후 정식 행사가 시작됐다. 사회는 여당 대변인 출신의 동료 국회의원이 맡았다. 내ㆍ외빈 소개와 축사가 30분 넘게 진행됐고, 한 의원은 “이번 출판기념회 제목은”이라며 책 제목을 설명했다. “‘출판을 위한 기념회’가 아니라 ‘기념회를 위한 출판’”이란 말이 나올 만했다. 출판기념회의 주인공이 마이크를 잡은 것은 행사가 시작한 지 한 시간이 훨씬 넘어서였다.
 
  행사는 박근혜(朴槿惠) 전 대표가 등장하자 중단됐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축사를 하던 한 중진의원은 곧바로 “박근혜 대표께서 도착하셨습니다”라고 외치며 연단을 비워줬다. 무대 위로 올라간 박 전 대표는 짧은 축사를 마치고 내려왔지만, 취재진과 방문객의 모든 시선은 계속 박 전 대표에게 쏠렸다. ‘책 이야기’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다수 정치인의 출판기념회 풍경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2011년에만 129회 개최
 
축하금을 내고 방명록을 쓰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한 중진의원의 출판기념회 행사장 로비.
  국회의원이 ‘작가’로 변신하는 계절이다. 여당은 해체 위기에 야당은 난투극이 벌어지지만, ‘그들만의 기념회’는 주야장천이다. 일명 ‘오세훈법’으로 불리는 정치자금법의 망을 교묘하게 비켜가기 때문에 ‘비공식 후원’을 마음 놓고 받을 수 있다. 금액 한도, 모금액수, 개최횟수에 제한도 없고, 선관위에 모금내역을 신고할 필요도 없다. “세(勢) 과시와 총알(정치자금) 장전”, 이 일거양득(一擧兩得)을 정치인들이 쉽게 포기할 리 만무하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이 앞다퉈 출판기념회를 여는 가장 주된 목적이다.
 
  《월간조선》이 2011년 한 해 동안 현직 국회의원이 개최한 출판기념회 현황을 전수조사한 결과, 12월 14일까지 총 129회가 열렸으며 이 중 과반인 73회가 11월과 12월에 몰렸다. 선거일 90일 전부터 출판기념회가 금지되기 때문에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막판 ‘수금’이 과열되고 있다.

개최 의원 수는 총 120명이며, 이 중 9명은 2011년에만 두 차례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정당별로 분류하면 한나라당이 58명, 민주당 46명, 자유선진당 6명, 미래희망연대 5명, 민주노동당 3명, 창조한국당 1명, 무소속 1명 순이다. 한나라당 의원 중 34%와 민주당 의원 중 53%가 개최한 셈이다. 비교섭단체의 경우 자유선진당 38%, 미래희망연대 62%, 민주노동당 60%, 창조한국당 50%로 집계돼 의석 수가 적은 당일수록 개최 의원 수가 많았다.
 
  129건 중 89건이 의원회관이나 헌정기념관 등 국회 내부 시설을 이용했으며, 40건은 학교, 호텔, 극장, 강당 등 지역구 시설에서 열렸다. 모든 통계는 언론매체를 통해 공개된 행사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지역구 행사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늘 것으로 보인다. 18대 국회 회기로 기간을 확대하면 출판기념회를 하지 않은 의원은 손에 꼽을 정도다.
 
  당대표를 지낸 의원의 한 비서관은 “출판기념회의 핵심은 결국 돈”이라며 “‘판매대금’으로 포장된 축하금의 액수와 구체적 행방은 각 의원실에서도 최소 인원만 아는 극비사항”이라고 설명했다. “친박계 한 의원이 4억원을 모았다”, “장관을 지낸 중진의원은 7억원을 거뒀다”, “한 야당 의원은 지역구 학생까지 동원해 세를 과시했다” 등 정체불명의 소문은 무성하지만, 정확한 모금 총액을 공개한 의원은 극히 드물다.
 
  출판기념회의 대략적 ‘흥행기준’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아는’ 비밀이다. 초ㆍ재선의 경우 평균 1억~1억5000만원 정도를 거두면 어느 정도 성공한 케이스다. 3선 이상 중진의원은 평균 2억원에서 많게는 3억원까지 벌어야 한단다. 다선(多選) 의원 중 주요 부처 장관 출신이거나 국토해양위원회, 지식경제위원회 등 ‘알짜배기’ 상임위원회 소속일 경우 추정 액수가 훨씬 늘어난다. ‘주요 친박계 인사’란 타이틀까지 달리면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출판기념회의 수입이 국회 내 권력구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셈이다.
 
국회의원 출판기념회 포스터로 도배된 의원회관 벽.
 
  “대놓고 ‘삥 뜯는’ 후원회”
 
  수입은 천차만별이지만, 비용은 큰 차이가 없다. 제작 및 인쇄, 대필작가 섭외, 행사비용 등을 모두 합쳐 3000만원 정도다. 웬만해선 적자가 나지 않아 “잘하면 대박, 못해도 본전”이란 말도 생겨났다. 혹여 적자가 나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역구에서 한 번 더 열거나, 다음 해에 새로운 책을 내면 되기 때문이다.
 
  이 많은 돈은 어디서 나올까. 출판기념회의 ‘물주’는 지역구 산하 단체 인사 및 기업가, 상임위 피감기관 및 공기업, 기성 정치인 ‘줄’을 잡으려는 출마희망자 등이다. 일부는 대놓고 후원금을 ‘상납’할 수 있는 로비 수단으로 활용하지만, 대다수 관계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하루 수차례의 출판기념회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지식경제부 산하기관에 근무하는 A 과장은 두 시간 터울로 개최된 출판기념회 세 군데를 돌고선 “출판을 기념하는 행사가 아니라, 대놓고 ‘삥 뜯는’ 후원회”라며 이렇게 호소했다.
  
  “기관장급쯤 되면 나름 여윳돈이 있을 테니 돈 때문에 심각하진 않겠죠. 그런데 저희 같은 직원 입장에선 매일같이 이어지는 출판기념회 때문에 수백만 원이 나갑니다. 따로 지원이 없으니 개인 돈을 쏟아부어야죠. 일단 상임위 의원들 전원은 기본으로 챙겨야 하고, 조금이라도 친분을 쌓아야 하는 의원도 ‘보험’ 차원에서 꼭 찾아갑니다. 국회의원뿐 아니라, 정부기관 인사나 관계사 임원들까지 포함하면 연간 수십 건은 물론 많으면 100건까지 갑니다.”
 
  A 과장은 축하금 비용에 대해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20만~30만원을 꼬박꼬박 낸다고 했다. 이는 순수하게 직원 개인 차원의 금액이며, 관련 업체나 기관 차원에선 수백만 원 단위의 고액 축하금도 자주 오간다고 했다.
 
  상임위 관련 기관 또는 기업체의 경우 따로 연락을 할 필요도 없다. 포스터 크게 만들어서 의원회관 곳곳에 붙여놓으면 국회를 오가는 피감기관 인사들이 ‘알아서 보고’ 찾아온다고 한다. A 과장은 “임원 비서들이 매일 아침 챙겨야 할 일정에 국회의원 출판기념회가 추가된 것도 이미 오랜 일”이라며 “수십 건의 출판기념회가 한 번에 몰린 2011년 연말은 웬만한 경조사보다 출판기념회 건수가 더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의원 본인도 안 보는 책 허다”
 
  여당 최고위원의 보좌관으로 근무했던 B씨는 “(책에 쓴) 종이 값이 아깝다”며 “대한민국 정계에서 하루빨리 없어져야 할 관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편법적인 모금 행위가 일어나는 이상, 피감기관이나 기업 입장에선 편법으로 자금을 만들어줄 수밖에 없다”며 “보통 백만 단위로 ‘책값’을 내는데, 그 돈이 어디서 어떻게 나오겠나”고 반문했다. 출판기념회의 기형적 모금행위가 오히려 관련 기관의 비자금 조성을 독촉하는 꼴이 됐다. B씨의 설명이다.
 
  “모양새는 결혼식 축의금 비슷한데, 규모는 조금 더 크다고 봐야 합니다. 분명 책 판매대금인데 영수증 받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완전한 현금 장사니 세금도 의원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법을 바꿔야 이를 단속할 수 있는데, 여야 막론하고 국회의원 대다수가 ‘공범’인데 누가 총대를 메겠습니까. 밖에선 아무리 ‘정당정치의 최대위기’라고 떠들지만, 출판기념회 가보면 그냥 잔치 분위기예요. 대한민국 정치의... (계속)
  
기사 全文 보기: 월간조선 2012년 1월호 (바로가기)

[정치·북한] - 北인권법•역사교과서 방치하고 포퓰리즘에 동참한 한나라당
[인터뷰] - 인터뷰 / “세종시法 무효” 5년째 법정투쟁 중인 崔大權·全基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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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정권은 악마다”

대북 인권운동가 로버트 박씨는 북한 김정일 정권을 악마로 규정했다. 이는 그가 북한에서 당한 고문이 상상을 초월했음을 보여주는 예다. 합리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실용적이지도 않고, 광신적이고 미신적인 요소가 더 많은 북한 정권의 행태는 종교적 접근법이 더 유효할 수도 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김일성은 자신을 신격화한 주체사상을 세계 10대 종교로 만들었다. 신약성경 요한계시록엔 하나님을 모독하고 신도들을 죽여 평정한 다음 백성을 지배한 첫째 짐승과,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첫 번째 짐승의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도록 강제한 두 번째 짐승이 나온다.

≪월간조선≫은 2003년 12월 이 두 악한 짐승을 6·25 남침을 일으킨 김일성과 아버지를 우상화해 백성을 탄압하는 김정일에 비유한 바 있다. 우연일 수 있지만, 김정일의 생일은 2월 16일로 6을 세 번 곱한 결과(216)다. 1998년 7월에 치러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김정일은 666구역에서 당선됐다.

당시 기사는 “그가 자신의 지역구 번호를 666으로 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좋다. 나는 성경의 그 마왕(魔王)이 되겠다’는 오기로서 그렇게 했을지 모른다”고 설명했다. 신상옥(申相玉) 감독에 따르면 김정일은 자신을 향해서 환호성을 지르는 군중을 바라보면서 “저건 다 가짜요”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는 악당(惡黨)을 자임한 인간이다.

월간조선 201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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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사망에 대한 단상

 

김정일

김정은과 김정일. /AP연합뉴스


"金正日 死亡."
이 다섯 글자 소식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곧 죽는다, 죽겠다 하면서 안 죽는 그를 보며 神의 무정함을 고뇌했었다.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선 많은 의혹이 남아있다. 북한의 공식 발표는 그가 "2011년 12월 17일 오전 8시30분 달리는 야전열차 안에서 중증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성 쇼크 합병으로 사망했다"고 하지만, 정확한 死因과 사실관계는 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김정일이 죽었다는 것이다.

자연사든 병사든 타살이든 자살이든 그는 죽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발표가 대한민국 대통령 생일이자 당선일에 이뤄졌다는 것도 뜻깊다(혹자는 이것도 '가카의 꼼수'라고 외친다). 한반도 역사가 급변한 하루 동안, 수많은 말들이 오갔다. 300만 동포를 죽인 살인자를 규탄하기에 앞서 "서거", "애도", "조문"이란 말부터 꺼내는 그네들의 저의는 정말 의심스럽다. 그들의 머릿속엔 2000만 북한 동포는 이미 사라졌는가. 아니면 그들이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김정일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고 조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 전에 그의 손에 죽어간 300만 대한민국 국민(헌법상 북한 주민은 대한민국 국민이다)의 죽음부터 애도하는 게 순서아닐까. 조문에 대한 논란은 그 다음이란 게 상식 아닌가. 김정일의 죽음과 함께 하나가 돼야 할 대한민국이 '조문'이란 이슈 가운데 곧바로 대립됐다. 김정일이 지옥에서 기뻐할 일이다.

혹자는 그런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데, 그도 한 생명이 아니었느냐"고. 아니다. 적어도 김정일에겐 다른 적용이 필요하다. 그에겐 생명이 아니라 그의 죽음이 천하보다 귀하다.

1994년 김일성의 죽음은 그리 '귀하게 쓰임받지' 못했다. 분단은 더 고착화했고, 김일성보다 더욱 악한 독재자가 등장했다.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포를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김정일은 전쟁이 없던 평화 시기에 300만 동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김정일의 죽음이 '귀하게 쓰임받을지'는 철저하게 대한민국 국민의 몫이다. 제대로 되지 못한 대처는 결국 더 심각한 악을 불러올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히틀러를 몰아낸 세계는 진정한 평화를 얻은 줄 알았다. 홀로코스트보다 더 악한 존재가 등장하리라곤 예측을 못했다. 악의 공백은 대부분 더 큰 악이 채운다는 공식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짧게는 이번 한 주, 길게는 내년초까지 언론과 SNS 등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지 유심히 지켜보라. 고상한 척 하는 양비론과 양시론은 잠시 덮어둬도 좋다. 큰 사건은 개인과 조직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만든다. 처음엔 분위기에 눌려 침묵하다가, 기회가 되면 이상한 논리로 괴변을 펼치는 자들이 분명 득세할 터. 북한 해방을 위해 하나가 돼야할 시점에 찬물을 끼얹으며 분열을 조장하는 이들이 벌써부터 꿈틀대고 있다.

선관위 디도스, 저축은행 게이트, 이상득 보좌관, 김영완 귀국 등 주요 이슈가 모두 묻히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최소한 연말까지 언론의 관심은 김정일 사후 북한정세에 집중될 것이다. 하지만 잊지는 말아야 한다. 시류와 상관없이 모든 이슈에 대한 추적과 규명은 계속돼야 한다.

내일 청와대의 공식 성명이 기대된다. 정치란 그렇다. 아무리 잘못이 많아도 말 하나로 사람을 바꾸고 국가를 변화시킨다. 이 대통령의 잘못을 묻자는 얘기가 아니다. 외교적 수사를 빼고서라도, 진심어린 마음으로 '7000만 대한민국 국민'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으면 좋겠다. 국가지도자의 역할은 이럴 때 빛을 발해야 한다. 이곳저곳 눈치보는 어설픈 말은 집어치웠으면 한다.

택시를 타다 TV에 낯익은 얼굴들이 계속 나오길래 전화를 돌렸다. 통화내용을 들은 기사가 "뭔가 상황을 잘 아시는 분 같다"며 어떻게 되겠냐고 물었다. 간단하게 답했다. "일단 잘 된 것"이라고. 일단은 잘 됐지만, 계속 잘 될지는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잘 죽은 건 확실한데 그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부여할 몫이다.

지금은 누구를 조롱하고 즐길 때가 아니다. 조금은 진지해지자. 역사는 지금도 우리의 모든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언젠가 북한 주민이 이렇게 물을 때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김정일이 죽었을 때, 당신은 굶주린 민족을 위해 무얼 했는가."

P.S. 안철수의 반응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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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입수] ‘북한 보도지침’ 2만8500쪽 全文 분석
“(제1연평해전은)김대중 반역집단이 옷로비 등 위기탈피 위해 무장도발을 조작한 것”

⊙ 북한 《기자활동상식》 총 100권, 북한發 괴담의 종합선물세트
⊙ 金日成·金正日 우상화… 韓·美 역대 대통령에겐 원색적 비난
⊙ ‘한국군 勝’ 제1연평해전을 “남조선 괴뢰의 계획적 도발에 10여척 격파 수백명 살상” 날조
⊙ “CIA는 예산 55% 군사정변 선동작전에 탕진… FBI는 자국민의 사고방식·식생활까지 감시”
⊙ “신앙 자유 보장한다”며 “종교는 모두 허황한 것, 선교는 美帝의 침략수단”
⊙ “적대국 사람 만나면 장군님의 위대성과 우리式 사회주의의 우월성 선전하라”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기자활동상식

북한 《기자활동상식》.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선전매체 기자 교육을 위한 자료집이 최근 무더기로 유출됐다. 《기자활동상식》이란 제목의 이 문건은 주제별 50~600쪽으로 구성된 책을 10권씩 10묶음으로 모은 것으로, 총 2만8583쪽(100권) 분량이다. 대북매체인 《자유북한방송》이 최근 북한 내부 정보원으로부터 PDF 파일 형태로 입수한 것을 본지에 제공했다. 지난해 한 인터넷 매체를 통해 3권에 대한 일부 내용이 짧게 언급된 적은 있으나, 100권 전체 내용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월간조선》이 전문(全文)을 분석한 결과, <수령> <역사> <국제관계> <군사> <남조선관계> <문학예술> <체육> <철학종교> <과학> <건강> 등 주제에 따라 분류된 책들은 북한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 지켜야 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5공화국 시절 폭로돼 많은 논란을 낳았던 ‘보도지침’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인 ‘북한 보도지침’, 정확히 말해 북한의 매체 통제지침인 셈이다.
 
 
 
기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가이드라인
 
1999년 6월 제1연평해전을 보도한 《조선일보》. 한국군이 승리한 교전에 대해 북한 《기자활동상식》 자료는 “남조선 괴뢰의 계획적 도발에 10여 척 격파 수백 명 살상”이라며 결과를 반대로 조작했다.

  일반 상식을 제외하면 김일성(金日成)과 김정일(金正日)을 향한 노골적 찬양과 미국에 대한 비난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김정일을 “행성의 최고·최강의 령도자(영도자)”라 칭하고, 미국은 “세계 최대의 인권 불모지”로 정의하는 식이다. “김영삼은 집권욕에 물젖은 놈”, “클린턴은 호색한 카사노바도 무색케 할 인물”이라 부르는 등 한미(韓美) 양국 주요인사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북한 인민군 대위 출신인 김성민(金聖珉)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북한에서 ‘남조선관계’나 ‘국제관계’ 등은 일반 주민이 잘 모르는 분야”라며 “북한에서 비밀 문건을 꽤 봤다는 탈북자들도 모두 몰랐던 자료”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와의 문답이다.
 
  ―특정 선전매체 내부 교육용 자료인가, 전 매체가 참고해야 하는 보도지침인가.
 
  “북한에서 기자는 중앙당 간부가 비준하는 정치일꾼으로 보통 주민과 다르다. 회사에 관련 없이 전(全) 기자를 교육하는 자료다. 한국으로 치면 보도지침과 비슷하지만 내용은 황당하다. 매체 기관과 조선콤퓨터쎈터(KCC)가 함께 제작한 자료라고 들었다. 우리는 북한 내(內) 한 기자로부터 입수했다.”
 
  ―기관의 가이드라인을 선전매체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나.
 
  “자료에 포함된 내용 중 상당 부분은 북한의 일반 주민들이 모를뿐더러 알 방법도 없다. 기자들에게 그만큼 정보의 범위를 넓혀 주고 확실하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식이다. 기존 보도된 기사를 그대로 전재한 부분도 있지만, 어떤 기사를 쓰든 해당 자료 내용을 벗어나지 말라는 뜻이다. 무조건 지켜야 한다.”
 
  ―작성한 시기는 언제인가.
 
  “이번에 입수한 10묶음은 1999~2004년 사이 작성됐다. 매년 한두 차례 새로운 내용을 10권씩 만들어 추가하는 방식이다. 이후 4~5권 정도 더 있는 것으로 알지만, 아직 입수는 못했다.”
 
  ―최근 평양 시민 210만명 신상자료가 《주간조선》을 통해 보도되는 등 북한 내 비밀문서 관리에 큰 허점이 있음이 드러났다. 무슨 의미인가.
 
  “현재 《자유북한방송》에만 PDF 파일로 저장된 체제 선전용 서적 1500권, 전자대백과사전 30권, 비공개 강연자료 및 지도 100여 건 등 방대한 자료를 6년여간 입수해 보관하고 있다. 정보 관리에 실패했다는 것은 체제에 큰 누수 현상이 발생했다는 의미다. 김정일 정권의 내부 통제력이 그만큼 많이 약해졌다.”
 
 
  “원폭 아닌 金日成 투쟁으로 日帝 패망”
 
  언론의 자유라는 개념조차 없는 북한에서 보도지침은 곧 정권의 공식 대외입장이다. 일반상식은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한 편인 반면, 정치·역사·외교 분야는 상당 정보가 사실 관계에 기초하기보단 음모론과 괴담을 모은 것에 불과해 자료의 신뢰성 수준이 상당히 낮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 자료에 필수로 포함되는 내용은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에 대한 찬양이다. 첫 번째 묶음의 제1편(1-1편)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인류의 마음속에 영원불멸할 것이다>란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의 연설, 결론, 담화, 논문, 강의록 등이 1860건에 달하고, “인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헌신으로” 1945년 10월부터 휴일도 없이 2530여 일을 주요시설 시찰에 사용했으며, 세계 70여 개 나라 및 국제기구에서 180여 개의 최고훈장과 메달을 수여받고, 30여 개 도시가 명예시민 칭호를 준 “수천 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위대한 수령”이다. 첫 단계부터 정상적 ‘매체’와는 거리가 멀다.
 
  1-8편 <토막상식>엔 “사람의 필적과 성격”이란 대목이 있는데, 김정일의 필적에 대해 “경애하는 장군님의 필적은 절세 위인의 필적으로서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가장 완성되고 세련된 서예의 극치”라며 “속도감과 운동감이 집중적으로 표현, 침체와 주저를 모르는 완강한 투지와 무한대의 힘과 용기, 천재적 예지와 무비(無比)의 담력이 담겨 있다”고 했다.
 
  일제패망에 대해선 “미국이 침략적 야망을 이룩하기 위해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했지만, 전쟁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며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현명한 령도(영도) 아래 전개된 항일 무장투쟁 때문에 일제는 급속히 패망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다음은 김 부자에 대한 칭송 중 일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는 시대와 혁명, 인류 앞에 쌓아 올리신 불멸의 업적으로 하여 세계혁명적 인민들과 진보적 인사들, 정치가들로부터 ‘수령 중의 수령, 위인 중의 위인’, ‘세계가 선망하는 21세기 지도자, 특유의 공산주의 정치수령’, ‘주체의 대성인’, ‘행성 최고최강의 령도자’로 다함 없는 존경과 흠모, 격찬을 받고 계신다.” (2-1편 <21세기의 태양 김정일동지>)
 
  “(김일성) 회고록에 대한 독자 대열이 급속히 확대되는 속에 해마다 많은 해외동포와 외국의 벗들이 우리나라 외교대표부와 해당 기관 앞으로 자기들에게 회고록을 더 많이 보내 줄 것을 절절히 당부하는 편지들을 끊임없이 보내 오고 있다. 그들은 편지에서 끝없는 흥분과 깊은 감동 속에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회고록을 읽은 소감에 대해 격정에 넘쳐 토로하고 있다.” (3-1편 <백두산3대장군의 위인상>)
 
 
  “美 컴퓨터도 인정한 金正日의 지략”
 
기자활동상식

북한 《기자활동상식》 자료에 기록된 “력대 괴뢰 대통령”들. 이승만~김대중 역대 대통령 모두 원색적 비난의 대상이다

  “수령복(福)이란 말은 일찍이 없었다. 그것은 그 어느 시대, 그 어느 나라의 인민도 그러한 복을 느끼지도 누리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김일성, 김정일 시대에 와서야 우리 민족, 우리 인민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받아 안고 누리는 수령복으로 하여 수령복이라는 말이 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4-1편 <수령과 혁명>)
 
  “어떤 장군이 명장인가. 어버이 수령님이시야말로 이 세상 모든 장군을 다 합친 장군보다 훨씬 더 위대한 장군, 명장 중의 위대한 명장이시다. 오늘 우리는 어버이 수령님과 똑같으신 또 한 분의 위대한 장군을 모시는 크나큰 행운을 받아 안았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 ‘나는 우리나라에 또 한 사람의 장군, 김정일 장군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또 한 분의 위대한 장군, 위대한 명장이 계신다. 동서고금의 이름난 명장들을 다 합친 명장보다 더 위대하신 두 분의 명장, 백두산장군이 이 땅에 계신다.” (9-1편 <군사>)
 
  “미제는 최근 수천 대의 컴퓨터를 가동해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장군님의 군사적 지략과 령도의 특징을 도출하였는데 그 답은 첫째, 판단이 정확하다, 둘째, 결심이 단호하다, 셋째, 타격이 무자비하다는 것이 나왔다고 한다.” (2-6편 <군사>)
 
  ‘수령’에 대한 칭송만큼 ‘미제(美帝)’에 대한 비난도 자주 등장한다. 자료에 따르면, 북한에게 미국은 초기부터 학살, 침략, 약탈로 시작돼 악행을 지속하는 나라로 풀이된다.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 12일 3척의 선박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후 서방 식민주의자들은 이리떼처럼 몰려들었다.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 인디언들을 닥치는 대로 무참히 학살하면서 대서양 쪽 13개 주를 장악하고 1776년 7월 4일 영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을 선포했다. 이때로부터 미제의 저주로운 침략과 약탈의 역사가 시작됐다.” (1-4편 <국제관계>)
 
  자료는 ‘미 중앙정보국’(CIA)에 대해 “세계 여러 나라에 지부를 두고 정탐, 파괴, 암해 활동을 벌인다”며 “국회 심의 없이 돈을 마음대로 쓰고 연간 180억 달러 예산 중 100억 달러 이상이 외국 정복을 위한 군사정변이나 기타 비밀작전 … (계속)

기사 全文 보기 - 월간조선 2011년 12월호
 
▶ 납북자 21명 평양에 살고 있다 - 평양 거주 단독 확인
▶ “핵심정보 유출은 정권붕괴 임박한 것” 박선영 의원 “송환촉구 결의안 제출”
▶ 북한 독침테러 사건의 전모 - 박상학뿐 아니라, 김성민·이민복도 노렸다
▶ 왕재산 간첩단 총책 "출소하면 국가유공자 될 것" 호언장담
▶ 김현희를 가짜로 모는 사람들 - ‘김현희의 편지’ 공개 후 ‘남북한 정부 공동조사’ 주장하기 시작
▶ 北 정치범 수용소 전시회 연 한동대 북한인권학회 <세이지>
▶ 北 사이버 공격시 15분 만에 주요시설 초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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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 21명 평양에 살고 있다

국정원 2006년 “北에 생존” → 북한 당국 “생존 확인 불가” → 北 당국이 작성한 주간조선 입수 자료서 평양 거주 확인

납북 고교생 이명우·이민교·최승민·홍건표
납북 어부 강병일·권용만·김명회·노성호·문경식·이광원·신태용·장진구·조규영·조석원
유럽서 납치 유성근 가족과 고상문
KAL기 피랍 성경희·정경숙·최석만

6·25 전후 납북된 505명 중 21명 평양 거주 확인
대부분 북한서 결혼… 16명은 노동당 가입

북한 당국 “납북자 없다” 주장 거짓 드러나
“내 가족 살아있냐” 확인요청 주간조선에 쇄도


김대현·김경민 기자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박용현·김윤집 인턴기자  

 

납북고교생

▲ 납북고교생. (왼쪽부터) 이명우(천안농고 3년), 이민교(태광고 2년), 최승민(태광고 2년), 홍건표(천안상고 3년)


주간조선은 북한 당국이 작성한 만 17세 이상 평양시민 신상자료를 단독 입수, 지난주(2177호)에 보도했다. 이후 이 자료를 분석한 결과, 1977~1978년 전남 신안군 흑산면 홍도에서 납치된 고교생 이민교(52)·최승민(53)·이명우(51)·홍건표(51)씨가 평양에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주간조선은 국내 납북자 단체가 확보하고 있는 전후(戰後) 납북자 505명의 신상자료와 이번에 입수한 평양시민 신상자료를 일일이 대조한 결과,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그동안 북한은 이들 ‘고교생 납북자’ 4명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남측 가족의 요구에 대해 생사확인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해 왔다.
   
   이들 고교생 납북자 4명 외에도 현재 평양에는 1960~1980년대 납북된 어부 10명과 1969년 납북된 KAL 승무원 3명 등 모두 21명의 납북자가 살고 있는 것으로 입수 자료 분석 결과 밝혀졌다. 이들 중 일부는 이산가족 상봉이나 북한 방송 출연, 북한으로부터의 통보 등으로 생사가 분명하게 확인된 사람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북한의 공식 문서를 통해 생사가 처음 분명하게 확인된 사람들이다. 북한은 그동안 공식적으로 “납북자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지만 이번 주간조선 입수 자료를 통해 그러한 주장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평양시민 신상자료는 작성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 확인되지 않아 이들 평양 거주 납북자 21명 중 현재 몇 명이 생존해 평양에 살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평양시민 신상자료를 주간조선에 제공한 대북 정보통은 “이 자료 작성 시점이 2005년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지만 이 자료에는 2010년 시민증 재발급 기록도 기재돼 있다. 이를 보면, 2005년에 만들어진 자료가 최근까지 일부 업데이트가 이뤄졌던 게 아닌가 추정된다. 북한 당국이 사망자를 자료에서 삭제하는 작업을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자료에 명시된 21명이 모두 생존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는 이번 평양 거주 납북자 명단 21명이 확인된 것에 대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역사적 사건”이라며 “납북자 한 명을 생사 확인하는 것도 힘든데, 이렇게 무더기로 나온 것은 경천동지할 일”이라고 했다. 최 대표는 또 “북한이 끝까지 ‘생사 확인 불가’라고 주장했던 납북자들의 주소까지 상세하게 나온 상황”이라며 “북한이 그동안 범죄 사실을 은폐해 왔다는 증거가 드러났으니, 정부와 국제사회가 납북자 송환에 새롭게 나서야 한다”고 했다.
   
   이번에 생존 사실이 확인된 4명의 ‘고교생 납북자’는 1977년 전남 신안군 흑산면 홍도에서 납치된 이민교(당시 18세)·최승민(당시 17세)씨와 1978년 같은 장소에서 납치된 홍건표(당시 17세)·이명우(당시 17세)씨다. 그동안 북한은 이들에 대해 남측 가족들의 생사 확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확인 불가”라고 답했었다. 지난 2006년 7월 통일부 당국자는 “고교생 납북자를 이산가족 범주에 포함시켜 관리해 왔는데 고교생 납북자 최승민, 이민교, 홍건표씨에 대해 북측이 생사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해 왔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통일부는 “또 다른 납북 고교생 이명우씨는 가족이 최근에야 상봉 신청을 해왔기 때문에 향후 상봉 행사에서 최우선으로 생사 확인 요청을 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후 이명우씨도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평양 주민 신상 자료

▲ 북한 당국이 작성한 주민 신상자료 원본 파일


   이들 외에 1978년 군산 선유도에서 실종됐던 고교생 김영남(당시 16세)씨는 2006년 6월 14차 상봉 행사장에서 어머니와 재회해 살아 있음이 밝혀졌다. 당시 김씨는 일본인 납북자 요코타 메구미의 남편으로 밝혀져 주목을 받았었다. 메구미는 대한항공 858기 폭파범 김현희의 일본어 교사였다. 김영남씨를 포함한 이들 5명의 고교생 납북자에 대해서는 2006년 4월 당시 김승규 국가정보원장이 국회 정보위에서 “북한에 생존해 있다”고 정보위원들에게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북한은 김영남씨를 제외한 4명의 고교생 납북자의 생사 여부에 대해서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이번 주간조선 입수 자료에 따르면, 이민교, 최승민, 홍건표씨 등 3명은 112연락소 지도원(연락소는 간첩 교육기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만경대구역 팔골2동으로 주소지도 같다. 또 이명우씨는 ‘인민경제대학 학생’의 신분으로 룡성구역 룡성 1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평양시민으로 분명한 직업까지 갖고 있는 이들에 대해 북한이 “생사 확인 불가”라고 답해온 것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평양시민 이름 분석
   
   김정일 0명, 김일성 1명, 김정은 59명
   
   자료에 나온 평양시민 중 김정일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국방위원장’을 빼곤 단 한 명도 없다. 김정일 이름을 쓰다 개명한 사람은 총 38명이다. 최연소 ‘김정일’이 1968년생인 점을 감안하면 김정일이 1970년대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목된 뒤 ‘작명 금지령’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이란 이름은 순안구역에 1명이 존재한다. 김일성의 경우 개명한 사람은 없고 본명인 ‘김성주’도 찾을 수 없었다.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 김한솔 등의 이름은 다수 확인됐다. 이들 대부분의 생년월일과 직업 등 신상정보는 ‘김씨왕조’와 관련이 없었다. 김정남은 1476명, 김정철은 1782명, 김정은은 59명이 있고, 김한솔은 1명(1968년생)이 평양에 살고 있다.

   피랍 고교생 이민교씨의 어머니 김태옥(79)씨는 아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주간조선에 달려와 “아들이 납북된 후 34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아들의 밥과 수저를 밥상에 같이 차려왔다. 아들 생각이 날 때면 ‘미쳐버릴 것 같아’ 산에 올라가 나무를 부둥켜안고 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라며 울먹였다.
   
   이번에 평양에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 납북 어부는 권용만(76)·김명회(56)·문경식(60)·이광원(62)·신태용(68)·장진구(56)·조규영(56)·조석원(58)·강병일(71)·노성호(50)씨 등 모두 10명이다. 이중 노성호씨는 2009년 9월 금강산에서 남한의 누나와 22년여 만에 상봉해 살아 있음이 확인됐고, 강병일씨는 2000년 북한을 탈출한 납북 어부 이재근씨가 “당진 출신 중앙당 대남연락소 지도원”이라고 밝혀 생사 여부가 간접 확인됐었다. 나머지 8명은 그동안 생사 여부가 제대로 확인된 적이 없다.
   
   주간조선 입수 자료에 따르면, 이들 납북 어부들은 대부분 직장을 갖고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다. 강원도 고성 출신의 금융호 선원 김명회씨, 전남 무안 출신 흥덕호 선원 이광원씨, 전북 군산 출신 풍복호 선원 문경식씨는 모두 직장이 112연락소다. 전남 보성 출신 안영호 선원 신태용씨와 강원도 강릉(주문진) 출신 창명호 선원 조규영씨는 130연락소, 전북 김제 출신 만복호 선원 장진구씨와 태양호 선원 조석원씨는 26연락소 소속으로 기록돼 있다. 노성호씨는 금성정치대학 학생으로 신분이 기록돼 있고, 강병일씨는 ‘조선로동당 26연락소’에 근무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납북 어부 중 대구 출신의 천왕호 선원 권용만씨만 특별한 직장이 없는 ‘부양’ 상태로 나온다.
   
   납북 고교생 4명과 납북 어부 10명 외에도 이번 자료 분석을 통해 북한에서의 신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납북자들이 적지 않다. 1969년 납북된 KAL 부기장 최석만(79)씨는 이번 자료 분석을 통해 평양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처음 드러났지만, 북한 당국은 2006년 3월 통일부를 통해 최씨의 사망 사실을 최씨 가족에 통보한 바 있다. 최석만씨는 1982년 697연락소에 배치받아 직원으로 근무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최씨는 1979년 같은 연락소 근무자인 최윤옥(67)씨와 결혼해 평양시 사동구역 송화1동에서 살았다. 북한은 2006년 3월 통일부를 통해 남한의 최씨 가족에게 최씨가 사망한 사실을 밝히면서 북한에 있는 최씨의 딸을 만날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는 게 최씨 가족의 설명이다.

KAL

▲ 1969년 KAL기 납북 사건 당시 북한에 착륙했던 동형의 대한항공 여객기.


   최씨와 함께 납북된 KAL기 여자 승무원 성경희(65)·정경숙(65)씨도 평양에 거주하며 연락소에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중 성경희씨는 2001년 3차 이산가족 상봉 때 모습을 나타내 살아 있음이 확인됐지만 정경숙씨는 당시 성씨를 통해 생존 사실이 간접적으로 전해졌을 뿐이다. 성경희씨는 평양시 모란봉구역 흥부동에서 남편 림영일(67)씨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5연락소에서 1970년부터 근무해온 성씨는 1973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인 림영일씨와 결혼했다. 정경숙씨 역시 성씨와 같은 모란봉구역 흥부동에 거주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정씨와 성씨의 거주지 번지수는 ‘한 번지’ 차이로 인접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씨는 성씨에 비해 약 22년 늦은 1992년 25연락소에 배치받았다. 정씨의 남편은 고려산업은행 처장인 오웅걸(67)씨다. 1992년 북한을 탈출한 오길남 박사(‘통영의 딸’ 신숙자씨의 남편)는 “성경희·정경숙은 구국의 소리 방송요원”이라고 증언한 바 있는데, 이번에 성경희·정경숙씨가 ‘구국의 소리’ 방송국이 있는 25연락소 소속이라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이번 자료 분석을 통해 1979년 노르웨이에서 납북된 수도여고 교사 고상문(63)씨의 구체적인 신상도 확인됐다. 그동안 북한 방송에 등장해 반한(反韓)·반미(反美) 발언을 해온 고씨의 공식 직위는 ‘농업과학연구원 도서관 사무원’으로 기록돼 있다. 고씨는 류인수란 이름의 북한 여성과 1995년 재혼한 것으로 나온다. 신혼 10개월 만에 남편 고씨가 납북되자 전처 조복희씨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1996년 투신자살했다.
   
   1971년 서독에서 납치된 주 서독대사관 노무관 유성근(78)씨와 딸 경희(47)·진희(41)씨의 신상도 분명하게 기록돼 있다. 유성근씨도 2004년 3월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에서 남한의 형과 동생을 만나 자신의 직업에 대해 통일연구소 명예연구사라고 밝힌 바 있지만, 신상자료에는 ‘서문대학교 졸업’이라고만 기재돼 있다. 오길남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유씨는 대남공작기구인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의 기관지 편집담당 요원이었다. 유씨의 맏딸 경희씨는 ‘사회과학원 세계경제연구소 연구사’이고, 둘째 딸 진희씨는 ‘김일성종합대학 박사원생’이다.

자진 월북자 행적
   
   ‘신생철학’ 윤노빈 전 부산대 교수 조국통일연구원 책임지도원으로
   
   자진 월북자들의 행적도 확인됐다. 이른바 ‘신생철학’의 주인공 윤노빈 전 부산대 교수는 현재 ‘조국통일연구원 책임지도원’이란 직위를 갖고 평양에 살고 있다. 1982년 싱가포르에서 가족 5명을 대동하고 월북한 그는 ‘통영의 딸’ 신숙자씨의 남편인 오길남 박사와 함께 칠보산연락소에서 방송요원으로 활동했었다. 당시 사용한 가명인 ‘정영호’를 정식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대동강구역 동문2동에 살고 있다.
   
   1967년 프랑스 유학 중 부인과 함께 월북한 정현룡씨는 101연락소 소속인 것으로 확인됐다. 정씨는 서울대 금속공학과 출신으로, 월북 후 칠보산연락소에서 ‘장석규’란 가명을 사용하며 대남 방송 ‘민중의 메아리’ 방송국 부소장을 역임한 바 있다. 경기여고, 이화여대, 영국 옥스퍼드대학 학력을 가진 정씨의 부인 윤향희(한성애)씨는 월북 후 ‘구국의 소리’ 영어 방송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26연락소에 소속돼 있다.
   
   1976년 귀순한 북한 공작원 김용규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유성근씨의 사례를 토대로 남한 선동 전략의 일부를 수정했다고 한다. 대학생들을 무조건 시위 현장에 내몰 것이 아니라 고시 공부를 시켜 남한 핵심부에 침투시킨다는 의도다. 김씨가 당시 증언한 김일성의 발언 내용이다.
   
   “유성근의 경우를 보면 현재 남조선에는 고등고시에 합격하기만 하면 행정부, 사법부에도 얼마든지 파고들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이제부터 검열된 학생들 가운데 머리 좋고 똑똑한 아이들은 데모에 내몰지 말고 고시 준비만 시켜라. 열 명을 준비시켜서 한 명만 합격한다 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다. 그러니까 고시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는 그들이 근심·걱정 없이 고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해 주어야 한다.”
   
   이번에 평양에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 21명의 납북자는 대부분 한국에서 쓰던 이름과 고향을 시민증 등록에 그대로 사용했으며, 모두 북한에서 결혼(또는 재혼)해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중 절대 다수는 대남공작기관의 일종의 ‘조선로동당 ○○○련락소(연락소)’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21명 중 15명이 연락소의 지도원, 사무원, 부원 등의 직위로 근무 중이다. 연락소 외 다른 직장으로는 연구소, 도서관, 대학(학생) 등이 있다. 납북자 21명 가운데 16명은 노동당에 가입한 사실도 확인됐다.
   
   이번 주간조선의 분석 결과는 평양시에 거주하고 있는 전후 납북자 중 신원이 정확하게 일치한 납북자만 확인한 수치이기 때문에, 6·25전쟁 당시 납북자 8만여명과 타지역 거주 납북자를 모두 포함하면 북한 생존 납북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그동안 정부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던 납북자 송환 운동도 다시 활기를 띠게 될 전망이다. 이미일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은 “납북자 생사 확인 요청은 이산가족 상봉 때에만 순번이 돌아오기 때문에 납북자 가족들이 아직 생사 확인 요청조차 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평양 거주 납북자

▲ *이름 옆 괄호 안에 적힌 납북 연도와 납북 당시 신분을 제외한 사항은 주간조선 입수 평양시민 신상자료에 기록된 것을 그대로 옮긴 것임


   주간조선이 지난주 평양시민 신상자료 단독 입수 사실을 보도하면서 평양 연고자를 찾아드리겠다는 기사를 내보낸 후 주간조선에는 평양에 살고 있을지 모르는 가족과 친지를 찾는 문의전화가 쇄도하고 있다. 러시아에 살고 있는 탈북자 등 해외에서도 이메일을 통해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 자신을 “잠적한 몸”이라고 소개하며 러시아에서 여동생을 찾는 이메일 문의를 보내온 한 탈북자는 여동생이 평양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자 “너무 감격해서 눈물이 앞서고 손이 떨려서…”라며 “14년 만의 소식”이라며 감격해했다. 1997년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살고 있는 김모씨는 “우리 가족 생사를 몰라 그리워 미치겠다”며 “(가족이) 저 때문에 자살하지 않았는지…”라며 애타게 가족을 찾았다. 또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에 거주하는 정모씨는 6·25 때 반공포로에서 석방된 후 홀로 월북한 아버지의 생사를 문의했다. 재독 이북5도민회 정원교 중부지역 회장은 주간조선에 이메일을 보내 주간조선에서 평양 연고자 확인 작업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회원들에게 알려 회람시켰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1969년 KAL기 납북 사건
   
   강릉발 김포행 KAL YS-11기 피랍… 승객·승무원 47명 중 11명 귀환 못해
   
   KAL기 납북 사건은 1969년 12월 11일 일어났다. 강릉을 떠나 김포로 향하던 KAL YS-11기가 강원도 대관령 상공에서 북한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해 북으로 납치됐다. 납치된 비행기는 함경남도 원산 근처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비행기엔 기장 및 승무원 4명과 간첩을 포함한 승객 47명이 타고 있었다. 납북 직후 북한은 전원 송환을 약속했으나 이듬해 2월 14일 판문점을 통해 돌아온 인원은 승객 39명뿐이었다. 나머지 북한 측 간첩을 제외한 11명의 피랍자들은 북한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1969년 사건 발생 당시 치안국은 “북괴의 고정간첩이며 강릉에서 자혜병원을 경영하던 승객 채헌덕(당시 38세)이 주범으로, 다른 승객 조창희와 부기장인 최석만을 포섭해 비행기를 납북해 갔다”고 발표했었다. 하지만 그해 12월 15일 조중훈 당시 KAL 사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최석만의 가정과 과거 생활태도로 보아 간첩 행위를 할 만한 결정적 단서가 없다. 경찰의 단순한 추정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1970년 2월 15일 중앙정보부와 치안국은 송환된 피랍자들에 대한 재조사 결과 고정간첩이었던 조창희가 남한에서의 간첩 활동 후 북한의 지령을 받고 비행기가 이륙한 지 약 14분 후에 조종사를 위협해 납북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발표에서 부조종사 최석만이 채헌덕에게 포섭됐다는 전년도의 치안국 발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에 주간조선이 평양 거주를 확인한 KAL YS-11기 피랍자 3명을 제외하고, 확인이 되지 않은 9명의 신원은 다음과 같다. 기장 유병하(남·당시 37세)씨와 승객 김봉주(남·당시 28세)씨, 임철수(남·당시 49세)씨, 장기영(남·당시 41세)씨, 채헌덕(남·당시 35세)씨, 황원(남·당시 32세)씨, 이동기(남·당시 48세)씨, 최정웅(남·당시 30세)씨다. 이 9명은 이번 평양시민 명단에선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명단에 없다고 해서 생사(生死)가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이들이 평양 외 지역에 거주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납치 피해자 황원씨의 아들이자, ‘1969년 KAL납치피해자 가족회’의 대표인 황인철씨는 10월 19일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올 8월에 비공식적 통로를 통해 아버지가 평양 근교에 살아계신다는 말을 들었다”며 “이번 명단을 통해 파악되진 않았지만 아직 희망의 끈을 놓기엔 이르다”고 말했다.

주간조선 2178호(2011. 10. 24) 기사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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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의 역사와 신상자료 입수 의미
“핵심정보 유출은 정권붕괴 임박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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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납북자

▲ 납북자가족모임은 정부를 상대로 납북자 송환을 촉구하는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납북자 문제는 인권 문제입니다. 일본인 납북자 수는 한국에 비하면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수준인데도 저렇게 정성을 들이고 있죠. 온 정부와 국민이 나서서 끝까지 구해내려고 합니다.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자국민 2명(로라 링·유나 리 기자)을 구하기 위해 직접 북한까지 갔잖아요. 이런 두 국가의 태도에서 진정한 선진국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KAL858기 폭파범 김현희씨가 2010년 7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토로한 내용 중 일부다. 현재 일본의 확인된 납북자 수는 19명. 한국은 6·25전쟁 때 8만여명, 휴전 후 500명 이상이 납북됐다. 단 한 사람의 납북자를 송환하기 위해 총리는 물론 주요 고위 인사들이 모두 발벗고 나서는 일본과, 비전향장기수 63명을 북송하고도 납북자 한 명 데려오지 못한 한국의 사례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납북(拉北)의 역사는 1950년 6·25전쟁 때부터 시작됐다. 김일성은 남침 직후 정치인·법률가·공무원·종교인·교사·언론인·의사 등 남한 사회 리더십을 대거 납치했다. 주요 ‘인텔리’의 명단과 소재지를 미리 확보하는 등 치밀하게 준비한 ‘남한 기반 붕괴 작전’이었다. 소설가 이광수, 현상윤 고려대 총장, 국회의원 안재홍,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 철학자 한치진 등 유명인사가 피랍 또는 피살됐다.
   
   전쟁 후에도 북한의 납치 행각은 계속됐다. 해상 납치가 130여회 발생했고 많은 어부가 실종됐다. 북한은 어부 외에도 교사·유학생·조종사·광부·운전기사·군인 등 다양한 직종의 한국인을 납치했다. 해외 12개국에서 확인된 납북자 수도 40여명에 이른다. 목적은 외국의 정보를 얻거나 해외 공작원의 현지화 교육 교관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김현희씨의 일본어 선생은 일본인 납북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였다. 테러 범행 직후 자살에 실패한 김씨는 한국에 온 후 다구치와 요코다 메구미 등 자신이 북한에서 만난 일본인들에 대한 구체적 증언을 내놓았다. 일본 여론은 지속적으로 끓어올랐고 2002년 고이즈미 총리는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 다구치와 메구미를 포함한 13명의 납치 사실을 시인하게 만들었다.
   
   북한은 메구미가 자살했다며 화장한 유골까지 보냈지만 일본은 턱뼈에 남은 치아뿌리를 감식해 가짜임을 입증했다. 한·일 언론의 끈질긴 취재와 과학기술은 메구미의 남편 김철준이 납북 고교생 김영남이란 사실까지 밝혀냈지만 북한은 지금까지도 메구미의 사망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행동은 일본과 전혀 달랐다. 1970년 납북됐다 1998년 겨우 중국으로 탈출한 선원 이재근씨는 한국영사관에 자신의 상황을 호소했지만 “국가에 부담을 주려하지 말고 가족에게 연락해 밀항하라”며 거절당했다. 이씨는 2년간 만주에서 도피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 납북자도 국가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52년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작성한 납치자 명부(8만2959명)를 2001년 언론과 민간단체가 발굴해 공개했다. 명부에 적힌 이름 석 자에 전국의 납북자 가족들은 오열했다. 이미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은 정부에 데이터베이스(DB)화를 요청했지만 예산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 이사장은 사비를 털어 DB 자료를 구축했고 관련법 제정을 위해 국회 문을 두드렸다. ‘6·25전쟁 납북자 명예회복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2003년부터 몇 차례 상정됐지만 계류와 폐지를 반복하다 7년 만에 겨우 통과했다. 어느새 전쟁납북자의 연배는 90~100세를 바라본다.
   
   이 이사장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보상은 무슨… 대통령의 위로 한마디면 가슴이 뻥 뚫릴 텐데. ‘가장을 잃고, 아들을 빼앗기고, 얼마나 힘들었나. 조국은 당신과 가족을 절대 잊지 않겠다’란 말 한마디면 되는데”라고 답했다.
   
   한·일 납북자에 대해 취재해온 뉴욕대 언론학과의 로버트 보인턴(Boynton) 교수는 “미국에선 납북 현실에 대해 이야기해도 다들 ‘픽션(fiction)’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며 “한국은 납북자 문제를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인식한다”고 했다. 그는 “‘납북’ 키워드로 한·일 양국의 단행본을 검색한 결과 일본은 1000여권, 한국은 단 1권이었다”며 “한국에서 납북자에 대한 체계적 연구자료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신기하다”고 했다. 그가 발견한 단 1권의 책은 월간조선이 발행한 ‘6·25 납북자 82959명 명부’였다.
   
   북한 정권은 현대사회에서 보기 드문 나라다. 외국인을 납치하고, 납북자를 결혼시키기 위해 또 다른 사람을 납치한다. ‘지도자’의 판단에 따라 국격, 도덕, 양심을 외면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가장 큰 피해자는 북한 주민과 납치 피해자들이다. 한국은 이런 ‘기형적 정권’을 눈앞에 두고도 ‘종북’과 ‘친북’ 논란이 벌어진다. “자진 입북자는 있어도 납북자는 없다”라는 북한의 주장을 통일부 장관이 그대로 되풀이해 “납북자 중엔 자진 월북자도 있다”라고 발언한다. 납북자 문제를 제기하면 “반통일 세력, 통일의 걸림돌”이라며 비판한다. 남북적십자회담을 하면서 ‘납북자’란 용어도 못 쓰고 ‘전쟁 시기와 그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란 모호한 표현을 쓴다. ‘햇볕’이란 미명 아래 수조원을 퍼붓고도 납북자 단 한 사람을 구해오지 못했다.
   
   납북자 명부를 발굴하고 그들을 탈출시키는 것은 언제나 민간단체와 언론의 몫이었다. 귀환 납북자 8명 중 1명은 스스로 탈북했고 나머지 7명은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가 북한 내 협조자를 통해 구출했다.
   
   주간조선이 이번에 발굴한 평양 주민 자료는 이런 ‘역사적 아이러니’를 깨뜨릴 무기를 품고 있다. 북한이 끝까지 감추고 싶었던 납북의 증거가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주간조선 사무실을 방문해 직접 자료를 본 이미일 납북자가족회 이사장은 “북한의 가장 은밀한 핵심정보가 유출됐다는 것은 북한의 붕괴가 멀지 않았다는 뜻”이라며 “캄캄한 어둠 속에 유폐된 채 60여년을 지내온 납북 가족들을 찾으러 북한에 실사를 가는 날이 오기를 염원했는데 이 자료를 통해 그날이 가까웠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했다.
   
   김광인 북한전략센터 소장은 “전화번호부도 대외비인 나라에서 210만명의 주민등록 자료가 유출됐다는 것은 최고급 비밀이 세계에 퍼졌다는 의미”라며 “북한은 멀게는 60여년 전 남침부터 최근 천안함 폭침까지 부인해온 나라이기 때문에 이 문건의 존재 자체와 내용 모두에 대해서 부인하고 ‘남조선의 조작’이라고 선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은 주간조선에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수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며 “북한 핵심부의 치명적 자료를 입수한 주간조선에 큰 격려를 보낸다”고 했다. 박 의원은 “북한 납북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입증한 공문서인 만큼 정부가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설 때가 됐다”며 “납북자 문제는 이념이 아닌 인권의 문제인 만큼 국회 차원에서도 조기 송환을 위한 결의안을 제출하도록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주간조선 2178호(2011.10.24) 기사 원문 보기

▶ 북한 독침테러 사건의 전모 - 박상학뿐 아니라, 김성민·이민복도 노렸다
▶ 왕재산 간첩단 총책 "출소하면 국가유공자 될 것" 호언장담
▶ 北인권법•역사교과서 방치하고 포퓰리즘에 동참한 한나라당
▶ 로버트 박 월간조선 기고문 - 북한, 인권 위기를 넘어서
▶ “엄마 옛날 이름이 김현희였어?” - 김현희씨의 12년 만의 서울 나들이
▶ 김현희를 가짜로 모는 사람들 - ‘김현희의 편지’ 공개 후 ‘남북한 정부 공동조사’ 주장하기 시작
▶ 6·25 납북희생자 기억의 날 "그들이 대한민국을 함께 세웠습니다"
▶ “김정은 특별지시로 납북자들 평원으로 비밀이송… 다구치는 위독”
▶ 김현희 “北 공작원 되자 담뱃재로 얼굴 점까지 빼버렸다”
▶ 이명박 정부 납북자委에 ‘재취업’한 노무현 정부 과거사委 조사관들
▶ 北 정치범 수용소 전시회 연 한동대 북한인권학회 <세이지>
▶ 로버트 박 "김정일 정권… 죽여 주세요!"
▶ 北 사이버 공격시 15분 만에 주요시설 초토화
▶ 최대 규모 對北 逆공작 ‘Z작전’의 전모 - 통혁당 간부 구출 시도한 北 간첩선 검거는 한국 中情의 逆공작이었다
▶ 김현희 “일부에서 23년째 가짜라는 나는 ‘살아 있는 프로펠러’다”
▶ 탈북자에겐 너무 먼 유엔의 고위관료
▶ 7년 만에 6·25 납북 피해자법 통과시킨 李美一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 [對北 선교작전 秘話] 북한 지하교회의 代父 이삭 목사 (모퉁이돌선교회 대표)
▶ [현지취재] 북한 지하교회 지도자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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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추적] 북한 독침테러 사건의 전모
박상학뿐 아니라, 김성민·이민복도 노렸다

⊙ 탈북자 단체 간부로 활동하며 10년여 위장… 정찰총국 지령 수령 후 “배신자에 대한 강력한 경고”
⊙ 공작금 1277만원 받아 대포폰과 베트남 도피 항공권 등 구입… 범행 전 시체유기 장소 답사까지 마쳐
⊙ 감시망 피하기 위해 수ㆍ발신 흔적 없이 ‘임시우편함’에 메시지 남기는 ‘사이버 드보크’ 기술 활용
⊙ 국정원 수사관, 맨주먹으로 차창유리 깨부수고 범인 체포한 사연
⊙ “김정일은 내게 ‘악마의 독침’을 날리려다 실패했지만, 나는 김정일을 향한 ‘진실의 독침’(대북전단)을
오늘도 날린다”(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북한 독침

탈북자 박상학씨 테러시도에 사용된 북한 독침.



지난 9월 3일 오후 4시10분. 탈북자 안모(54)씨가 서울 강남 한 일식집에 들어섰다. 평범한 옷차림에 작은 서류가방을 든 이 40대 남자를 종업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예약된 자리에 앉은 그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불안한 기색을 완전히 감출 순 없었다. 양복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든 만년필형(型) 단발 독총, 왼쪽 주머니에 든 독약, 서류가방에 든 손전등형 독총이 계속 신경 쓰였다.
 
  몽골에서 이미 수차례 독침과 독총의 사용법을 익힌 터, 안씨는 ‘목표물’만 도착하면 즉시 암살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이날 안씨와 만남을 약속한 인물은 탈북자 박상학(朴相學ㆍ43)씨로, 대북전단(삐라)을 주기적으로 북한에 날리는 등 반(反) 김정일(金正日) 통일운동을 활발히 펼쳐온 대북운동가다.
 
  잠시 후, 안씨는 ‘뭔가 이상하다’란 느낌이 들었다. 암살 타깃인 박씨는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 식당 내부를 살피던 그는 이내 식당 출입구로 이동해 나갈 듯 말 듯 망설이다가, 계산대에 서 있던 종업원에게 자신의 차 열쇠를 달라고 했다. 열쇠를 건네받은 그는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차에 밀어넣었다.
 
  순간 한 건장한 남자가 그를 덮쳤다. 안씨는 황급히 차에 올라타 문을 잠갔다. 시동이 걸린 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때 다른 남자가 차 앞을 몸으로 가로막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안씨는 우물쭈물했다. 이때 차 옆에 있던 남자가 운전석 창문을 맨주먹으로 깨부쉈다. 유리창은 산산조각났고, 안씨는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남자들은 범인의 자살을 막기 위해 독총과 독침 등 증거품부터 압수했다.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이 테러범 현장 체포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2주간 3차례 독침 공격
 
  북한의 ‘독침테러’가 다시 시작됐다. 1996년 10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덕근(崔德根) 영사가 북한 간첩으로 추정되는 괴한의 독침에 피살된 후 15년간 뜸했던 독침 공격이 지난 8월부터 2주 동안 총 세 차례 서울과 중국 동북 3성 일대에서 잇달아 발생했다. 지난 8월 21일 중국 단둥(丹東) 시내 한 백화점 앞에서 대북(對北)선교사 패트릭 김(46) 목사가 택시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병원으로 호송됐으나 숨졌다.
 
  김 목사가 평소 탈북자를 돕고 김정일 비판 문건과 성경 등을 북한에 밀반입한 활동 정황과, 사망 전 북한이 직간접적으로 대북선교사들에게 “반드시 응징하겠다”고 위협한 사실을 볼 때, 북한 간첩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중앙일보》는 재중(在中) 대북 소식통을 인용해 “정찰총국이 사건의 배후이며, 고도로 훈련된 정보요원이 사전에 공격 대상자를 선별했다”고 보도했다.
 
  김 목사 사망 다음 날인 22일 옌지(延吉)의 한 주차장에선 대북 선교 활동을 하던 한국인 강모(58) 목사가 차에 타려다 괴한의 주사기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강 목사는 병원으로 긴급 호송돼 목숨을 구했다. 북ㆍ중 접경의 동서 양끝에서 하루 시차를 두고 ‘독침 공격’이 자행된 셈이다.
 
  1996년 옌지에서 발생한 기아자동차 기술훈련원 박병현(朴炳鉉ㆍ당시 54세) 원장 피살 사건도 북한 소행으로 추정되며, 1982년 망명해 김정일의 사생활을 폭로한 김정일 전처(성혜림)의 조카인 이한영(李韓永)씨도 1997년 북한의 남파 공작원에 의해 살해됐다.
 
  과거 박정희(朴正熙)ㆍ전두환(全斗煥) 대통령 등 한국 최고위급 인사를 겨눴던 북한의 테러 목표가 최근 탈북자 단체 간부, 북한인권운동가, 대북선교사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이 김정일 체제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사례다.
 
  이번 독침테러 사건의 타깃이 된 박상학씨는 대남(對南)공작부서 ‘35호실’에서 고위급 공작원으로 활동하다 1999년 일본으로 탈출한 박건길(朴健吉·70)씨의 아들로, 2004년부터 김정일의 악행과 가계도를 폭로하는 대북전단을 휴전선 인근에서 대량 살포해 왔다. 북한은 끊임없이 정부에 이를 중단시키라고 협박했고, 남한 좌파단체들은 전단 살포 저지를 위해 현장에서 박씨와 몸싸움을 벌였다.
 
 
 
“공화국에 못되게 논다. 손봐줘야”
 
  정보당국과 박상학씨에 따르면, 간첩 안씨는 지난 2월경부터 박씨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박씨는 “안씨가 탈북자 단체의 간부라 서로 알고 지냈는데, 2005~06년경 행적을 감췄다 다시 연락이 온 것”이라며 “탈북자로 위장한 간첩이 10년 정도 내부적응 기간을 거친 후 활동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안씨가 1995년 탈북한 사실을 볼 때 시기상 일리가 있다”고 했다.
 
  탈북 후 국내 탈북자 단체의 사무국장을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온 안씨는 2005년경 활동이 뜸해진 후 사업에 나섰다. 그는 2010년 3월부터 몽골을 왕래하며 북한 평안북도 의주의 ‘황치령 샘물’ 개발 합작사업 등 남북경협을 추진한다는 이유로 북한 측 인사와 자주 접촉했다.
 
  같은 해 7월, 안씨는 울란바토르 시내의 한 커피숍에서 북한 정찰총국 소속 간첩 C를 만났다. C는 안씨에게 “대북사업을 도와주겠다”며 “서로 믿기 위해 필요한 ‘자서전’을 제출하라”고 했고, 안씨는 ▲출생 ▲성장과정 ▲탈북경위 ▲남한정착생활 등의 내용이 담긴 5장 분량의 문서를 작성해 주고 귀국했다.
 
  2달 후 C를 만나기 위해 몽골로 출국한 안씨는 C의 소개로 그의 상관인 간첩 K를 만났다. C와 함께 정찰총국 소속인 K는 북한대사관에 안씨를 수차례 불러 사업 논의를 진행해 왔다.
 
  올해 3월 31일 몽골로 출국한 안씨는 울란바토르 시내 프랑스 레스토랑, 커피숍, 북한대사관 등에서 세 차례 K와 만났다. 이때 K는 1997년 황장엽(黃長燁ㆍ작년 10월 사망) 전(前) 노동당 비서와 함께 망명한 김덕홍(金德弘) 전 여광무역 대표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안씨에게 내렸다. 안씨가 북한 항공육전대 출신으로 20여 년간 군 복무했다는 사실을 파악한 K는 “김덕홍 암살에 성공하면 북한 내(內) 통제구역에서 생활하는 가족들을 평양으로 옮겨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사업에도 도움을 주겠다”며 안씨를 회유했다. 이때 K는 박상학씨에 대해 “공화국(북한)에 못되게 놀고 있다. 손봐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 독총, 독침, 독약 제원
 
 
  ■ 파커 만년필형(단발형) 독총
  ⊙ 크기: 130㎜×10㎜ 무게: 57g
  ⊙ 작동방법: 뚜껑을 오른쪽으로 5번 돌리고 뚜껑을 밀면 발사
  ⊙ 독약성분: 브롬화네오스티그민(호흡정지, 심장마비로 사망)
 
 
  ■ 손전등형(3발형) 독총
  ⊙ 크기: 165㎜×37㎜ 무게: 263g
  ⊙ 작동방법: 안전장치를 빼고 발사버튼을 누르면 1발 발사, 다시 한 번 누르면 장전, 다시 누르면 발사
  ⊙ 독약성분: 브롬화네오스티그민
 
 
 
  ■ 파커 볼펜형 독침
  ⊙ 크기: 132㎜×10㎜ 무게: 35g
  ⊙ 작동방법: 뚜껑을 오른쪽으로 5번 돌리고 뚜껑을 밀면서 찌름
  ⊙ 독약성분: 브롬화네오스티그민
 
 
  ■ 독약 캡슐
  ⊙ 독약성분: 모노플로르초산나트륨(최장 5일 내 폐부종 또는 폐렴으로 사망)
 
  사용법 익히려 수차례 실습
 
  당시 K는 북한대사관 직원에게 노트북을 가져오라 해 미리 저장해 놓은 동영상을 안씨에게 보여줬다. 내용은 북한에 있는 안씨의 아버지 산소를 촬영한 것이었다. K는 “(당신) 어머니는 잘 계신다. 죽기 전에 아들을 꼭 만나보고 싶어 한다”며 가족의 근황을 알려주고, 이를 빌미로 “반드시 (암살) 임무를 완수하라”고 압박했다.
 
  4월 3일, 독침과 독총 등 암살도구가 제공됐다. K는 북한대사관에서 안씨를 만나 “우리가 여러 가지 장비를 가지고 왔다. 한번 보라”며 독총 2정(만년필형ㆍ손전등형 각 1정), 독침(볼펜형) 1개, 독약 캡슐 3개 등을 꺼내 보여줬다. K는 볼펜형 독침을 안씨 눈앞에 들이대고 “이 뚜껑을 잡고 오른쪽으로 다섯 바퀴 돌려 누르면 침이 나온다. 이를 찌르기만 하면 된다. 단발형 독총도 똑같이 뚜껑을 오른쪽으로 다섯 바퀴 돌리면 장전이 되고, 뚜껑을 밀거나 당기면 발사된다”며 사용법을 알려줬다.
 
  또 손전등형 독총을 들고선 “검은색 마개를 떼어내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1발 발사 후 버튼을 다시 누르면 장전이 되고, 다시 누르면 또 발사가 된다. 이런 식으로 세 발까지 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무기 시연도 그 자리에서 이뤄졌다. K는 손전등형 독총을 손에 든 채 “이걸로 실습을 해보자. 내가 시범을 보이겠다”며 손전등을 비추듯 손을 앞으로 뻗었다. 4~5m 앞엔 미리 준비해 놓은 합판이 놓여 있었다. K가 버튼을 누르는 순간 ‘핑’ 소리와 함께 약한 화약 냄새가 났다. 발사된 탄환은 합판을 관통했다.
 
  K는 “이건 연습용이라 독도 없고 그냥 발사만 되니 실제로 한 번 쏴보라”며 총을 안씨에게 건넸다. 안씨는 사격 직후 ‘위력이 상당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독총 사격 연습을 마친 후, K는 암살에 필요한 폭탄 제조법도...
 
(계속)

기사 全文 보기 : 월간조선 2011년 11월호(바로가기)

▶ 왕재산 간첩단 총책 "출소하면 국가유공자 될 것" 호언장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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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희 “北 공작원 되자 담뱃재로 얼굴 점까지 빼버렸다”
▶ 검찰, 북한의 해킹 수법 실수로 퍼뜨렸다
▶ 北 정치범 수용소 전시회 연 한동대 북한인권학회 <세이지>
▶ 로버트 박 "김정일 정권… 죽여 주세요!"
▶ 北 사이버 공격시 15분 만에 주요시설 초토화
▶ 北 기습 도발을 응징했던 朴定仁 장군 “신라가 대화로 삼국통일 했나”
▶ 인터뷰/ ‘연평도 北傀도발 갤러리’ 개설한 디시인사이드 김유식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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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추적] 北 225국 지령 ‘왕재산 간첩단’ 사건 조사 뒷이야기

⊙ 민변 변호 후 태도 바꿔 조사ㆍ참관 거부, 인권委 제소, 묵비권 행사 등 조사불응
⊙ 수사관에겐 “검찰에 가면 한마디도 안 할 자신 있다”, 면회 온 가족에겐 “별것 아니니 내년쯤 나갈 것”
⊙ 인천지역책 임모씨, 아버지는 6ㆍ25 참전 상이용사, 아들은 간첩 혐의 구속
⊙ 민혁당 사건 후 12년 만에 적발한 20년 장기 암약 지하당 反국가단체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왕재산

지난 8월 25일 서울중앙지검 이진한 공안1부장이 간첩단 ‘왕재산’ 사건에 대한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 225국의 지령을 받고 지하당 왕재산을 구축해 간첩행위를 한 혐의로 구속된 총책 김모(48)씨 등 관련자 5명이 조사에 참관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하는 등 수사에 제대로 응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총책 김씨는 수사관에게 “출소하면 국가보훈 유공자가 될 것이다” “판사가 우리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 같다”고 호언(豪言)하는 등 의기양양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한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김씨는 면회 온 가족에게 “별것 아니니까 내년쯤 나가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묵비가 힘들지 않으냐”는 수사관의 질문엔 “여기 구속돼 보니, 몸은 여기 있어도 정신은 좋은 데 가서 놀 수 있다”며 “검찰에 가면 정말 한마디도 안 할 자신이 있다”고 답했다.
 
  다른 한 피의자는 조사 중 수사관이 성명과 주소 등 인적사항을 묻자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며 변호인과 함께 눈을 감고 잠자는 자세를 취했다.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수사관의 말에 “피의자가 수사관 신문에 응해야 한다는 법 조항이 어디 있느냐”며 따졌다.
 
  일부 피의자들은 “조사실에 나가서 조사받기 싫다. 구치소에서 나가지 않겠다”며 버텼고, 교도관이 강제로 신병을 이송하려 하자 “문제 삼겠다”며 교도관에게 ‘경고’했다. 또 조사실에선 “수사관과 함께 있는 관계로 휴식을 취할 시간이 없어 인권침해를 당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수사관을 제소했다.
 
 
 
민변 변호인 만난 후 태도 돌변
 
  ‘왕재산 사건’은 주사파 운동권 출신 등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지하당을 구축해 약 20년 동안 간첩 활동을 해오다 적발된 사건으로, 1994년 구국전위(救國前衛) 사건과 1999년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 이후 12년 만에 발각된 반(反)국가단체 사건이다.
 
  검찰은 ▲총책 김씨와 인천지역책 임모(46)씨가 간첩활동을 하면서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보상받은 점 ▲서울지역책 이모(48)씨가 국회의장 비서관 근무와 공천 신청 등 정치권 깊숙이 침투한 점 ▲인천 지역에 유사시 무장봉기 등 극도의 혼란을 조성해 혁명의 교두보로 활용하려 한 사실 등을 근거로 남한 사회가 당면한 심각한 안보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왕재산 조직원들은 사건 초기 자신의 주거지와 사무실 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집행되자 순순히 수색에 응했다. 수사관이 압수한 물건에 대해 확인을 요구할 때도 별 저항 없이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다.
 
  총책 김씨는 자신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영장이 나올 줄 알았다”며 담담하고 여유 있는 반응을 보였다. 구속 후엔 “모든 것을 정리할 생각”이라며 수사에 협조할 뜻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되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등 변호인의 조력을 받게 된 후 이들은 묵비권을 내세우며 신문에 대한 답변을 거부하는 등 태도와 입장을 바꿨다. 스스로 서명하고 확인했던 압수 자료에 대해서도 개봉 시 내용확인을 위한 참관 요구를 거부했다. 디지털 증거의 사본 복제를 위한 현장 참관 때도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는 등의 방법으로 불응했다.
 
  공안당국은 수사 절차상 흠을 잡으려는 의도라고 판단해 관련 사항을 모두 비디오로 촬영하고, 외부의 디지털 포렌식(forensicsㆍ증거 수집 및 분석) 전문가를 조사실에 초빙해 증거물 복제 및 분석을 진행했다.
 
  1980년대 주체사상 교범인 ‘강철서신’의 주인공 김영환(金永煥)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총책 김씨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7월 초 국정원으로부터 묵비권을 행사하는 김씨를 만나 설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김씨가 입을 열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에 거절했다”면서 “내가 민혁당에 있을 때 직접 보안교육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그가 묵비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父는 상이용사, 子는 간첩 혐의
 
  일부 좌파 매체는 최근 “사건 수사 중 공안당국이 피의자에게 가혹행위를 하고 방어권을 침해했다는 논란이 있다”며 국정원 청사 출입 당시 변호사 가방 추가 검색과 관련한 승강이를 소개하는 등 인권침해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공안당국은 이에 대해 “국정원은 국가보안목표 가급 시설로 외부인 출입 시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는 것이 규정인데, 변호인들은 ‘검색대 통과 요구는 변호인의 조력권 침해’라고 주장한다”며 “검찰청, 법원을 출입할 때는 검색대를 통과하면서 굳이 국정원에서만 통과를 거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변호인들은 구속된 피의자 접견 등 자신들이 필요한 시점엔 검색대 통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가 불구속 피의자나 참고인과 동행할 땐 ‘절대로 검색대를 통과할 수 없다’고 버티는 이중적 행태를 보였다”며 “변호인들은 현재 이 문제로 법원에 준항고(準抗告)를 제기한 상태”라고 밝혔다.
 
  인천지역책 임씨의 경우 아버지가 6ㆍ25전쟁에 참전한 상이용사임이 밝혀졌다. 아버지는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총탄을 맞고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어 국가보훈대상자로 지정되고, 아들은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아 간첩행위를 한 혐의로 구속된 특이한 경우다.
 
  총책 김씨는 구속 당시 담담한 태도로 응했지만, 한 피의자는 구속영장 발부 사실이 알려지자 “에이 ××”이라며 의자를 발로 걷어찼고, 나머지 피의자들은 총책 김씨가 다량의 증거를 갖고 있었던 사실을 알고 김씨를 크게 원망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왕재산 조직원들의 치밀한 해외 접선 방식도 새롭게 드러났다. 조직원들은 매년 김정일(金正日) 생일과 노동당 창당일 등 주요 시기마다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 등 접선장소를 수시로 바꿔가며 총 34차례 북한 225국 공작조와 접선해 활동 경과를 보고하고 지령을 받았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이들은 해외로 출국하기 전 공항 대합실을 배회하며 미행 감시 여부를 확인하는 등 ‘교범’대로 행동했다. 조직원 2명이 접선 목적으로 공항을 이용할 땐 도착 후 재빠르게 입국 심사대로 이동해 각각 다른 심사대에서 심사를 받고 통과했다. 그리고 곧바로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면서 주위를 세밀히 살펴본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택시 승강장으로 이동했다. 택시 이용도 먼저 한 명이 타고, 나머지 한 명은 후방 미행 여부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한동안 대기한 후 승차했다고 한다.
 
 
  김씨,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남조선 혁명 교시받아
 
  접선장소도 신중을 기했다. 북한 측 공작 상부선은 항상 미리 다음 접선장소를 물색해 놓은 다음 접선 때 대상자에게 차후 접선장소를 알렸다. 접선 시점 약 1개월 전에 암호통신을 통해 접선장소를 하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국에 따르면, 이들은 호텔에 도착하면 체크인 후 곧바로 호텔 주위를 정찰했다. 이후 다시 호텔에서 대기하다가, 약속한 접선시각 수십 분 전 밖으로 나와 호텔 근처 유동인구가 많은 백화점에 들어가 반대편 문을 이용, 북한 측 상부선이 미리 탑승해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합승해 접선장소로 이동했다.
 
  접선장소 도착 순서는 항상 북한 측 상부선이 먼저였다. 국내 조직원은 연락 공작원의 안내를 받아 접선장소에 도착하며, 접선이 끝나면 국내 조직원이 먼저 현장을 떠나고 20~30분 지난 후 상부선이 떠났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지난 8월 25일 “왕재산은 북한의 ‘남조선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간첩활동을 해온 전형적인 반(反)국가단체”라며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과 공안당국의 자료에 따르면, 1980년대 대학생 시절 주사파로 활동했던 총책 김씨는 1990년대 초 북한 225국(당시 사회문화부)에 포섭돼 북한으로부터 ‘관덕봉’이란 대호명(對號名)을 부여받았다. 대호명은 간첩이 보안유지를 위해 이름 대신 쓰는 명칭으로, 북한은 일정한 절차와 형식을 거쳐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고정간첩에게 공작임무와 함께 이를 수여한다.
 
  김씨는 1993년 8월 26일 김일성(金日成)을 만나 “남조선 혁명을 위한 지역 지도부를 구축하라”는 접견교시와 “김 부자(父子)의 혁명사상과 위대성을 보급ㆍ선전하고 합법적인 무역 공간을 통해 조국과 연계연락을 실현하라”는 등 ‘5대 과업’을 받았다.
 
 
  “장군님이 하라는 대로”
 
‘왕재산’ 간첩단이 스테가노그래피 기법으로 은닉한 지령문(왼쪽)을 평문으로 추출한 내용(오른쪽). (서울중앙지검 제공)
  2001년 3월, 김씨는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유적지’로 선전하는 함경북도 온성의 산(山) 이름을 따 ‘왕재산’이란 지하당을 결성하고, 같은 해 11월 북한체제 선전 목적의 벤처기업 ‘코리아콘텐츠랩’과 2002년 6월 합법적 간첩활동을 위한 위장기업 ‘지원넷’을 설립해 활동 토대를 구축했다. 김씨의 대북 보고문과 USB 메모리 암호는 김일성 접견날짜인 1993년 8월 26일을 상징하는 ‘93826’과 ‘a93826z’ 등으로 정했다.
 
  공안당국은 왕재산 조직원들이 조선노동당 강령과 규약에 따라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삼고 “김정일의 영도 아래 남조선혁명을 수행”하는 ‘조선노동당의 지역당’, ‘남한 혁명의 현지참모부’, ‘수령 결사옹위의 전위대’로 활동했다고 밝혔다. 북한 225국은 왕재산 조직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통해 사상무장을 강조했다.
 
  “중요한 문제는 모든 지도부 성원들이 그 어떤 정세변화 속에서도 장군님께서 하라는 대로만 하겠다는 혁명적 신념을 지니는 것이다.”
 
  총책 김씨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 등 북한 5대 명절 때마다 충성맹세문을 작성해 북한에 전달해 왔다. 지난해 3월 천안함 폭침 사건이 터지자 “전쟁이 일어나면 김정일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총폭탄’이 되겠다”며 충성을 강조했다.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엔 “반공화국 책동을 벌이려던 적들의 책동은 공화국의 무진 막강한 혁명무력 앞에 무산됐다”며 “김정일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 중앙위를 목숨으로 사수하고, 후계자님을 받들어 혁명승리를 위한 총폭단이 되겠다”는 등 충성맹세를 이어나갔다.
 
  충성맹세문과 함께 ‘정성품’도 상납했다. 정성품은 “김일성 부자에게 정성과 성의를 다해 바치는 선물(뇌물)”을 뜻한다. 2005년 8월, ‘조선노동당 창건 60돌 기념’으로 매화 문양이 담긴 매화석을 보내며 “1만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의미로 수석을 정했고, 추운 겨울에도 변치 않는 매화의 의미를 담았다”고 했다.
 
  북한은 2005년 이들의 성과와 충성심을 인정해 총책 김씨, 인천지역책 임씨, 서울지역책 이씨, 연락책 이씨에게 노력훈장을 수여했다. 연락책 이씨는 국기훈장 2급도 받았다.
 
  왕재산은 기존 간첩단이 북한에 활동자금을 의존한 것과 달리, 기업을 직접 설립해 활동자금을 마련했다. 총책 김씨가 연락책 이씨와 2002년 6월 세운 ‘지원넷’은 북한 225국으로부터 핵심기술을 지원받아 ‘주차장용 차량번호 인식시스템’ 등 상용프로그램을 개발ㆍ판매해 약 22억원의 연 매출(2009년)을 올렸다.
 
  인터넷과 이메일을 통한 고도의 첩보통신 수법도 기존 간첩단과 달라진 행태다. 북한 공작조직이 개발한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 기법을 이용해 비밀 메시지를 신문기사 등 파일에 은닉했다. 존재까지 숨겨진 암호 내용을 보려면 복호화 프로그램을 이용해 평문으로 바꿔야 한다.
 
  공안당국은 왕재산이 선거 개입 등 정치권에도 직접 침투했다고 밝혔다. 북한 225국은 각종 선거 때마다 왕재산에 지령을 하달해 “진보세력과 개혁 민주세력의 역량 확대”와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 대통합정당 구성” 등을 지시했다.
 
 
  민주당 공천받기 위한 노력도
 
  조직원이 직접 국회의원 출마도 시도했다. 2002년 3월 총책 김씨는 “여야 상층인사 2~3명을 담당하여 교양전취하고, 김정일을 따라 조국통일에 나서도록 하라”는 225국의 지령을 받자, 16대 대선 당시 모 후보 진영에서 활동했던 서울지역책 이씨(관상봉)가 적임자라고 판단해 이듬해 7월 이씨의 활동경력 등이 담겨 있는 대북보고문을 통해 ‘본부(북한)의 승인’을 요청했다.
 
  2004년 4월 북한 225국이 이를 승인, “연구소 설립을 비롯한 정치활동 거처를 빠른 시일 내 마련하라”는 구체적인 지령을 내렸다. 이씨는 과거 평민당 재야입당파 모임인 ‘평화민주통일연구회’ 소속 국회의원 및 회원 10여 명과 정치적 연대를 긴밀히 유지하면서, 당시 대권주자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씨는 2006년 6월부터 2008년 2월까지 임채정(林采正) 당시 국회의장의 정무비서관(3급)으로 근무했다. 임 전(前) 국회의장은 이에 대해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씨는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며 “국회의장 비서관이 국가 중요 정보에 선이 닿았으면 얼마나 닿았겠느냐. (공안당국과 언론이) 나와 연관지어 사건을 증폭시키려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씨는 다른 캠프로 옮겨 대선 활동을 했지만, 해당 후보가 경선에서 패배하자 자신이 직접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2008년 2월 제18대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민주당 남양주을(乙) 지역구에 공천을 신청했지만, 탈락했다. 북한 225국은 이씨의 공천 탈락 후 정치권 활동이 소강 국면에 접어들자 지난 1월 말 총책 김씨와 서울지역책 이씨를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불러 활동을 독려했다.
 
 
  北 학술지 DB 구축해 ‘합법’ 배포
 
  왕재산은 정부로부터 북한 매체 등 특수간행물 취급인가를 받아 북한 매체 내용을 배포하는 등 ‘합법적 북한 선전’을 시도했다. 총책 김씨는 2001년 자신의 대학 운동권 후배인 유모(선전책)씨를 포섭해 전자책 출판 전문 벤처기업 ‘코리아콘텐츠랩’ 설립 임무를 부여했다.
 
  코리아콘텐츠랩은 “김정은 대장동지의 권위를 옹호고수하기 위한 위대성 도서를 출판보급하고 CD로 복사해 인천지역당 조직성원들과 10여 개 진보적 언론단체들에 보급하라” “출판선전거점은 수사기관의 가장 우선적인 색출대상이므로 조직보위를 위해 조직(지하당)과 관계를 맺지 말고 핵심만 내세워 운영하라”는 등 북한의 지령에 따라 선전거점으로 활용됐다.
 
  코리아콘텐츠랩은 남한의 《민족21》 및 북한의 조선출판물수출입사와 함께 북한학술지 통합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북한의 각종 학술자료를 배포하기도 했다. 해당 홈페이지에 따르면, 코리아콘텐츠랩은 개발 및 판매, 《민족21》은 남북 간의 법적 절차에 따른 접촉과 실무, 조선출판물수출입사는 선정한 콘텐츠의 수집 및 진행에 필요한 내부 협의를 각각 주관한다. 코리아콘텐츠랩은 “모든 절차는 통일부 등 남북 관계기관의 지도와 승인을 받아 진행한다”고 밝혔다.
 
  왕재산은 친북좌파가 주도하는 각종 집회와 시위에도 적극 참가해 투쟁을 벌였다. 이들이 참여한 시위는 국가보안법 폐지 촛불집회 및 총궐기 대회, 광화문 총파업 결의대회, 인천 문학산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저지,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 부산 APEC 반대 투쟁, 한미 FTA 저지 투쟁, 을지포커스 반대 투쟁 등이다.
 
 
  北 “터무니없는 모략 사기극”
 
  검찰과 공안당국은 이번 수사에서 모두 1673건의 문건을 확보했고, 이 중 북한으로부터 받은 지령문은 28건, 대북 보고문은 82건, 통신문건은 230건이라고 밝혔다. “혐의를 입증할 증거물이 많아 보강수사를 통해 공소 유지엔 문제없다”고 자신했다.
 
  한편, 폭로 전문 웹사이트인 위키리크스(Wikileaks)는 최근 2006년 10월 운동권 출신의 간첩단 사건인 ‘일심회’ 사건을 수사하다 도중에 사퇴한 김승규(金昇圭) 국정원장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으로부터 사퇴 요구를 받았다는 미국 외교 전문을 공개했다.
 
  김 전 원장의 지인과 전직 국정원 관계자들은 외교 전문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했고, 김 전 원장도 “사의 표명이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며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만약 전문 내용이 사실이라면, 간첩단을 수사한다는 이유로 정권이 국정원장을 쫓아낸 셈이다.
 
  사태가 붉어진 2006년 당시에도 왕재산 조직원들은 활발한 간첩 활동을 하고 있었다. 총책 김씨와 인천지역책 임씨는 불법폭력시위를 주도하거나 주사파 학생운동 조직에서 활동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구성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를 통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돼 각각 420만원과 14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북한은 수사결과 발표가 나오기도 전에 ‘공식적인 선동’을 시작했다. 북한 대남(對南)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지난 8월 4일 왕재산 사건에 대해 “파쇼 공안당국이 떠드는 터무니없는 모략사기극”이라며 “충격적인 사건으로 대내외 정책의 총파산과 북남관계 파탄으로 인한 대중의 반정부 민심을 흐트러뜨리고 진보세력들의 활동을 용공, 친북으로 몰아 위기를 모면하고 보수세력의 재집권을 실현해 보려는 목적”이라고 비난했다.
 
  북한의 이 ‘공개 선전ㆍ선동’을 누가 따르게 될까. 제2 또는 제3의 ‘왕재산’들은 최근 재판과 여론 추이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만약 왕재산이 공작에 성공해 유력 기업을 세우고 국회의원 등 정치권에 입성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념의 시대는 갔다”고 외치며 종북(從北) 발언과 행동을 일삼는 일부 정치인을 보면 그저 가정으로만 끝날 말이 아니다. 지금은 대한민국 재판정에서도 “김정일 장군 만세”를 외치는 시대다.⊙

월간조선 2011년 10월호 -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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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보수의 정체성 위기를 논하다 ⓒ김정우.



보수의 정체성 위기를 논하다
"北인권법•역사교과서 방치하고 포퓰리즘에 동참한 한나라당"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중국집에서 스파게티를 파는 꼴."

지난 22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보수의 정체성 위기를 논하다" 토론회에서 보수의 정체성에 대한 강도 높은 우려와 비판이 제기됐다.

지지율에 목멘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해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는 "21세기 한국사회는 '무상'과 '반값'으로 특정한 보편적 공공복지 담론이 왕성한 가운데 보수정치인들은 쩔쩔매고 있다"며 "포퓰리즘으로 가는 순간 보수세력은 정체성도 잃고 선거승리도 잃을 것"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을 보면 어린이 구박, 어른 공경, 동물 학대 등 주위 사람의 비판에 결국 나귀를 어깨에 멘 부자(父子)의 우화가 떠오른다"고 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나라당이 소득세와 법인세 추가감세를 철회한 2011년 6월 16일은 '보수의 가치'가 허물어진 날로 기억될 것"이라며 "취임사란 첫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이명박 정권은 현재 보수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조 교수는 "보수 DNA 자체가 없는 한나라당은 재보선 패배를 통해 본 모습을 '커밍아웃' 했다"며 공기업 민영화, 출자규제 폐지, 금산분리 완화, 반 시장적 SSM(기업형 슈퍼마켓) 규제 등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분석•비판했다.

학계의 비판에 대해 유승민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기초생활보장을 받는 노인이 10만원 더 벌기 위해 몸싸움하며 폐지 수집하는 장면이 떠오른다"며 "자활, 자립, 자율 등 자유만이 보수의 진정한, 유일한 가치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이혜훈 의원은 "감세는 보수정권의 목표가 아닌 수단"이라며 "감세정책 후 10대기업이 254조원 잉여금을 쌓아두는 등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이날 토론회엔 이성호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 설동근 교육과학기술부 제1차관, 이재교 시대정신 상임이사, 박홍순 전 열린사회시민연합 대표 등이 참여했다.

◎ iPhone 으로 작성, 촬영, 송고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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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장과 로버트 박의 대화
“헌법상 在中 탈북자는 한국민… 외교적 보호해야”

⊙ 겨울옷 입은 채 거처 없이 떠돌며 북한 실태 고발… 1년 반 동안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
⊙ “우리는 집단학살 협약에 따라 사상 최악의 인권유린을 즉시 중단시켜야 할 역사적 책임이 있다” (로버트 박)
⊙ “북한 인권침해 사례 수집 中… 국제사회 공조 통해 전 세계에 알릴 것” (김태훈 북한인권특별위원회 위원장)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2009년 성탄절, ‘북한 동포의 자유와 생명’을 외치며 자진 입북해 43일 동안 억류됐던 로버트 박. ⓒ 서경리

그는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했다. 어렵다고 하자, 북한 인권에 대한 총책임자가 누구냐고 되물었다. 총리나 장관 등이 있지만, 구조상 국가인권위원회가 적합하다고 답했다. 그는 인권위원장을 만나야겠다고 했다.
 
  지난 7월 초, 로버트 박과의 갑작스런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지난해 12월 인터뷰를 했지만, 전화로 대화한 건 처음이었다. 2009년 성탄절, ‘북한 동포의 자유와 생명’을 외치며 자진 입북(入北)해 43일 동안 억류됐던 그는 지금도 고문에 의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박 씨는 연락할 대상으로 기자를 택한 이유에 대해 “지난번 인터뷰 기사(《월간조선》 2011년 2월호 “김정일 정권… 죽여 주세요!”)를 읽은 가족과 지인이 추천했다”고 설명했다. 정작 그는 아직 그 기사를 읽지 못했다. 북한에 억류됐던 당시 기억이 되살아날까 두려워서였다고 한다.
 
 
 
“나 도울 돈, 탈북자 위해 써달라”
 
  그는 면담 요청과 함께 자신의 기고문을 보냈다. “북한, 인권 위기를 넘어서”란 제목의 그의 글은 북한 해방을 위해 한국과 국제사회가 행동을 즉각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요청에 따라 기고문을 한 일간지에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박 씨는 《월간조선》에 글을 꼭 실어달라고 요청했다.
 
  앞서 지난 4월 21일, 《워싱턴포스트》는 “북한의 집단학살을 언제 멈추게 할 것인가”란 제목으로 박 씨의 기고문을 처음으로 게재했다. 박 씨는 글을 통해 “전 세계가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반(反) 독재 시위를 목격하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이 한반도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며 “김정일 정권의 비인간적인 범죄를 중단시키기 위해 국제사회가 즉각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측에 박 씨의 기고문 등 자료를 보내고 현병철(玄炳哲) 위원장과의 만남이 가능한지 물었다. “최소의 인원만 참석하고, 고문에 대한 질문과 언론 취재는 사양한다”는 박 씨의 조건도 함께 전했다. 박 씨는 후유증으로 인해 누군가 북한에서 당했던 일에 대해 묻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인권위 담당자는 “위원장이 로버트 박 씨와 북한 인권에 관심이 많아 흔쾌히 다른 일정을 취소했다”고 알려왔다.
 
  면담일인 지난 8월 1일 오후 서울광장, 로버트 박 씨를 7개월 만에 만났다. 계절은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뀌었지만, 그의 복장은 그대로였다. 겨울옷에 두꺼운 모자를 눌러쓴 그에게 “덥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몸이 안 좋아서 이렇게 입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사는 곳을 묻자 “계속 옮겨 다닌다”고 했다. 그는 밤이 되면 빈 사무실에 들어가 잠을 자고, 낮엔 종일 돌아다닌다. 거처가 여의치 않을 땐 노숙을 한다. “후원자를 통해 살 곳과 경비를 지원해 줄 수 있다”고 하자 “그 돈은 나를 돕는 대신 탈북자와 북한 주민을 위해 써달라”며 사양했다.
 
  북한 억류 후 그는 여성에 대한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충격)가 생겼다. 특히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성을 보면 본능적으로 피한다. 그의 시선은 항상 바닥을 향하고 있으며, 여성이 함께 있는 자리에선 불안해한다. 반대로 남자만 모인 자리에선 편안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이유에 대해 직접 설명한 적이 없지만, 그의 지인 대부분은 북한에서 당한 성고문의 후유증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날 면담 통역은 하버드대 국제대학원의 안웅기(25)씨가 담당했다. 안씨는 “기독교인 통역가가 필요하다”는 박 씨의 요청에 급히 달려나왔다. 박 씨는 안씨를 보자마자 “오늘은 통역이 가장 중요하다”며 그의 손을 붙들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서울 무교동 국가인권위원회 앞, 지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고 한참 동안 큰소리로 기도했다. 두 사람의 등엔 땀이 흥건했다.
 
 
 
기도, 기도, 기도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이 로버트 박 씨의 이야기를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
  인권위 접견실에서 이뤄진 만남엔 현병철 위원장, 김태훈(金泰勳) 북한인권특별위원회 위원장, 이용근 북한인권팀장이 참석했다. 박 씨는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 직접 제작한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1시간 동안 그들의 ‘대화’가 진행됐다. 사실 대화라기보단 ‘연설’에 가까웠다. 물론 그 연설 또한 시작과 끝은 기도였다.
 
  1시간 대화가 끝난 후, 현 위원장은 “북한 인권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은 (로버트 박과) 크게 다른 것이 없다”고 했고, 김태훈 북한인권특별위원회 위원장은 “큰 열정에 상당히 공감이 간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또 “현재 국가인권위는 북한인권침해신고센터와 기록관을 통해 남한 내 2만1000여 명 탈북자가 북한에서 겪은 인권침해 사례를 신고받아 모두 기록하고 있다”며 “1961년 서독이 동독의 인권침해 사례를 기록하기 위해 동ㆍ서독 접경지인 잘츠기터(Salzgitter)에 설치한 ‘중앙범죄기록소’(Erfassungsstelle)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 확신한다”고 했다.
 
  지난 3월 15일 만든 북한인권침해신고센터엔 현재 800여 건의 신고가 접수됐다. “정치수단화와 대북관계 경색” 등을 이유로 야권과 일부 단체의 반발이 있었지만, 현병철 위원장의 북한 인권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꺾진 못했다.
 
  김태훈 특위 위원장은 “북한인권법 논란 등 정치 논리와 관계없이 국가인권위는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기관이며 인권의 범위엔 당연히 북한인권도 포함된다”며 “면담 중인 지금 현재도 직원 2명이 경북 지역에 직접 가서 탈북자를 만나고 있다”고 했다.
 
  면담 직후 박 씨는 광화문 인근의 한 사무실을 찾아 3시간 동안 기도를 한 후 홀연히 사라졌다. 전화기를 한 대 구해 줬지만, 꺼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도와 성경에 중독된 사람”
 
김태훈 북한인권특별위원장은 “북한인권침해신고센터가 서독이 인권침해 사례를 기록한 중앙범죄기록소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 확신한다”고 했다.
  4일간 사실상 종적을 감춘 그를 8월 6일 우연히 발견했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인근 도로가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의 앞으로 차들이 위험하게 지나쳤다. 차를 급히 세우고 그에게 달려갔다. 여전히 겨울옷에 모자를 뒤집어쓴 그는 전화기를 손에 든 채 기도하고 있었다. 기자를 알아본 그는 반가워하며 물었다.
 
  “여기서 1000원이면 강남역까지 갈 수 있죠?”
 
  홍제역에서 강남역까지 지하철 요금은 1200원이다. 200원 대신 목적지까지 태워주겠다 했더니 한사코 거절했다. 몇 분 동안 승강이 끝에 겨우 차에 오른 그는 성경책을 펼쳐들었다. 기도와 성경 읽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조금씩 마음이 열렸는지 그는 “몸이 많이 안 좋아 약을 계속 먹어야 하는” 자신의 건강 상태를 자세히 설명해 줬다.
 
  강남역 인근에 도착하자 그는 “북한 주민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빨리 행동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사라졌다. 박 씨를 직접 만나 그의 어눌한 한국어를 들은 사람 중 일부는 그의 정신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와 영어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사람 대부분은 그의 지성(知性)과 발상이 놀랍다고 한다.
 
  박 씨는 김정일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입북한 최초의 외국인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1년 반 동안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를 겪고 있다. 기독교에 대해 무지한 어떤 이는 박 씨에 대해 “기도와 성경에 ‘중독’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다른 이는 “남한 기독교인이 짊어져야 할 모든 십자가를 혼자 둘러멘 사람”이라고 했다. 어법상 문제가 있지만, 그만큼 그는 기도와 성경 없인 잠시도 버티질 못했다.
 
  박 씨는 국가인권위원장과의 면담 중 “일부 정당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북한 주민의 고통과 죽음을 이용하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체계적이고 무자비한 집단학살이 북한에서 지속되고 있는 현실을 더 이상 용납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면담 중 발언내용과 기고문이다.
 
 
  “나치보다 심각한 최악의 인권유린 집단”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은 “북한인권을 바라보는 시각이 (로버트 박과) 크게 다른 것이 없다”고 했다.
  “제 주장은 지금 북한에서 일어나는 사태가 ‘집단학살(Genocide)’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위급함을 알려야 합니다. 정부는 집단학살이란 단어 사용을 주저하지만, 우리는 객관적으로 사태를 봐야 합니다.
 
  이 의견은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북한의 참상을 폭로한 영화 <김정일리아>의 감독 하이킨(Heikin)의 말을 빌리면, 현재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권유린 행위입니다. 유대인인 그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북한의 인권 상황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저지른 집단학살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단학살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을 북한의 상황에 적용해야 합니다. 협약 제2조는 집단학살에 대해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 파괴할 의도로 행해진 다음의 행위라고 규정합니다.
 
  ▲집단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집단구성원에 대하여 중대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위해를 가하는 것 ▲전부 또는 일부에 육체적 파괴를 초래할 목적으로 의도된 생활조건을 집단에 고의로 부과하는 것 ▲집단 내에서의 출생을 방지하기 위하여 의도된 조치를 가하는 것 ▲집단의 아동을 다른 집단으로 강제적으로 이동시키는 것.
 
  북한은 모든 요건을 충족합니다. 현재 수많은 탈북여성이 중국에서 인신매매, 성매매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의도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되고, 중국 남성과 탈북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인종적, 국가적 이유로 사실상 강간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이 살해 또는 낙태되고 있습니다.
 
  수용소에서 탈출한 이순옥씨는 ‘김일성의 가장 큰 적은 하나님’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김일성은 반동적 요소가 있는 교회를 제거했고, 동양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북한에서 기독교의 씨를 말렸습니다. 수십만 명의 기독교인이 처형당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기독교인과 그의 가족이 정권에 의해 살해당하고 있습니다. 살해 의도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철저히 계획되고 계산된 탄압”
 
  김정일 정권은 자신을 위해 집단구성원을 살해(공개처형)하고, 고문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 위해를 가합니다. ‘목적으로 의도된 생활조건을 집단에 고의로 부과하는 것’은 식량지원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남한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지원한 식량은 모두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됐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아는 탈북자들은 모두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중단하라고 주장합니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강제낙태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며, ‘종파주의자나 계급의 적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들의 씨는 3대에 걸쳐 제거돼야 한다’는 말은 김일성이 직접 한 발언입니다. 3대 멸족 정책에 의해 수많은 아이가 강제이주되거나 살해당합니다.
 
  이렇듯 북한에서 자행되는 일들은 모두 집단학살협약에서 규정한 모든 조건을 충족합니다. 이는 기존의 집단학살 개념을 넘어 새로운 범주의 반인륜적 인권유린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95년부터 시작된 대기근으로 수많은 주민이 죽어갈 때, 김정일 정권은 벤츠와 같은 사치품을 사들였습니다. 김정일은 충분한 식량을 지원받았지만, 끝까지 굶주린 이들에 대한 식량지원을 외면했습니다. 결국 힘없는 아이들이 죽어나갔습니다.
 
  북한 정권은 자신들이 하는 것이 어떤 행위인지 알고 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상황이 철저히 계획되고 계산된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를 여러 증언과 위성사진을 통해 알고 있으며, 이는 북한 주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자행되는 대부분의 사건은 집단학살에 포함됩니다.
 
 
  “행동하면 통일 온다”
 
  무고한 재소자들이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며 삽니다. 생체실험이 일어난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폭행과 고문은 흔한 일입니다. 수용소 인원의 3분의 1은 아이들입니다. 이 사태를 객관적으로 보고 즉각적인 행동을 취해야 할 때입니다. 북한은 엄연히 집단학살을 자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정권유지를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북한 주민이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많은 한국인이 북한의 실상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최근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으로 인해 인식이 바뀌었으며, 우리는 역사의 순간에 서 있습니다. 국가지도자와 정부는 이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첫째, 북한 정권에 대한 모든 지원을 철회해야 합니다. 잘못된 원조는 북한 정권이 주민을 통제할 수 있는 시간과 힘을 주게 됩니다. 둘째, 탈북자를 통한 대북 송금이 이뤄져야 합니다. 탈북자의 가족과 친구에게 전해진 돈은 NGO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지역 주민에게 전해지며, 정권이 돕지 않는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셋째, 대규모 시위가 이뤄져야 합니다. 이 시위는 정치와 무관하게 북한 주민을 위한 시위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사항은 모두 충분히 현실성이 있습니다. 재중 탈북자들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공식 선언하고 외교적 방안을 강구해 해결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제 권고를 정부가 고려해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안네 프랑크(Frank)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베르겐 벨젠(Bergen-Belsen)’이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이 소녀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북한 수용소에서 고통당하는 수십만 명의 어린이는 그저 통계 수치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고 무한한 가능성과 존엄성을 가진 인생’이란 점입니다. 이들을 숫자로만 보는 태도 또한 범죄행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의 실질적 변화를 보기 위해선 지금 당장 행동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행동은 재중 탈북자들을 국민으로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는 정의로운 의도에 의한 행동이기 때문에 국제사회도 대한민국을 지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의 명예가 될 것이며, 시도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행동하면 통일이 가까워집니다. 행동하면 재중 탈북자들도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월간조선 201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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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권 위기를 넘어서
North Korea: More Than a Human Rights Crisis

로버트 박

Robert Park

Robert Park ⓒ 서경리.

위성사진을 보면, 지난 10년 세계 강대국들이 국제법상에 적시된 의무를 방기(放棄)하는 동안 북한 정치범 수용소는 크게 확대됐음을 알 수 있다. ‘집단학살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명시된 범죄 구성 행위들이 김정일(金正日) 정권에 의해 종교인, 반동세력 및 그들의 일가(一家)에 무자비하고 조직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유린 실태는 노예 노동, 조직적 기아(飢餓)와 고문, 강간, 강제낙태, 생체실험과 화학무기 실험, 가스실, 공개처형을 포함한다.
 
  400만명이 넘는 주민을 아사시킨 ‘정부 주도의 기아’는 1932년 김일성(金日成)의 멘토인 스탈린(Stalin)에 의해 자행된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Holodomor) 기아-집단학살과 비슷한 양상을 띤다. 전체 주민을 먹이고도 남을 수조 원어치 원조가 이뤄졌지만, 취약한 지역에는 식량을 주지 않고 군사력 강화에 빼돌렸다는 사실이 여러 조사 결과를 통해 드러났다. 이런 증거는 북한이 정치적으로 ‘불순한’ 특정 집단을 없애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기아가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2011년 6월 25일은 6ㆍ25 전쟁 6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6ㆍ25전쟁은 3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죽은 ‘대리전’이었지만, 서구에서 이 전쟁은 ‘잊힌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불린다. 한국은 전쟁 이후 풍요해졌지만, 북한 동포는 미국의 유대인 학자 다니엘 골드하겐(Goldhagen)이 일컬었듯 “전쟁보다 잔인한” 악몽, 즉 대량학살로 죽어나갔다.
 
  세상에 그 어디에도 이런 규모의 극악무도한 비극과 불의가 존재하는 곳은 없다. 지위와 정치적 소속에 관계없이 모든 한국인은 북한 주민을 살리기 위한 즉각적이고 분명한 행동을 시급히 취해야 한다. 한국을 향한 나의 권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재중(在中) 탈북자들에 대한 외교적 보호조치를 취해야 한다. 중국은 1951년 체결된 난민조약과 1967년에 채택된 ‘난민 지위에 관한 의정서’ 규약을 어기면서 탈북자들을 계속 강제 북송(北送)시키고 있다. 북송된 탈북자들은 정치범 수용소에 갇히고, 고문당하며, 처형된다. 수천 명의 북한 주민이 중국 정부의 반인류적, 불법적 조치의 직접적인 결과로 죽임을 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인 재중 탈북자들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을 의무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지금까지 인류적 비극을 해결하기 위한 다른 모든 수단이 사용됐지만, 모두 소용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탈북자들에 대한 재정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한국에 있는 탈북민 중 약 49%가 북한에 있는 그들의 가족과 친구에게 정기적 송금을 하고 있다. 이 방법은 어떤 NGO도 접근할 수 없었던 지역 주민을 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북한정권에 의한 희생자들과 우리의 연대를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다. 북한 주민을 살리려는 한국의 모든 교회, 시민단체, 개인은 탈북민을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한다.
 
  셋째, 대규모 시위다. 북한의 반인류적 범죄와 대량학살에 반대하기 위해 대규모 시위(10만명 이상)가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동안 정치범 수용소는 확대됐고, 폭압적 정권 아래 수많은 사람이 무고한 죽임을 당했다. 진정한 동정심을 가진 모든 교회, 시민단체, 개인은 비폭력적 시위를 일으키는 데 그 영향력을 집중해야 한다.
 
  대량학살에 죽어간 북한 주민을 위해 대중시위를 일으키고, 그 모습이 담긴 사진을 북한에 날려 보낸다면, 김정일 정권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는 통일된다.⊙
  


  
 
North Korea: More Than a Human Rights Crisis
 
 
By Robert Park
 
  Satellite photographs indicate that North Korea's political concentration camps have grown dramatically over the last decade while the world's superpowers shun their obligations under International Law to act. Every action which constitutes genocide according to the 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 is being ruthlessly and systematically employed by the regime of Kim Jong-il in its elimination of indigenous religious groups, "class enemies," and their families extending to three generations. Human rights atrocities in these camps include slave-labor, systematic deprivation and torture, rape, forced abortions, biological and chemical weapon experimentation on human beings, gas chambers, and public executions.
 
  Over 4 million have died of starvation as a result of a government-organized famine, an event that parallels the Holomodor famine-genocide in Ukraine (1932-33) executed by Josef Stalin, Kim Il-sung’s mentor. Though billions in aid has been sent to North Korea, more than enough to feed the entire population, studies reveal that North Korea has diverted the aid to strengthen its military while systematically preventing food from reaching the hardest-hit areas. The evidence confirms that the regime has harbored an intention to destroy specific groups of people whom they deem politically unreliable, and the famine has served as a means to this end.
 
  June 25, 2011, marked the 61 anniversary of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a proxy war resulting in over 3 million dead yet is now referred to in the West as the "Forgotten War." Though South Korea has since prospered, their compatriots in the North have been perishing in a nightmare situation scholar Daniel Goldhagen calls “worse than war:” this is genocide.
 
  There is no place in the world today where people are suffering such horrendous atrocities and injustices to this scale. It is imperative that all people of the Republic of Korea, regardless of status or political affiliation, take immediate and greater action to effectively rescue their compatriots in the North.
 
  My recommendations to the Republic of Korea:
 
  1) Execute Diplomatic Protection for North Korean Refugees in China. China continues to forcibly repatriate North Korean refugees in violation of the 1951 Refugee Convention and its 1967 Protocol. Refugees returned to North Korea face detainment in the gulag, torture and execution. Tens of thousands have been killed as a direct result of China’s inhumane and illegal policy of forced repatriation. It is now incumbent upon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o exercise their right of diplomatic protection over North Korean defectors in China, who are citizens of South Korea according to the Constitution, as every other method of resolving this humanitarian disaster has been exhausted and to no avail.
 
  2) Increase Financial Support to North Korean Defectors. An estimated 49 percent of North Korean defectors in South Korea regularly (and effectively) send money to their families and friends in the North. This represents an opportunity to not only save physical lives in regions no NGO can access but also to declare in unequivocal terms our solidarity with those who have been victimized by the regime. I call on all South Korean churches, civic groups and all individuals who claim to have a concern for the lives of the North Korean people to begin supporting the life-saving work of the North Korean defectors.
 
  3) Mass Demonstrations. There has never been a mass demonstration (over 100,000 people) protesting genocide and crimes against humanity in North Korea. Meanwhile, the camps continue to grow and countless innocent people continue to be murdered in silence at the hands of this criminal regime. All churches, civic groups and individuals with a genuine compassion must now use their influence to summon the nation for non-violent protests.
 
  When activists will be able to balloon launch photographs of mass demonstrations in the South on behalf of Korean victims of genocide in the North, Kim Jong-il's regime will be overcome and Korea will be unified.


월간조선 2011년 9월호



▶ 로버트 박과 함께 한 하루

▶ 로버트 박 "김정일 정권… 죽여 주세요!"

▶ 단독입수 / 北 억류 미국인의 수상한 메일 - 아이잘론 곰즈, 入北 아니라 拉北 가능성

▶ 로버트 박, 入北 5개월 전 중국 현지에서 사전 점검 마쳤다

▶ [對北 선교작전 秘話] 북한 지하교회의 代父 이삭 목사 (모퉁이돌선교회 대표)

▶ [현지취재] 북한 지하교회 지도자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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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씨의 12년 만의 서울 나들이
“엄마 옛날 이름이 김현희였어?”

두 아이의 학부모가 된 김현희씨가 말하는 ‘나의 남편, 나의 아이들, 나의 생활’

⊙ “성형수술한 적 없고 남편이 없었다면 이 고통 견디기 어려웠을 것”
⊙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고 억양 때문에 연변에서 온 사람인 줄 알아
⊙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것
⊙ 학부모 입장으로 학교를 찾아갈 수 없는 처지라 아이들에게 늘 미안
⊙ 20대에 결혼했다면 외모를 보고 남편감을 골랐겠지만…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ksdhan@chosun.com)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김현희

지난 4월 월간조선사를 찾은 김현희씨


지난 4월 23일 오후 月刊朝鮮 사무실로 손님이 찾아왔다. 金賢姬(김현희)씨. 그녀는 1997년 결혼과 함께 世人(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졌다가, 월간조선 2월호와의 인터뷰, 지난 3월 부산에서 일본인 납북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씨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飯塚耕一郞) 씨와의 공개 만남 등으로 다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며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김현희씨의 얼굴은 사진으로 봤던 과거의 모습과 비교해 많이 야위어 있었다.
 
  알려진 대로 그녀는 둘째 아이가 돌을 막 지난 무렵이었던 2003년 11월, MBC 취재진에 자신의 집이 노출된 다음날 새벽 그곳을 떠나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좌파정권하에서 그녀는 “‘KAL858기 폭파 사건’은 조작됐고, 김정일의 공작지시는 없었다”는 대답을 직간접적으로 강요받았다. 그녀는 그 배후 중의 하나가 좌파정권하의 국정원이었다고 주장하며 국정원의 공식사과와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고 있다. 국정원이 자신을 가짜로 모는 프로그램을 제작 중인 MBC 출연을 요구했고, 국정원 간부로부터는 제3국으로 이민을 떠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좌파정권하의 ‘싸늘했던 시대’가 ‘평범한 여자’로 살아가고 싶었던 그녀의 바람을 철저하게 짓밟은 것이다. ‘살벌한 시대’는 그녀를 투사로 만들었고, 살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더 강해져야 했다고 한다. 그 결과가 그녀에게 안겨준 것은 ‘야윈 얼굴’이었다.
 
 
 
좌파정권에 맞선 당찬 여인
 
KAL 858기 폭파 사건과 관련 재판을 받던 시절의 김현희씨 모습.
  국정원 직원이었던 남편 정모씨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자주했다.
 
  “김(정씨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부인 김현희씨를 ‘김’이라고 호칭했다)이 강한 정신력 없는 일반인이었으면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을 겁니다.”
 
  그런 고통의 시절이 마무리되어 간다고 느낀 것일까. 그녀는 지난해 연말 필자에게 크리스마드 카드를 보내 왔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힘들고 보람 있는 한 해였습니다. 어려운 저에게 늘 격려와 힘이 되어 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승용차에서 내린 김현희씨는 “사무실에 기자들이 많은가”부터 물었다. 많은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받는다는 게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그녀는 지난 3월 부산에서 있었던 일본인 납북자 가족들과의 만남 후 열흘 가까이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필자의 “月刊朝鮮에는 모두 다 김현희씨 편만 있으니까 안심하고 들어가시죠”라는 답변에, 김씨는 “칼을 댄다는 무시무시한 글을 쓴 분을 직접 보니 호리호리하시네요”라며 웃었다.
 
  김현희씨의 ‘칼을 댄다’는 표현은 月刊朝鮮 2004년 1월호 ‘추적/MBC·SBS 등 방송들은 왜 갑자기 ‘김정일도 인정한 KAL 858機(기) 폭파사건의 조작의혹’을 다루는가’ 題下(제하) 기사에 실린 필자의 글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당시는 방송사와 좌파매체, 親北(친북)인사들이 한몸이 되어 ‘KAL 858기 폭파사건 조작설’을 제기할 무렵이었다.
 
김현희씨가 김성동 기자에게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
  필자는 기사 말미에 “역사는 친북세력들과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언론인들의 가슴에 칼을 대게 될 것이다”라고 썼다. 그녀는 지금도 그 글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 한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품고 지금까지 좌파정권과 싸워 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
 
  이날 김현희씨 부부와 月刊朝鮮은 저녁식사 시간을 포함해 5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月刊朝鮮에서는 金玄浩(김현호) 대표, 金容三(김용삼) 편집장, 필자, 白承俱(백승구) 기자, 金正友(김정우) 기자가 참석했다. 이날 김현희씨는 자녀교육 문제 등 생활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생활인 김현희’의 여러 모습을 그녀는 솔직담백하게 이야기했다.
 
  필자는 김현희씨 부부와의 만남 후, ‘자연인으로서의 김현희’의 삶을 갈망했던 ‘생활인 김현희’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이제는 정말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고 갈망했던 그녀에게 ‘평범한 삶’을 우리 사회가 돌려주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녀를 ‘미모의 테러리스트’가 아닌 ‘좌파정권에 맞서 싸운 당찬 여인’으로 기억해 주어야 할 것이다. 4월 23일 月刊朝鮮과 김현희씨가 나눈 대화들을 문답형식 위주로 재구성한다.
 
 
  “빨래하는 게 큰 일”
 
  그녀의 억양에는 북한 사투리와 현재 생활하고 있는 지역의 사투리가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1997년 결혼과 함께 시댁이 있는 지역으로 내려간 후 6, 7년 전 친척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잠깐 들른 것을 제외하고는 이번의 서울 방문이 결혼 후 처음이라고 했다. 김현희씨 가족은 2003년 11월 집을 나온 후 전화도 없고 컴퓨터도 없는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큰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고 둘째 아이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여가 때는 주로 뭐하십니까.
 
  “빨래하는 게 제일 큰일이고(웃음), 애들 뒷바라지하는 것도 제게는 중요한 일이죠.”
 
  ―세탁기가 없습니까.
 
  “있긴 있는데 물이 잘 안 나와요. 보통 1시간이면 빨래가 끝나잖아요. 그런데 4시간이 더 걸립니다. 물이 잘 안 나오니까. 통에 물을 받아서 넣고 하다 보면 4시간이 더 걸립니다. 북한에서 했던 생활을 그대로 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국가로부터 정신적, 물질적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질적 보상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 가족이 이렇게 집을 나와 있는 게, 아무 이유 없이 나와 있는 겁니까. 지금에 와서 자꾸 ‘그 집 팔고, 다른 집 가면 되지 않으냐’고 그래요. 우리가 살던 집이 5년반째 그대로 있거든요. 사실 그 집이 증거 아닙니까. 지금 안 그래도 국정원이 저한테 폭파사건에 대한 조작진술을 강요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하는데, 그것까지 팔 수는 없죠. 사실 지금 사는 데가 참 어렵거든요. 보일러도 옛날식인데다가, 물도 잘 안 나와요. 북한생활을 다시 하는 것 같아요. 처음에 가니까, 부엌도 콧구멍만 하고 버너로 밥과 국을 끓였어요. 국을 끓이다 보면 금방 불이 죽고, 불이 죽으면 또 흔들어서 쓰고, 밥을 못할 정도였어요.”
 
 
  쥐들이 득실대는 비좁고 낡은 집에서 감금 생활
 
다구치 야에코 씨의 오빠인 이즈카 시게오 씨(왼쪽)와 다구치 씨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 씨가 2009년 3월 11일 부산 벡스코에서 김현희씨와 만나고 있다.
  ―집이 비좁고 낡았나 보죠?
  
  “부엌이고 화장실이고 하도 좁아서 혼자 외에는 못 들어갑니다. 생쥐하고 바퀴벌레가 약을 놔도 3개월 지나면 또 생겨요. 쥐가 집에도 막 들어와요. 그게 참 영리하데요. 사람 있으면 못 나가고 있다가, 문 열면 확 나가는 쥐가 많거든요. 바퀴벌레도 요즘 바퀴는 (집게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이만해요. 서양 바퀴인지. 지난 3월에 부산 가기 전날에도 새벽에 자다가 일어나서 이불 위로 지나가는 큼지막한 바퀴벌레를 잡다가 잠을 설쳤어요. 그런데 그런 곳에서 사는 저를 그날은 국가원수 경호하듯이 그러니까 그것도 참 어색하...



월간조선 2009년 6월호 -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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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를 가짜로 모는 사람들
‘김현희의 편지’ 공개 후 ‘남북한 정부 공동조사’ 주장하기 시작

학생운동 출신 운동가·천주교 단체들이 “KAL 858기 폭파사건이 조작됐다, 김현희는 가짜다”라며 의혹제기 주도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국정원 과거사위

2006년 8월 1일 국정원 진실위가 KAL 858기 폭파사건 조사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사진 속 김현희의 귀 모양으로 인한 의혹이 제기된 것에 대해 진실위는 1972년 11월 당시 김현희가 평양 헬기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최종 확인했다.

 
“앞으로 제가 부정한 국가기관과 공영기관, 시민종교단체들과 맞서 투쟁해야만 할 운명에 처해질 것 같습니다. 親北(친북) 성향의 정부가 물러가고 實用(실용)의 정부가 들어섰지만, 저 혼자 그들을 대처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입니다. 인내하면서 살아온 5년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KAL기 폭파사건의 주인공 金賢姬(김현희)씨가 2008년 10월 李東馥(이동복) 교수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적힌 내용이다. 편지는 MBC·SBS 등 방송제작진들이 그의 집을 ‘습격’해 그가 사는 곳을 북한을 포함한 전 세계에 노출시켰고, 김현희씨를 보호해야 할 국정원과 경찰은 김씨와 그의 가족을 살던 곳에서 ‘추방’했다고 전한다. 김씨는 국정원과 방송 제작진들이 “방송화면 뒤에서 시청자들을 비웃고 조롱하면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면서 “역사는 이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이 발생한 지 20년이 흘렀지만, ‘그들’의 역사는 여전히 김현희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 그녀를 여전히 가짜라고 주장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辛成國 신부
 
  “全斗煥 정권이 KAL기 사건 일으켰다고 확신”
 
신성국 신부.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의 집행위원장으로 KAL기 폭파사건에 대한 의혹 제기를 주도했다.
  辛成國(신성국·47) 신부는 1961년 충북 괴산군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서울 성신고를 졸업한 후 광주가톨릭신학대에 입학했다. 신학대학 1학년 재학 시절 광주에서 목격한 5·18의 충격이 그를 ‘행동하는 司祭(사제)’로 변화시켰다. 그는 2004년 3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항쟁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사실이 평생의 부채로 남았다”고 말했다.
 
  2000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공동대표를 맡은 신성국 신부는 같은 해 3월 충북 청원의 청소년수련관을 ‘안중근 학교’로 바꾼 후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 학교를 2004년 2월까지 운영하며 안중근 추모예술관, 뤼순(旅順) 감옥 체험실을 설치하는 등 안중근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2000년 8월 신 신부는 ‘조선일보 바로보기 옥천시민모임’을 주도했다. 주민을 상대로 사실상의 ‘조선일보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2005년 8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일보 안 보기 운동을 시작한 옥천은 언론 개혁의 성지가 됐다”고 말했다. 신 신부는 조선일보를 ‘사탄’이라고 부른다. 그는 ‘안티조선’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조선일보 폐간이 ‘예수의 명령’이라고 주장했다.
 
  신 신부는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의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가 KAL기 사건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2003년 사건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면서부터다. 그는 ‘성서를 통해 본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 운동’이란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全斗煥(전두환) 정권이 1980년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을 잔학하게 학살하여 정권을 잡더니, 정권 말기에는 KAL 858기 사건을 일으켜 수많은 노동자 가족과 승무원 가족들을 희생시켰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그는 “盧泰愚(노태우) 정권 당시 안기부가 가족들을 협박, 회유하면서 진상규명 운동에 대해 철저한 방해공작으로 일관했다”며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족들에게 안기부의 협박은 강압이었고, 공포 그 자체였다”고 기록했다. 2003년 10월부터는 ‘진상규명 촉구 전국순회강연’을 돌면서 사건에 대한 의혹 제기와 검찰의 수사기록 공개를 요구했다.
 
신성국 신부가 한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 그는 조선일보를 ‘사탄’이라고 표현했다.
  KAL기 사건 외에도 그는 2003년 3월에 이라크와 요르단으로 날아가 현지에서 反戰(반전)운동을 벌였다. 그는 직접 戰場(전장)에서 인터넷을 통해 민간인 피해자들의 상황을 전했고, 다른 단체들과 연대해 반전평화운동에 참여했다.
 
  귀국 후 충북대에서 열린 공개강좌에서 그는 “이라크에 다녀 온 후 ‘미국을 다시 보자’는 생각을 가졌다”면서 “미국은 세계 최대 핵무기 보유국가이자 대량살상무기 지속사용 국가”라고 발언했다고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가 2003년 5월 21일 보도했다.
 
  꽃동네와 吳雄鎭(오웅진) 신부도 신 신부의 비판 대상이었다. <오마이뉴스>(2003년 1월 22일자) 기사에 따르면, 신 신부는 1998년 꽃동네 관련 사항을 수집하다가 일부 신부들에게 “꽃동네가 현대그룹보다 많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일부 언론과 천주교 단체가 꽃동네에 대한 의혹제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 신부는 지난해 9월, 8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대법원 무죄판결을 받았다.
 
  신 신부는 2004년 盧武鉉(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탄핵됐을 때 탄핵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경향신문>(2004년 3월 28일자)과의 인터뷰에서 “성서에 보면 예수님은 ‘나는 불을 지르러 왔다. 모든 것을 다 태우고 새 하늘 새 땅을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셨다”며 “(노무현 탄핵 반대) 촛불집회는 구원의 사건, 해방의 사건, 창조의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006년 1월 25일자로 미국교포사목으로 인사발령을 받고 미국에서 사목 활동을 하고 있다. 이후 공식적인 활동으로 언론에 노출된 적은 없다. 그가 한 인터넷 카페에 남긴 편지에 따르면 2009년 한국으로 귀국할 예정이라고 한다.
 
 
  玄俊熙 前 감사원 공무원
 
  “KAL기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건 ‘天動說’”
 
KAL 858기 폭파사건에 대한 의혹의 불씨를 지핀 현준희씨. 사진은 1996년 4월 민변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연 그가 효산콘도부지 감사중단에 대해 폭로하는 모습이다.
  玄俊熙(현준희·55)씨는 ‘1세대 내부고발자’로 불린다. 그는 1995년 감사원 재직 당시 효산그룹이 콘도 건축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정권 실세와 결탁해 로비를 하는 정황을 포착했다. 하지만 상부의 지시에 의해 감사가 중단됐고, 현씨는 감사중단의 부당성과 관련자 징계를 건의했지만 묵살됐다. 그는 총선 직전이었던 1996년 4월 8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관련 사실을 폭로했다.
 
  감사원은 현씨를 파면했다. 18년간 몸담은 직장에서 쫓겨난 그는 명예훼손 등의 이유로 2개월간 구속됐다 풀려났다. 현씨는 1997년 1심, 2000년 2심에서 승소해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2002년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됐다. 서울중앙지법 항소부는 다시 무죄를 선고했고, 2008년 11월 14일 대법원은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현씨는 <서울신문>(2007년 12월 5일자)과의 인터뷰에서 “이제는 감사원보다 대법원이 더 밉다. 빈 라덴처럼 비행기로 대법원 건물을 들이받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고 말했다.
 
  현씨는 재판기간 동안 건강식품, 학습지 방문판매, 휴대전화 영업사원 등을 전전했다. 집을 전셋집에서 월셋집으로 옮기는 등 생활고를 겪다가 2000년 4월, 외국인을 상대로 한 韓屋(한옥) 게스트하우스를 시작했다.
 
  2001년 연합뉴스 부설 동북아시아정보문화센터가 발행하는 <월간 내외저널> 창간호(10월호)에 ‘김현희 KAL 858기 사건 조작 의혹’이란 기사가 게재됐다. 현씨는 이 기사에서 ‘감사원 재직 당시부터 14년 동안 이 사건을 추적해 왔다’며 사건과 관련된 12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이 기사가 기폭제가 되어 2001년 11월 23일 천주교인권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어 “사건에 숨겨진 진실이 있다”며 정부 차원의 재조사를 촉구했다.
 
  사흘 후인 26일엔 천주교 신부들과 KAL 858기 폭파 당시 희생된 유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위원장 김병상 신부)가 결성됐다.
 
  이 대책위의 주도하에 정보공개 청구소송과 국회 청원, 천주교 사제들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선언이 이어졌고, KAL기 폭파사건에 의혹이 있다는 내용을 소재로 한 소설이 출간됐다. 방송사들은 앞다퉈 KAL기 폭파사건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현씨는 <인물과 사상> 2002년 2월호 ‘과연 김현희는 KAL 858기를 폭파했는가’란 기사에서 “KAL 858기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天動說(천동설)’로 南北(남북)을 이간질한다”며 月刊朝鮮 2001년 11월호, 2002년 1월호 기사를 반박했다.
 
  <동아일보>(2003년 12월 21일자)는 그를 ‘대한항공 추락사건(이 기사는 폭파사건을 ‘추락사건’이라고 표기-편집자 주) 의혹 불씨 지핀 사람’으로 표현했다. 당시 인터뷰 내용이다.
 
  “안기부 수사발표의 잘못을 100가지나 지적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수사는 졸속이었습니다. 국가정보원은 지금도 김현희 관련 증거는 400여 점이나 보관하고 있으면서도 사고기 잔해는 행방조차 묘연합니다.”
 
  사건 당시 일본 연수 중이던 현씨는 뉴스를 일본에서 접했다.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바로 전날 발생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비행기 추락 사고와 비교했을 때 조사의 성과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이유였다. 1992년 다시 일본 유학을 떠난 그는 개인적으로 일본 언론보도 자료들을 수집했다. 관련 내용을 발표할 용기가 나지 않아 보관만 하고 있다가, 2001년에 발표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현씨는 2003년 12월 주간지 <한겨레21>에 ‘김현희는 왜 김신조처럼 못 사는가’란 제목의 기고를 했다. 그는 이 기고문에서 자신을 “주사파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평범한 중생”이라며 “김현희가 떳떳하다면 왜 김신조 등 다른 귀순 전향 간첩처럼 일반인과 어울려 살지 못할까”라고 했다.
 
  몇 해 전부터 그와 관련된 언론 보도에서 KAL기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제기했던 의혹들은 2006년 국정원 진실위 진상규명을 통해 대부분 해소됐다.
 
  현씨는 현재 서울 종로구 계동에서 외국인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현씨는 필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지금도 수많은 의혹이 풀리지 않고 있다”며 “의혹은 언론이나 국정원에서 할 것이 아니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해소해 줘야 한다”면서 이렇게 했다.
 
  “당시 사형선고를 받은 김현희를 사면한 가장 큰 이유가 ‘역사의 산증인’으로 활용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면 떳떳하게 나타나 직접 해명을 해야죠.”
 
  현씨는 지금도 “정부측의 발표는 ‘천동설’에 불과하다”며 “‘무서운 시대’에 해외 멀리서 일어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해선 유엔이나 정부의 공식 재조사, 남북 공동조사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 다시 활동을 할 계획이 없는가”란 질문에 “생업이 바빠서 어렵다”고 답했다.
 
 
  서현필 작가
 
  “사건 공론화 위해 소설 썼다”
 
소설 <배후>의 저자 서현필씨가 기자회견장에서 김현희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소설 <배후>의 저자 서현필(필명 서현우·46)씨는 울산에서 태어나 부산 동의대 정외과를 나왔다. 재학시절 학생운동에 참가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돼 실형을 살았고, 볼링장을 운영하던 1987년엔 6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서씨는 2003년 12월 7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KAL기 사건에 대해 “16년 만의 대통령직선제 쟁취에 대한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은 실로 중대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서씨는 사건 직후부터 국내 신문기사와 외신자료를 수집해 ‘초동수사’에 착수했다고 한다. 2001년 수지 김 사건의 실상이 밝혀지면서 그는 KAL기에 대한 소설 구상을 시작했다. 그는 일본 작가 노다 미네오(野田峯雄)의 <파괴공작> 등 서적과 국내·외 신문보도, 대한항공 수색일지, 재판 판결문 등 자료들을 참고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2003년 5월 소설 <배후>가 출간됐다. 소설은 주인공 ‘해모수’가 안기부, CIA 등의 추격을 받으며 사건에 대한 각종 의혹들을 풀어낸다는 내용으로, 해모수의 이야기를 ‘서현우’(저자의 필명)가 전해 듣는다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같은 해 11월 19일 보강판을 낸 그는 인터넷 매체인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을 대중적으로 공론화시키기 위해 소설을 썼다”며 “의혹을 제기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흥미롭게 이야기를 다룰 수 있어서 소설이라는 형식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강판이 발간된 지 사흘 후 KAL기 폭파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국정원 조사관 5명이 서씨와 창해출판사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담당 조사관들은 저자와 출판사에 각각 2억5000만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서울지검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국정원 측은 “소설이 창작의 자유에 속하나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사건과 이름 등을 거명해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서씨는 11월 24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국정원은 제기된 의혹에 대해 해명하든지 공개토론에 응하면 될 것이지 왜 소송을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내 주장은 폭파사건 자체가 기획사건이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수사발표와 재판 판결문 내용이 실제 사건 내용과 다르니 재조사를 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그와 함께 소송을 당한 창해출판사 대표 全炯培(전형배)씨도 KAL기 사건에 대한 의혹을 꾸준히 제기해 온 인물이다. 그는 2004년 3월 노다 미네오의 <파괴공작>을 직접 번역해 출간했다. 베스트셀러 <오체불만족>의 번역자이기이도 한 그는 2004년 3월 19일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배후>가 기록물도 아닌 소설이고, 또 소설 속에서 국정원 당시 직원들의 실명이 거론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명예훼손을 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배후>, <파괴공작> 외에도 신동진씨의 등 사건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책들이 전씨가 경영하는 창해출판사에서 출간됐다.
 
 
  “김현희 스스로 쓴 편지 아니다”
 
  서현필씨는 2003년 8월 신성국 신부의 요청에 따라 전국 순회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경향신문>(2003년 12월 7일자) 보도에 따르면, 서씨는 전국의 천주교회 본당을 돌아다니면서 미사 중간에 KAL 858기 폭파사건과 관련하여 자신이 추적한 내용을 중심으로 강연을 하면서 신자들을 상대로 여론화 작업을 했다. ‘KAL 858기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 진상조사위원장을 맡아 온 서씨는 진상조사가 마무리된 후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을 소재로 한 작품을 쓸 계획이라고 했다.
 
  2008년 2월 29일 사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서씨와 전씨를 상대로 제기됐던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불구속 기소했고, 2008년 9월 9일 서울중앙지법은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민사소송도 2007년 8월 1심에서 원고패소 판결이 났다.
 
  최근 김현희씨의 편지가 공개된 이후, 서현필씨는 2008년 12월 16일 서울 명동 천주교인권위 사무실에서 열린 대책위 기자회견에서 김씨의 서신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연합뉴스>(2008년 12월 16일자) 보도에 따르면, 서씨는 “김현희 수사 및 재판기록을 살펴본 결과 수사 자체가 ‘짜 놓은 각본’에 의해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사례가 방대하기 때문에 조만간 날짜를 잡아 의혹을 빠짐없이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이들 단체는 사건의 진실 규명을 위해 남북 정부의 공동조사를 주장했다.
 
  서씨는 필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를 비롯해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객관적으로 제시된 의혹은 해소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안기부의 수사기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엉터리였다”며 “과거에 입수된 국정원 내부 전문들에만 의존한 조사로 인해 보고서는 온통 ‘추정’이란 단어들로 가득하다”고 했다.
 
  서씨는 최근 김현희씨의 편지와 관련, “시기적으로 너무 정치적인 행위”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정권에선 가만히 숨죽이던 사람들이 정권이 바뀌니까 갑자기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국정원 내부의 파워게임도 영향을 미쳤겠죠. 그리고 전 편지가 김현희의 손으로 적힌 것은 맞지만, 그의 머리에서 나온 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어요.”
 
  그는 “아무리 정치적으로 위축되고 흔들릴지라도,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이 싸움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吳宗烈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진보연대는 KAL기 사건 외면하지 않을 것”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2008년 여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됐다.
  吳宗烈(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KAL기 사건 진상규명 관련 모임이 있을 때마다 등장해 의혹을 제기해 왔다. 그가 이끌었던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은 NL(민족해방) 계열 주사파들이 대거 포진한 단체로, 그동안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한미 FTA 반대 등을 주장해 왔다.
 
  오씨는 反美(반미) 집회를 주도해 온 인물로, 2008년 여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를 주도한 혐의(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로 기소됐다. 그는 “촛불시위를 주도하지 않았다”며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1938년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광주지역에서 초·중·고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8년 전국교사협의회 대의원대회 의장, 1989년엔 전교조 광주지부장이 됐다. 이후 광주·전남민주연합 상임의장, 광주·전남대책회의 공동의장, 광주시의회 의원 등을 거쳐 현재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오씨는 2001년 11월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 출범 당시부터 추모제 등 행사에 참석해 사건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2007년 20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그는 “高泳耉(고영구) 전 국정원장의 인격은 훌륭하지만 KAL 858 사건에서 한계에 부딪혔다”고 말했다. 또 그는 “한국진보연대는 KAL 858기 사건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투지는 모든 병마와 좌절감을 이겨낸다. 좌절과 울분보다 투지를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인터넷 매체인 <통일뉴스>(2007년 11월 29일)가 보도했다.
 
  2004년 7월 29일 열린 ‘올바른 과거청산 촉구 기자회견’에선 “기득권 세력이 야욕을 가질 때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며 KAL기 사건과 인혁당 사건 등을 열거했다. 오씨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불법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아 오다 2008년 11월 검찰에 검거, 구속됐다.
 
 
  金德珍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KAL기 사건 남북 공동조사해야”
 
‘KAL 858기 가족회’와 ‘KAL 858기 진상규명 대책위’가 2003년 12월 서울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잠적한 김현희를 29만원에 현상수배한다”며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金德珍(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은 1974년생으로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95년 명지대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처음엔 “술 먹고 놀기만 했다”던 그는 등록금 투쟁 등 학생회 활동을 통해 세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뉴스메이커>(2007년 6월 5일) 보도에 따르면, 1999년 명지대 총학생회 부회장으로 당선됐다. 김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년6개월 복역한 후 인권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김씨는 2006년 미군기지 이전반대 시위를 주도했고, 시위 도중 두 차례 연행됐으나 모두 풀려났다.
 
  김씨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약칭 진실위)에서 주최한 간담회에도 참석했다. 2004년 8월부터 10월까지 네 차례 진행된 간담회에 이석태 민변 회장,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 등과 함께 참석했다.
 
  그와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지금도 KAL기 사건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지난해 김현희씨의 편지가 공개된 후인 12월, 김덕진씨는 ‘KAL 858기 가족회’ 등과 함께 인권위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KAL기 사건을 남북이 함께 공동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김현희의 편지는 21년 전 KAL 858기 안에 탑승했던 115명에 대한 모독이고, 긴 세월을 힘겹게 살아오고 있는 실종자 가족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다.
 
  이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의혹을 제기해왔고, 지금도 활동 중이다.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 공동대표를 역임했던 김병상 신부(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는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대책위의 활동을 주도해 왔다. 그가 위원장으로 있는 동안 대책위는 “잠적한 김현희를 29만원에 현상수배한다”며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 인근에서 집회를 갖는가 하면, 수배전단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그는 최근 언론노조의 파업을 지지하는가 하면, 남북관계 정상화를 주제로 한 시국선언에 참여하기도 했다.
 
  2003년 MBC 과의 인터뷰에서 “김현희는 완전히 가짜”라고 한 心載桓(심재환) 변호사(법무법인 정평)는 민변 회원으로, 소설 <배후>로 소송을 당한 저자 서현필씨와 전형배 창해출판사 대표의 변호를 담당했다.⊙

기사 全文 보기 : 월간조선 200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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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한 일본 古지도
"日本海가 아니라 朝鮮海였다"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사진 : 李相泰 국제문화대학원대학 교수 제공

조선해 동해 일본해

1794년 아세아전도(亞細亞全圖),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


동해(東海)를 ‘조선해(朝鮮海)’로 표기한 일본 고(古)지도가 무더기로 공개됐다. 국제문화대학원대학의 이상태(李相泰) 석좌교수(前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가 《월간조선》을 통해 공개한 지도 10여 편은 모두 동해를 ‘일본해’ 대신 ‘조선해’로 명시했다.
 
  ‘조선해’ 표기 일본 지도는 1794년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가 제작한 <아세아전도>(亞細亞全圖), 1809년 다카하시 가케야스(高橋景保)의 <일본변계략도>(日本邊界略圖) 등 모두 30여 편이 발굴됐다. ‘일본해’란 말이 일본 지도에 처음 등장하는 때는 <아세아전도>보다 8년 늦은 1802년의 일이다. 19세기 전까진 일본인 스스로 동해를 ‘일본해’가 아닌 ‘조선해’로 불렀다. 서양 고지도에서 동해(한국해)는 1571년 이미 기재됐고, 일본해는 1603년에서야 처음 등장했다. 이 교수는 “일본 고지도와 공문서 등에 표기된 조선해를 계속 발굴해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했다. 공개된 지도를 한자리에 모았다.⊙
 
1808년 염부제도 부 일궁도(閻浮提圖 附 日宮圖), 산카 존토(山下存統).

1809년 일본변계약도(日本邊界略圖), 다카하시 가케야스(高橋景保).

1810년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 다카하시 가케야스(高橋景保).

1850년 본방서북변계약도(本邦西北邊界略圖), 야스다 라이슈(安田雷州).

1850년 가영교정동서지구만국전도(嘉永校訂東西地球萬國全圖), 구리하라 신쵸(栗原信晁).

1853년 지구만국방도(地球萬國方圖), 나카시마 슈도(中島翠堂).

1854년 대일본연해요경전도(大日本沿海要境全圖), 구도 도헤이(工藤東平).

1862년 환해항로신도(環海航路新圖), 히로세 호안(廣瀨保庵).

1871년 대일본사신전도(大日本四神全圖), 하시모토 사다히데(橋本玉蘭齋).

李相泰
⊙ 69세. 연세대 사학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문학 박사.
⊙ 명지대·홍익대·동국대 강사, 조선시대사 연구회 감사, 일본 도쿄대 조선문화연구실 객원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 실장 등 역임.
⊙ 現 국제문화대학원대학 석좌교수, 동해연구회 부회장.


<월간조선> 2011년 6월호 =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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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5 - [정치·북한] - 북한發 동해 표기 소동… 무지한 일부 언론과, 무관심한 국민의 합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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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편지와 오세훈 서울 시장의 편지. 판단은 알아서.


1.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보낸 공개 편지.


김상곤

김상곤 경기도교육감. (출처:경기도교육청 홈페이지)

존경하는 오세훈 시장님! 경기도교육감 김상곤입니다.

시장님께서 결국 무상급식 주민투표 발의를 강행하셨다는 소식을 들으며 착잡하고 서글픈 심정으로 몇 마디 외람된 말씀을 드리는 것을 양해하여 주십시오.

무상급식을 통한 보편적 복지 실현을 앞서 주장한 사람으로서, 이 사안이 단순히 서울의 무상급식 문제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풀어야할 숙제라는 생각으로 드리는 말씀이오니 부디 남의 잔치에 배 놔라 감 놔라 한다는 참견으로 여기지는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시장님! 저는 솔직히 시장님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발의가, 말 그대로 '주민의 뜻'을 묻는 행정절차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건강한 '밥상'을 자신의 잘못된 신념에 대한 맹신과 과도한 정치적 행보에 이용한다는 느낌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주민투표에 들어갈 예산과 행정력, 그리고 그 것을 통해 국민들과 대한민국의 미래가 얻게 될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무상급식에 들어가는 예산을 셈해보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행정 수장이 정치적 기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국민들의 불안과 편 가르기를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유권자들이 뭔가에 홀려서 투표를 했다구요?

과문한 탓인지, 저는 시장님께서 자신이 마치 엄청난 고난을 받고 있는 약자인 것처럼, 그리고 주민투표 발의를 정의와 우국충정으로 무장한 투사의 의로운 투쟁인 것처럼 생각하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오늘 아침 시장님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국가적 어젠다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밤새 고민한 결정이었다"면서 "주민투표에서 반드시 승리해 야당의 보편적 복지 프레임에서 벗어나겠다"고 말씀하셨더군요. 자기 스스로 특정 정파의 아이콘을 자처하는 모습이 최근 다른 나라 극우 인사들의 장렬한 맹신과 묘하게 닮아있다는 두려움까지 밀려왔습니다.

심지어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을 지지한 유권자들이 뭔가에 홀린 상태에서 투표에 임했다"면서 유권자들의 판단과 투표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 발언까지 거침없이 하시는 모습 또한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시장님과 생각이 다릅니다. 오히려 작년 6.2 지방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한 무상급식을 둘러싼 치열한 논란은 역으로 '복지불감증'에 대한 웅변이었으며, 국민의 현명한 선택은 복지의 규모를 보편적 방식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명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미래인 어린이들의 급식만이라도 국가가 보편적 방식으로 조금 더 확대해야 한다는 생각과 정책에 색깔론으로까지 대응하는 시대착오적 정치 행태를 준엄하게 심판한 것이었습니다.

오 시장님!

아시다시피 한국의 복지예산 순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바닥권입니다. 우리나라 공공복지지출 수준은 OECD 평균인 20%의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OECD 국가들의 정부총지출 중 복지예산의 평균비율은 대부분 50%를 넘는 반면 우리는 20% 후반대에 불과합니다. 반면, 부모들이 부담해야 하는 공교육 사부담비를 비롯한 교육비는 세계 최고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복지병'을 앓아본 적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G20 소속 다수 국가가 시행하고 있는 '보편적 복지' 정책은,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는 세계화의 기본이며, 복지야말로 수요와 일자리를 창출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정책임을 이미 많은 나라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부자아이들에게도 무상급식이 필요한가?"라는 일부의 주장은 복지에 대한 인식 부재이며, "무상급식으로 급식의 질이 떨어진다"는 주장 또한 사실과 다릅니다. 무상급식은 정치적 견해나 이념, 그리고 경제논리에 앞서, 우리 아이들의 인권과 교육권을 보호하는 중요한 학교 교육과정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교육은 그 어떤 부분보다 공공성이 강한 사회적 자산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느끼는 불평등과 심리적 차별은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합니다. 가난한 집 아이이건, 부잣집 아이이건 아이들은 학교에서 차별받지 말아야 하고, 균등한 교육 기회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아이가 성공할 기회가 차단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교육의 기본적 원리입니다.

꼭 하위 50% 아이들에게 '무료급식' 낙인 찍으셔야 합니까?

무상급식은 단순히 아이들에게 밥 한 끼 공짜로 먹이는 개념이 아니라, 교육의 공공성을 확대하고 우리 모두의 삶의 질 향상을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과정을 통해 양극화가 빚어낸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사회통합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의 안전운행을 위한 기본적인 안전벨트일 뿐, 첨단 안전장치나 에어백 같은 선택 사양이 아닙니다. 무상급식 정책은 사회 전반의 '복지 레짐(regime)'의 전환을 이끌어내는 소중한 기회로 여겨져야 합니다.

존경하는 오 시장님!

보편적 복지국가에서는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부여된 마땅한 권리이며 이를 보장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또한 이 권리는 조건에 따라서 차별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 사회에 진정 필요한 것은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라는 진부한 논쟁과 정치적 이해로 점철된 편 가르기가 아니라, 무상급식으로 촉발된 '보편적 복지' 의제를 어떻게 제대로 확산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한 철학과 정책입니다.

오세훈 시장님께 충심으로 부탁드립니다. 무상급식은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한국 사회의 불안한 복지가 가져다 준 폐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져 주십시오. 경제력 하위 50%에 속하는 우리 어린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자신이 '하위 50%'에 속하는  '무료급식 대상자' 라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낙인과 슬픔을 안겨주지는 말아주십시오.

시장님께서 지금의 격정에서 벗어나, 약자의 어려움과 눈물에 공감하며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갈 대한민국을 꿈꾸던 초발심으로 돌아와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부디 사람의 얼굴과 체온을 지닌 따뜻하고 아름다운 행정을 펼쳐 주십시오.

새로운 정치와 행정을 기대하는 많은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을 부디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오시장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1년 8월 2일

경기도교육감 김 상 곤

全文출처 : 경기도교육청 블로그
http://blog.naver.com/ken_news/70115046721




2. 오세훈 서울시장이 쓴 대국민 공개 편지.


오세훈

오세훈 서울시장. (출처: 오세훈 시장 홈페이지)

요즘은 잠자코 집무실 창 너머 산을 쳐다보는 일이 잦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이유는 익히 짐작하시겠지요. 한마디로 답답한 심정입니다.
   
오늘은 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라는 인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과거 자민당 집권 당시, 막후 실력자로 불렸던 일본의 유력 정치가입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입니다. 온갖 권모술수로 정적을 제압하는 강인한 모습 뒤에는, 우리 재일동포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권익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자상한 면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도 현역 말기에 들어서자 이익과 타협하는 노회함이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공명당과 타협하는 모습에서는 긴 한숨이 나옵니다. 왜냐고요? 당시 일본 국회의 의석 구조상 법안통과를 위해서는 공명당과의 공조가 불가피했는데, 공명당이 자민당에 협조하는 대가로 내세웠던 조건이 바로 현금 나눠주기식 포퓰리즘인 ‘공짜 상품권’ 정책이었기 때문입니다.
   
1999년 3월은 일본 정치사상 매우 부끄러운 달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자민당 정권은 공명당의 제안을 받아들여 15세 이하 자녀에게는 무차별적으로, 65세 이상 노인에게는 선별적으로 1인당 2만엔 상당의 상품권을 살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내세운 명분은 얼핏 듣기에는 좋은 ‘서민복지’와 ‘지역경제 활성화’였습니다. 소요된 재정은 지금 환율로 8조5000억원에 달합니다만, 이는 일본 경제에 큰 부담이 될 정도의 수치는 아닙니다.
   
하지만 정치권에 의한 무차별 현금살포의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일본인들에게는 더 없이 의미심장한 수치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면무상급식을 망국적 포퓰리즘의 ‘시작’으로 규정하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자민당 내부에서도 거센 반발이 일었습니다. 그러자 노나카는 의원들을 모아 “공짜 상품권은 천하의 어리석은 정책(愚策)”이라고 한탄하면서도 “7000억엔의 국회대책비용으로 여기고 참자”며 무마시켰습니다. 책임 있는 정치가의 현실타협과 국민의 무관심을 양분으로 삼아 일본의 포퓰리즘은 이렇게 싹을 틔웠습니다.
   
저는 일본 국민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뜻밖의 이익은 마다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민초들의 가냘픈 인심을 이용하여 겉으로는 화려한 수사로써 본심을 감추고, 속으로는 정치적 욕심을 채우려는 위정자들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더구나 민주주의는 ‘표’를 먹고산다는 점이 저의 고민을 더합니다.
   
공공연한 매표(買票)행위에 맛을 들인 일본 정치권은 이제 본격적으로 나랏돈으로 생색낼 생각을 합니다. 바로 ‘정액급부금’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의 무차별 현금살포입니다. 2009년 3월, 자민당이 벌인 일입니다.
   
국민 1인당 1만2000엔씩 지급하고, 65세 이상과 18세 미만 국민에게는 여기에 8000엔을 더하여 2만엔을 현금으로 지급하였습니다. 심지어 복역 중인 죄수들에게까지 지급하였습니다. 소요된 재정은 무려 27조원에 달합니다. 서울시 예산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단지 표를 사기 위해 살포한 것입니다. 이때 일본의 장기채무잔고는 이미 GDP의 150%를 돌파하였습니다.
   
야당도 이에 질세라 더욱 대담하게 맞불을 놓습니다. 포퓰리즘에는 포퓰리즘으로 대항한 것이지요. 첫해에는 매달 15세 이하 자녀 1인당 1만3000엔, 집권 이듬해부터는 매달 2만6000엔을 양육수당으로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고 집권에 성공합니다. 공약대로 지급할 경우 소요액은 75조원에 달하는데, 이는 일본의 국방비보다도 많은 금액입니다. 집권 민주당이 야당 시절 벌인 일입니다. 이쯤 되면 아예 내놓고 돈봉투를 살포하며 표를 사가던 우리의 1960년대 수준보다 못합니다. 최소한 나랏돈은 아니었거든요. 참고로 선관위에서는 무상급식, 무상교복 등 법적근거가 없는 ‘무상 시리즈’ 공약은 공직선거법에 저촉된다고 유권해석을 내려둔 상태입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조례 통과를 강행한 것입니다.
   
이렇게 2009년에 치러진 포퓰리즘 선거를 거치며 일본의 장기채무잔고는 마침내 GDP의 170%를 돌파합니다. 서로 현금 나눠주기 경쟁에 골몰하다보니 당연히 국채를 마구 찍어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한술 더 떠서 민주당은 막상 집권하니까 힘에 부쳤는지, 매달 2만6000엔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공식적으로 철회하고 절반만 지급한다고 선언합니다.
   
포퓰리즘의 광풍이 일본을 휩쓴 지난 10여년간, 일본의 국가재정은 어땠을까요. 1997년에는 GDP와 엇비슷한 규모였던 장기채무잔고는 날로 늘어나, GDP의 200%에 도달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입니다. 지난 10여년간 무려 5000조원이 넘는 빚을 추가로 진 셈입니다. 이는 17년치 대한민국 예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물론 일본의 GDP 대비 장기채무잔고비율이 지난 10여년간 배(倍)로 증가한 것을 두고, 전적으로 현금 나눠주기식 포퓰리즘 탓으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2008년도 예산을 보면, 세출의 24.3%에 해당하는 약 276조원을 오로지 빚을 갚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매년 대한민국 1년치 예산에 육박하는 빚을 갚기 위해 또 엄청난 빚을 져야 하는 악순환에 빠진 것입니다. 자민당 정권 시절 소위 ‘건설·도로족(族)’ 의원들의 정경유착으로 무분별한 재정지출이 이루어진 것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입니다. 하지만 이미 막대한 부채를 껴안고도 국채잔고를 급속히 늘리면서까지 국민에게 현금을 살포했다는 점에서 정치권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일부 교수들은 “일본의 보통국채잔고 약 8800조원 가운데 95%가량은 일본인이 보유하고 있다. 미국처럼 외국에서 빌린 돈이 아니므로 아무 문제없다. 일본은 미국과 다르다”는 식으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소위 지식인들의 몰염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빚은 어린이들이 훗날 성장하여 납부하는 세금으로 갚아야 하는 피(血)와도 같은 돈입니다. 기성세대들은 어린이들에게 먼저 미안함을 느껴야 합니다. 지식인들은 어린이들에게 먼저 참회해야 합니다. 정치인들은 ‘우리가 지금 무엇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기보다 ‘우리 자녀들이 훗날 얼마를 갚아야 하는지’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고, 먼저 복지재정 지출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내야 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포퓰리즘의 단초를 없애기 위해 맞서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현금살포 정책의 행간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바로 ‘15세 이하 자녀’를 가진 가구를 목표로 한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15세 이하 자녀를 가진 부모’를 목표로 합니다. 일본 민주당이 집권한 지 1년이 지난 2010년 9월, 우리로 치자면 청와대 직속 싱크탱크에 해당하는 내각부(內閣府) 경제사회종합연구소조차 가계수입 시뮬레이션을 통해 무차별 현금살포의 최대 수혜계층은 저소득층이 아니라 바로 30~40대 유(有)자녀 중·고소득층이었다는 뼈아픈 진실을 실토했는데, 이 계층을 얻는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정치권의 상식입니다.
   
저소득층은 이미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갖가지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납세에 의한 공동체의 따뜻한 배려입니다. 서울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소득층에 대해서는 이미 무상급식비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차별적 현금살포를 할 경우에는 상황이 다릅니다. 저소득층의 경우 이미 받고 있는 상당 부분의 혜택이 상쇄되거나 오히려 줄어드는 데 반해, 중·고소득층은 기존에는 받을 수 없었던 돈봉투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격입니다. 과연 누가 이를 마다할까요? 나랏돈으로 부자들 저축시켜주는 셈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30~40대 표심을 붙잡는 것이 선거의 관건입니다. 이제 무슨 의미인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전면무상급식의 목표는 결코 손학규 대표께서 누누이 말씀하시는 ‘인격적 차별’이 없는 사회가 아닙니다. 전면무상급식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중학생 이하 자녀를 가진 부모님들의 ‘표’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머리가 더 좋습니다. 2009년 선거 때 일본 민주당이 내세웠던 선동구호가 바로 ‘콘크리트보다는 사람’이었습니다. 많이 닮지 않았습니까? 나랏돈으로 생색을 내면서 30~40대 표심을 공략하려는데, ‘자녀양육수당’으로 가자니 일본 따라하는 티가 너무 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전면무상급식입니다. 게다가 ‘아이들 밥 좀 먹이자는데 뭐가 문제냐’고 선동하며 따뜻한 이미지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는 정책으로 내년 선거를 치르겠다는 손학규 대표의 말씀은 무차별 복지 포퓰리즘의 전면 등장을 예고하는 정치적 수사의 극치입니다.
   
저소득층을 위한다는 명목은 달콤한 선동일 뿐, 실상은 전혀 다르다는 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정말로 취약한 저소득층에 보다 많은 혜택과 사회적 배려가 돌아가게 하려면 소득제한에 따른 선별적 복지를 해야만 합니다. 무차별적 복지는 평등이라는 좋은 의도와는 달리 전혀 다른 정책효과, 즉 불평등의 조장과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할 뿐입니다.
   
전면무상급식은 이러한 일련의 현금 나눠주기식 공짜 시리즈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일찍이 노나카 히로무는 공짜 상품권이 ‘천하의 우책(愚策)’임을 간파했지만, 그는 현실과 타협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장차 재정을 파탄으로 몰아 가고 훗날 어린이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줄 공짜 시리즈의 시작인 줄 알았다면 타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사회적 약자에게는 더없이 자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남은 10년은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앞으로 10년간 생산·소비 가능인구가 정점을 이루다가 2020년경부터 급속히 하강하게 됩니다. 남은 10년 동안 우리 기성세대가 조금 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생산적인 재정투자에 매진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손들은 나라 빚을 갚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식 정치실험을 할 이유도, 할 여유도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통일에 따른 막대한 재정지출도 고려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 복지재정지출의 대원칙을 세워야만 국가의 장래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지킬 수 있습니다.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십시오, 다음 선거를 위해 저들이 어떤 정책을 들고 나오는지를. 오직 깨어있는 국민만이 선진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에 우리 한민족 전체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포퓰리즘 선동정치의 예고된 장애물을 뛰어넘어, 우리 다함께 진정한 선진국을 향해 달려갑시다!
   
아직은 뛰어야 할 때입니다. 
 
서울시장 오세훈 올림

全文 출처: <주간조선> 2011년 1월 10일(21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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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납북희생자 기억의 날
"그들이 대한민국을 함께 세웠습니다"


납북

납북 희생자 가족 등 '기억의 날' 행사 참석자들이 차례로 헌화하고 있다. ⓒ김정우


"납치·연좌제·망각 3중범죄의 피해자… 그들이 대한민국을 함께 세웠습니다."

제2회 '6·25납북희생자 기억의 날'이 27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족회) 주최로 열렸다.

KBS 김동건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엔 납북자 가족을 비롯해 김태훈 북한인권특별위원회 위원장, 김천식 통일부 정책실장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미일 가족회 이사장은 "(납북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책무"라며 "오늘의 번영을 이룬 대한민국이 납북피해의 진실을 밝히고 해결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현병철 국가인권위 위원장은 격려사를 통해 "문명사회에서 납치는 가장 극악한 반인륜적 범죄"라며 "국가의 자국민에 대한 보호의무 이행 책임은 그 어떤 사유로도 면책되거나 지체돼선 안 된다"고 했다.

소프라노 김호정, 색소폰 연주가 이인수, 앙상블 소아베 등의 축하공연이 열렸고, 김성호 가족회 명예이사장은 납북 문인 김동환의 삼남 김영식씨가 지은 시 '아버지'를 낭송했다.

행사 후 가족회는 납북자 가족 30여명을 대상으로 유전자 채취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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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北, 韓·日 납치자들 집단이주시켜
“김정은 특별지시로 납북자들 평원으로 비밀이송… 다구치는 위독”

⊙ “평양 각지에 흩어져 있던 韓·日 납북자 및 가족 대부분 평남 평원의 특별구역으로 집결”
⊙ “김정은 산하 외국인특별관리조가 주도… 현재 완전통제”
⊙ “다구치 야에코는 중앙당간부병원에 입원치료… 현재 위독”
⊙ “北, 對南·對日 협상에 이용하기 위해 北送 재일교포·납북자·국군포로 대상 특별강습 中”
⊙ “1969년 KAL기 납치자 등은 간첩 이남화 교육 교관으로 활동”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평양 만경대구역과 용성구역 등에 살던 한국과 일본의 납북자 중 대다수가 평양 순안구역 인근 특수 지역으로 강제 이송돼 김정은의 특별관리를 받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최성용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최성용(崔成龍)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는 “일본인 납북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1979년 노르웨이에서 끌려간 전 수도여고 교사 고상문, 고교생 납북자 김영남(1978년 납북), 이민교(1977년 납북), 홍건표(1978년 납북) 등과 그 가족이 평안남도 평원군 원화리(순안공항 인근)로 옮겨져 특별관리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최 대표에 따르면, 다구치와 고상문 가족은 평양 만경대구역 축전동 아파트 등에, 김영남 등 고교생 납북자들은 평양 용성구역 동북리 인근에 최근까지 살다가 지난 5월 중순 대다수 거처를 옮겼다. 현재 평원 원화리 거주지는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 특별구역이다. 그는 “다구치가 현재 병으로 ‘중앙당간부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전했다. 최 대표의 증언 내용이다.
 
  ―다구치는 현재 어떤 상태인가.
 
  “입원을 했는데, 위독하다고 들었다.”
 
  ―병명은 무엇인가.
 
  “모른다. 병명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나, 심각한 상태임은 확실하다.”
 
  ―언제 입원했나.
 
  “날짜는 모르지만 최근이다. 원래 몸이 안 좋아 병원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번에 입원했다.”
 
  ―어느 루트로 나온 정보인가.
 
  “지난 6월 말 북한 내 정보원으로부터 받았다. 평양에서 외교 관련 임무를 맡은 자로, 해외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준(準)고위급 인사다. 보안상 추가 신원은 밝힐 수 없다.”
 
  ―믿을 만한 정보원인가.
 
  “그는 5년 전 요코다 메구미(1977년 납북)의 남편이 김영남이란 사실을 전해 온 주인공이다. 당시 《월간조선》이 이를 특종 보도한 바 있다.”
 
  《월간조선》은 2006년 2월호에서 “납북 일본인 요코다 메구미의 남편 김철준은 1978년 납북된 고등학생 홍건표·김영남 중 한 명”이라고 단독 보도했고, 최성용 대표는 고교생 납북자 가족들의 혈액과 모발을 채취해 한·일 양국 정부에 “일본 정부가 확보한 김혜경(김은경·메구미의 딸)의 DNA와 비교해 달라”는 공식문서를 보냈다.

 

납북자

평안남도 평원군 원화리 특별구역으로 추정되는 곳의 위성사진. 최성용 대표에 따르면, 북한은 최근 김정은의 지시로 만경대구역과 용성구역에 있던 한·일 납북자 대다수를 원화리 특별구역으로 이송했다.


  “승인자만 출입 가능한 특별통제구역”
 
  당시 한국 정부와 언론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일본 정부는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기사 보도 직후 일본 정부는 최 대표에게 납북자 가족들의 신원과 주소를 알려 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2월 방한(訪韓)한 관계자들은 김영남의 어머니 최계월씨 등 가족들의 혈액과 모발을 채취, 냉동 박스에 담아 일본으로 가져갔다.
 
  당시 최 대표는 일본 외무성 관계자들과 혈액·모발 채취작업을 하던 중 “메구미의 남편인 김철준은 김영남이 확실하다”란 이야기를 들어 《월간조선》에 알려줬다. 《월간조선》은 2006년 3월호를 통해 이를 확정 보도했다.
 
  4월 11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관방장관은 “메구미 씨의 딸 김혜경 양과 김영남씨 가족의 DNA를 감정한 결과 두 사람이 혈연관계일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했다. 국내 언론들은 이를 두고 “일본 정부가 4년간 남·북을 오가며 DNA를 추적했다”고 뒤늦게 보도했지만, 사실상 오보(誤報)였다.
 
  ―메구미 쪽 소식을 들은 것도 있나.
 
  “현재 김영남-메구미의 딸 김은경은 대학 졸업 후 김정은 사단에 들어갔다.”
 
  ―김정은 사단이라면 군대를 말하나.
 
  “그렇게만 들었다. 군대인지 기관인지, 무슨 조직인지는 알 수 없다.”
 
  ―집결지 원화리는 어떤 곳인가.
 
  “정확한 주소는 평안남도 평원군 원화리다. 평양과의 경계지역으로 순안비행장이 있는 순안구역과 가깝다고 들었다. 인근 농장은 1952년 김일성이 모를 심은 곳으로, 매년 북한의 첫 모내기가 이뤄지는 곳이다. 현재 원화리 특별통제구역엔 일반인은 드나들 수 없고, 승인된 자만 출입이 가능하다. 타 지역보다 보안수준이 훨씬 까다롭다. 정보원은 북한의 해상침투 훈련이 이곳에서 이뤄졌으며, 천안함 폭침(爆沈)과도 연관이 깊은 곳이라고 확신했다.”
 
 
  “KAL기 납치자도 함께 있다”
 
  최 대표는 “1990년대 초에 납치된 한국인 2명(회사원으로 추정), 1969년 KAL기 납치 사건 미귀환자 일부도 간첩 이남화(以南化) 교육의 교관으로 원화리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KAL기 납치사건은 1969년 12월 11일 강릉발(發) 서울행(行) 대한항공 쌍발여객기를 북한 고정간첩 조창희가 대관령 상공에서 납치해 함경남도 원산 인근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시킨 사건이다. 사건 발생 66일 후 납치된 51명 중 승객 39명은 귀환했지만, 승무원 5명과 승객 7명 등 12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정보원은 어떻게 그곳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있나.
 
  “직접 다녀온 것으로 안다.”
 
  ―이번 이송은 누구의 지시인가.
 
  “김정은의 지시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
 
  “정보원에 따르면, 이번 일은 김정은 산하 외국인특별관리조를 만들었다. 북송(北送) 재일교포, 납북자, 국군포로 등을 관리하는 곳으로 인민보안성(경찰청) 외사과와 감시를 강화하고 있다.”
 
  ―납북자를 이송시킨 이유가 뭔가.
 
  “첫 번째는 대남(對南) 및 대일(對日) 협상에 이용하기 위해서다. 두 번째는 최근 미국 북한인권위원회가 외국인 납치자 거주지를 찍은 인공위성 사진을 언론에 공개했다. 납북자 거주 정보가 샅샅이 공개된 것에 대한 부담도 컸을 것이다.”
 
 
  “日 기관의 정보 非공개 요청”
 
  지난 5월 12일, 미국의 비정부기구(NGO)인 북한인권위원회는 한·일 납북자와 일본 항공기 요도호(淀號)를 납치한 적군파(赤軍派) 요원 등이 거주하는 곳이라며 평양 용성구역 동북리 초대소 일대와 대동강변 ‘일본혁명마을’ 등의 모습을 담은 인공위성 사진을 공개했다.
 
  최 대표는 지난해 7월 자신이 공개한 평양 만경대구역 납북자 거주 위치를 비롯해 최근 세계 각국에서 납북에 대한 비판 여론이 다시 제기되는 것에 대해 북한 정권이 부담을 느낀 것으로 판단했다.
 
  최 대표는 “일본인 납북자 다구치와 고상문 등은 최근까지 만경대구역의 같은 아파트에 산 것으로 확인됐으며, 평양 대성백화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 왔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건강이 좋지 않을 땐 주로 인근의 조선적십자병원에서 진료를 받았으며, 원화리에 있는 중앙당간부병원도 함께 이용했다고 한다.
 
  최 대표는 2010년 말 한·일 정보당국 관계자 10여 명을 서울 한 호텔에서 만나 양국 납북자의 근황에 대해 약 4시간 동안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고 했다. 당시 “다구치 씨는 최근까지 생존해 있으며, 평양 만경대구역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등의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고, 가급적 보안을 유지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1~2달 후 관련 내용이 일본 《교도통신》에 의해 보도됐다. 최 대표의 말이다.
 
  “당시만 해도 추가로 확인할 필요가 있어 보안에 각별히 유의해 달라고 했는데, 일본 측에서 정보가 샌 것으로 보인다. 갑자기 《교도통신》을 통해 기사화가 됐는데, 대부분 내가 이미 한 얘기들이었다.”
 
  ―다른 쪽에서 정보가 유출됐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전혀. 일본 측에서 나온 정보가 맞다.”
 
  ―이번에 입수한 납북자 이송 정보도 양국에 알렸나.
 
  “6월 말에 입수해 곧바로 양국 관련기관에 보냈다. 자체 조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국 기관에선 일언반구 얘기가 없다. 일본 측에선 이 일을 가급적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하더라. 아마 일본 민주당이 민감하게 여기는 것 같다. 그들은 다음 선거 때까진 시끄러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분위기였다.”
 
 
  “한나라당 때문에 울화통 터진다”
 
  ―그럼에도 이 사안을 《월간조선》에 공개하는 이유는 뭔가.
 
  “한국 정치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가장 큰 문제다. 얼마 전 김대중(金大中) 정부의 6·15 공동선언에 대해 지지하는 한나라당 의원이 있다고 들었다. 비전향장기수 63명을 북송한, ‘적화통일’ 선언을 한나라당 의원이 지지하는 게 말이 되나. 국군포로와 납북자는 생사 확인도 못했다. 한나라당 의원 개개인의 이러한 행태는 다음 총선·대선 때까지 두고두고 기억해 두겠다.”
 
  최근 북한민주화위원회(위원장 홍순경)가 실시한 ‘6·15공동선언에 대한 국회의원 의견조사’에 따르면, 한나라당 의원 170명 중 심재철·정몽준 의원 2명만 반대 의사를 밝혔다. 친박(親朴)계 홍사덕 의원은 찬성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위원회는 지난 5~6월 전화, 팩스 등을 이용해 최대 4차례 조사를 진행했으나, 대부분 ‘현재 검토 중’ ‘무응답 처리’ ‘설문응답 안 함’ ‘답변 없음’ 등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번 조사가 한나라당의 입장을 100% 반영했다고 보긴 어렵겠죠. 하지만 여당 의원 대부분이 6·15선언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책임하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DJ를 계승한 민주당이 선언을 지지하는 건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아닙니다. 비전향장기수를 북송한 지 어느새 11년째입니다. 현(現) 정부와 여당은 지금까지 뭘 했나요. 한나라당 때문에 울화통이 터집니다.”
 
  《월간조선》은 최 대표의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원화리 지역을 찾아봤다. ‘구글어스’를 통해 검색한 결과 평양 순안비행장 옆 작은 구역이 나왔다. 다른 지역에 비해 가지런히 지어진 건물, 대형 시설물, 기념비 등으로 볼 때 원화리 특별구역으로 추정된다. 최 대표는 위성사진에 대해 “추가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북한 내부 정보원의 설명과 상당히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면서 “확실한 위치와 정보에 대한 조사는 결국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한다”고 했다.⊙

기사 全文 보기 : 월간조선 2011년 8월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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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 ‘金正日의 아킬레스腱’ 3人의 결정적 증언
김현희 “北 공작원 되자 담뱃재로 얼굴 점까지 빼버렸다”

⊙ 좌파세력의 ‘김현희 가짜’ 의혹 해소한 39년 전 사진… 거짓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 하기와라, “북한에 죽을 수 있다”며 공개 거부한 요미우리 기자 1년간 설득
⊙ 北 매체들, 南 대표단의 ‘억지’ 혁명박물관 방문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근거해 “감격해 울었다”고
    허위보도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김현희

김현희 씨.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KAL 858기 폭파범,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대변인, 일본 공산당 기관지 평양 특파원. 1972년 우연한 스침 한 번으로 세 사람의 연(緣)은 영영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테러와 왜곡으로 흘러간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들의 인연을 끈질기게 옭아맸다. 그 기구한 운명들이 39년 만에 역사적 만남을 가진 목적은 ‘진실의 회복’ 단 하나였다.
 
  지난 7월 12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김현희(金賢姬·49), 이동복(李東馥·74), 하기와라 료(萩原遼·74)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가 1972년 11월 남북조절위 남측 대표단 일행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10살 소녀 김현희는 꽃다발을 전해 주기 위해 평양 중화구역 공터에 갔다. 한복을 입고 줄을 선 김현희를 《아카하타(赤旗)》의 하기와라가 촬영했고, 도착한 헬기에서 내린 이동복에게 꽃다발을 건넨 이는 김현희였다.
 
  1987년 11월 KAL 858기 폭파 후 검거된 김씨는 당시 상황을 진술했고, 안기부는 엉뚱한 사진을 확인시킨 후 1988년 1월 수사결과 발표 때 공개했다. 장기영 대표가 북한을 떠나던 날 찍힌 흐릿한 사진으로, 김씨는 당시 행사에 참가하지 않았다.
 
  하기와라 씨는 안기부 발표를 본 후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다는 기억을 되살려 사진을 찾아냈다. 안기부가 지목한 소녀를 골라내 공산당 잡지 《그래프 곤니치와》에 ‘김현희인 듯한 소녀’란 제목으로 공개했다. 북한은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통해 “당시 지목된 소녀는 김현희가 아닌 정희선”이라며 화동의 귀 모양을 근거로 공세를 취해 왔다. 하기와라 씨는 추가로 사진을 공개했고, 북한도 반박 자료로 사진을 냈다. 이때 하기와라 씨의 사진엔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진짜 김현희’의 사진이 등장했다. 하기와라 씨는 지루한 ‘조작 공방’에 쐐기를 박았다.
 
  ‘다 끝난 논쟁’은 노무현 정권 이후 다시 등장했다. ‘소설가’, ‘변호사’, ‘과거사위원회’, ‘사제단’ 등 간판을 앞세운 이들이 국정원 내부자료를 근거로 “김현희는 가짜”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KBS, MBC, SBS 등 방송 3사도 다큐멘터리를 통해 해묵은 의혹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MBC 취재진은 보안사항인 김현희씨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인터뷰를 시도했고, 내용을 그대로 방송에 내보냈다. 김씨는 5년 동안 피난생활을 하다 이동복 대표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고, 이를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가 《월간조선》에 전문을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명백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허위 의혹 제기에 대해 사과한 이는 현재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번 ‘39년 만의 만남’이 성사된 데는 조갑제 대표의 역할이 컸다. 그는 “세 사람이 사진을 매개로 만나 세상에 알려진 후 오늘의 이 만남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4명의 이날 대화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 사실로 밝혀졌다.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다.
 
지난 7월 12일, 39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김현희씨, 하기와라 료 전 《아카하타》 평양 특파원,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왼쪽부터).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본인의 오보 증명 위해 1년간 설득
 
  하기와라(이하 하): “오늘 긴장해서 안정제까지 먹었다. 공식적으로 후세에 남는 기록이니까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말하겠다. 당시 안기부 수사발표 이후 조총련이 선전작업을 많이 했다.”
 
  김현희(이하 김): “어릴 때 다른 행사에도 많이 참석했지만, 남한에서 온다고 해 모의 질의응답 훈련 등 교육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가 외교관인데, 남한 사람이 물으면 ‘서평양역 선로공의 딸’이라고 대답하라고 했다. 다 그런 식이다. 그때 인사를 하고 넥타이를 매어 줬는데, 바로 이분(이동복)이었다. 그땐 누군지도 몰랐다.”
 
  이동복(이하 이): “당시 이후락(李厚洛) 공동위원장(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대변인이었다. 그래서 항상 옆에서 같이 움직였다. 장기영, 최규하, 강인덕 등 인사들이 함께 있었는데, 그들과 상관없이 이후락 부장과 같이 있었다. 헬기에서 내릴 때도 부축하다시피 했다. 마중 나온 소녀가 예뻐서 ‘꽃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적대적인 시선으로 ‘조선사람이 조선 꽃도 모르느냐’고 했다. 이 해프닝이 기억에 남아 서울에 돌아온 후 여러 강연에서 소개했다. 그 후 김현희씨가 잡혀 와 ‘장기영씨에게 꽃을 줬다’고 했는데, 속으로 ‘그게 아니라 난데’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신문과 방송에 가짜라고 나오기에 직접 전화해 ‘장기영이 아니라 내가 김현희의 꽃을 받았다’고 설명했고, 기사로 나왔다. 안기부에서 김씨를 처음 만나 얘기했더니, ‘아, 그렇군요’ 하더라.”
 
  김: “대화 내용이 평생 비밀이었다. 선생님에게도 숨기고 지나갔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더라. 처음 한국에 와서 수사관들이 (엉뚱한) 사진을 내밀었는데, 워낙 경황이 없는데다 비슷해 보여서 그냥 맞다고 했다.”
 
  조갑제(이하 조): “결정적 사진이 나오게 된 배경을 설명해 달라.”
 
  하: “조총련이 오보를 막는 역할을 했다. 공개하고 얼마 후 《요미우리(讀賣)신문》 기자가 찾아와 ‘하기와라 당신이 틀렸다’고 했다. 물론 제목엔 ‘김현희인 듯한’이라고 썼지만, 기자로서 굉장히 창피했다. 추가 사진을 공개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요미우리 기자가 ‘북한이 자기를 죽일 수 있다’며 반대했다. 1년간 설득해 겨우 책으로 공개했다. 2003년부터 또 김현희씨가 (가짜 논란으로) 고생한단 얘길 듣고 요미우리 기자에게 사진이 더 있느냐고 물었다. 수개월 동안 자료집을 찾았는데 컬러 사진이 나왔다. 논란이 된 귀까지 보여 2004년 1월 4일자 《주간 요미우리》에 발표했다.”
 
  조: “그때 법인류학 전공의 도쿄치과대학의 하시모토(橋本正次) 조교수가 ‘소녀와 김현희는 동일인이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지 의심 들 정도”
 
  김: “입술 옆 종기 얘기가 함께 나왔는데, 어릴 땐 종기가 아니라 조금 튀어나온 점이었다. 공작원이 되니 ‘표적이 될 수 있다’(얼굴에 특징이 없어야 한다)며 빼버렸다. 당시 수술 시설이 없어 담뱃재를 붙여 뜸 뜨듯이 떼어버렸다. 그래서 자국이 남았다. 무슨 놈의 팔자가 귀와 이것(입술 점) 때문에….
 
  노무현 정부 들어서자마자 귀 사진이 부각됐다. ‘귀가 다르기 때문에 김현희는 가짜고, 김현희가 가짜이기 때문에 KAL기 사건은 조작’이라는 논리였다. 방송사들은 사진 몇 장 중 틀린 사진만 계속 보여주다 끝에 잠깐 정확한 사진을 보여줬다. 나도 그 방송을 보니 가짜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시 ‘안기부 발표는 대국민 사기극’이었다고 주장한 《KAL 858, 무너진 수사발표》란 책을 보면, (책을 들어 보이며) 표지에도 이렇게 내 사진이 나온다. 뻔히 사진을 올려놓고 교묘하게, 헛갈리게 하는 책이다. 지금도 사과나 처벌은커녕 활개를 치는 그들을 보면, 대한민국이 정말 법이 살아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처음으로 용기 있게 사진을 공개해 준 하기와라 씨껜 정말 감사드린다. 사실 그동안 많이 어려웠다. 2003년 가짜로 몰려 집까지 노출돼 어린 아기 업고 피난살이 나와 지금까지 못 들어가고 있다.”
 
  하: “저도 감사드린다.”
 
  조: “김현희씨는 사건의 주인공, 하기와라 씨와 이동복 대표는 조연으로 나름의 역할을 했고, 나는 기자로서 기사를 썼다. 24년 전 KAL기 폭파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재조사 얘기가 나오기에 연락을 시도했는데 안됐다. 그러던 중 2008년 김씨가 장문의 편지를 써서 이 대표에게 전달했다. 이 대표는 내게 보냈고, 모든 사실이 확인돼 《월간조선》에 썼다. 그리고 다음해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 납북 일본인 다구치 야에코 가족과 부산에서 만났다.”
 
  김: “처음에 하기와라 씨가 잘못 지목한 정희선이 나와서 내가 거짓이라며 나머지 소녀의 이름을 댔는데, 나를 ‘김송희’라고 했다. ‘거짓을 밝히러’ 나와서 거짓말을 한 셈이다. 북한이 정희선에게 시킨 것 같다. 참고로 남측 대표단이 돌아갈 땐, 난 나가지도 않았다.”
 
  조: “서로 만난 적이 있나.”
 
  김: “《아카하타》와는 결혼하기 전 한국에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기자가 누구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하: “KAL기 사건 직후 출판사에서 ‘김현희씨와 공동으로 책을 집필하면 유명인사가 될 것’이라는 제의가 왔는데, 유명해지는 것보단 진실을 밝히는 게 우선이었다. 또 요청을 한다 해도 안 받아들여질 것 같았다.”
 
  김: “하기와라 씨는 북한에 1년 산 것으로 안다. 느낀 점이 많았을 것 같다. 거짓말 시키고, 서로 감시하고. 외부에서 손님 오면 국가에 손해가 가지 않게 일부러 깨끗한 것 입고 그런다. 그게 북한이다. 나도 그런 생활에 젖어 살았다.”
 
 
  ‘역사적 장면’
 
  이: “당시 방북 일정 중 북측에서 우리를 혁명박물관에 데려갔다. 김일성(金日成) 조부(祖父) 때부터 100여 개의 방을 꾸며 놨는데 모두 가기 싫어했다. 하지만 북측 안내사항을 따른다는 조건이 있어 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주요 신문이 ‘남조선 적십자대표단 성원들 혁명박물관 돌아보고 감격해 울다’라고 썼다. 기사에 따르면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어느 대표는 그림 앞에서 ‘내가 살아생전 이런 성지에 오다니…’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바로 북측 대표단에 항의했더니, ‘이 신문들은 공화국 인민들 보라고 만든 신문인데, 왜 남조선 사람들이 시비냐’며 ‘사실과 상관없이 인민들을 사상적으로 올바르게 교육하는 것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보도’라고 했다. 하기와라 씨가 마지막으로 평양에 간 것은 언제였나.”
 
  하: “1980년도다. 김영남이 공항에 마중을 나와,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나눴다. 김영남의 손이 떨렸는데, 아마 만감이 교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 “하기와라 씨가 찍은 사진이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은 KAL기 폭파사건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비행기를 폭파시켰는데, 김현희씨가 바레인에서 앰풀을 깨물고 자살하려다 간발의 차이로 실패했다. 그 후 김정일을 고발하는 증인이 됐고,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다. 일본에선 이은혜(다구치 야에코·김현희의 일본어 교사)로 인해 납치자 문제가 제기됐다. 김정일 입장에선 증거 말살(살해)이 어려우니, 종북세력을 동원해 좌파정권과 국정원까지 나서게 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는 데 이 사진이 큰 역할을 했다. 기자가 자신의 오보를 증명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여전히 종북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김현희씨를 괴롭힌 사람들이 건재하다. 그런 면에서 이 만남은 역사적 장면이다.”
 
  이: “김현희씨는 남한에 온 후 언제 처음으로 북한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나.”
 
  김: “여러 요인이 있었다. 북한에서 6·25전쟁에 대해 배울 때 ‘일요일에 침공했다’는 내용을 보고 ‘북침’에 대해 의심이 갔다. 하지만 북한은 의심 자체가 허용이 안되는 곳이다. 조지 오웰(Orwell)의 《1984》에 등장하는 국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남한에 와서 조사받을 때, 야경도 보고 명동에도 가 봤다. 너무나 자유롭고 삶의 의욕이 넘치는 다른 세상이었다. 어릴 때 외국을 많이 다녔지만, 다른 민족이라 감동을 못 받았다. 하지만 한국은 달랐다.”
 
 
  “북한, 종착역에 왔다”
 
  조: “1989년 봄 안기부 안가에서 인터뷰할 때 김현희씨는 이런 말을 했다. ‘북한에선 히즈 스토리(His Story)를 가르치는데 남한에 와 보니 히스토리(History)를 가르친다’고. 남한에 와서 역사를 배운 셈이다.”
 
  이: “북한이 거의 종착역에 왔다고 생각한다. 폭동 진압 부대를 만든다는 것은 북한 정권의 종말을 스스로 인정하는 행태다. 중국은 북한의 변화에 일조하리라 본다. 김정일이 2000년 이래 7차례 방중(訪中)했다. 특히 2004년부터 빈도가 잦았다. 양측의 발표 내용을 살펴보면,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항상 북한의 개혁·개방과 핵 문제에 대한 성의 있는 조치를 요구한다. 매번 똑같다. 김정일은 굉장히 지능적으로 오리발을 내민다.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하고선 엉뚱한 짓을 했다. 중국 측 얘기를 주의 깊게 보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개혁·개방’이란 말을 쓰지 않고 완곡하게 표현했는데, 작년부턴 아예 개혁·개방 강의를 한다. 이제 변화의 시기가 왔다. 하기와라 씨도 한반도 문제를 긍정적 방향으로 이끄는 역할을 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길 바란다.”
 
  김: “나도 그전부터 (하기와라 씨를) 뵙고 싶었는데, 인연이다. 39년 전엔 서로 모르고 만났지만, 용기 잃지 않고 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조: “하기와라 씨는 명언을 많이 남겼다. 특히 김정일은 공산주의자의 진정한 적(敵)이자, 눈사람’이라고 했다. 눈사람은 집안에서 난로를 피운 주인이 들어와서 불을 쬐라 해도 들어올 수 없다. 난로는 개방과 진실로 볼 수 있다. 여기 모인 세 분은 김정일이란 눈사람을 녹이는 데 큰 역할을 할 사람들이다.”⊙

기사 全文 보기 : 월간조선 2011년 8월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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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 북한發 東海 표기 소동… 무지한 일부 언론과, 무관심한 국민의 합작품

⊙ 북한發 팩스 한 통에 요동친 국내 여론… “이명박이 병기(倂記) 제의”
⊙ 민노당, 20년 추진해 온 ‘동해 병기’ 정부 정책 두고 “즉시 철회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라”
⊙ 엉뚱한 지도를 “조선해 표기 日 最古 지도” 보도한 언론들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동해 일본해

동해와 일본해를 대등하게 표시하고 있는 내셔널지오그래픽 지도 서비스. 2000년까지 ‘일본해’로 단독 표기해 오던 내셔널지오그래픽은 민간단체 반크의 항의로 2001년 일본해 뒤 괄호 안에 동해를 넣어 표기해 왔고, 9년 후인 2010년 5월 대등한 표시를 한 것이 확인됐다



지난 4월 27일, 서울 서대문구의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정재정) 사무실에 팩스 문서 한 장이 도착했다. 발신자는 북한 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소장 조희승)로, “동해 표기와 관련해 남북 역사학자들이 공동으로 대처하자”는 내용이었다.
 
  ‘북한발(發) 팩스 한 통’은 이틀 후인 29일 기사화돼 국민에게 알려졌다. 이를 보도한 《연합뉴스》는 다음 날 “정부, 국제기구에 ‘동해·일본해 병기’ 의견”이란 후속 기사를 통해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전하며 “북한은 단독표기 견해를 밝힐 가능성이 크다”는 ‘외교소식통들’의 말을 함께 인용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동북아역사재단 관계자는 본지 인터뷰에서 “북한도 예전부터 동해·일본해 병기를 주장해 왔으며, 이번에도 같은 의견을 제출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허위사실 난립한 인터넷 댓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한국은 ‘동해·일본해 병기’, 북한은 ‘동해 단독표기’”란 구도가 조성되자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해당 기사는 국제수로기구(IHO)의 1929년 이후 3차례 표기규정 과정과 한국 정부가 1992년부터 병기를 추진했다는 내용을 덧붙였지만, 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 주요 포털사이트에선 “이명박 정부가 동해를 일본에 넘겨주려 한다”는 내용의 댓글들이 줄을 이었다.
 
  다음(Daum) 아고라 게시판에선 “이명박이 병기를 제의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교과서에도 일본해를 병기해야 한다”는 글이 큰 호응을 얻었고, “‘동해·일본해 병기’ 취소하고 ‘한국(동)해’로 변경해 달라”는 청원에 3500명 이상이 서명했다. 일부 인터넷 매체는 “인터넷 뒤집어져” “네티즌 반발” “누구 맘대로?” 등을 기사 제목으로 써 논란을 키웠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도 정부 방침을 비판하는 글들이 빠르게 전파됐다.
 
  한 포털에선 “노무현 대통령이 동해를 ‘한국해’로 부르길 제안했을 때 ‘매국노들’이 매도했었다”는 허위 사실을 쓴 댓글이 1000개가 넘는 추천을 받았다. 노 전(前) 대통령은 2006년 한·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에게 ‘평화의 바다’ 같은 제3의 명칭을 제안해 여론의 질타를 받은 바 있다. 당시 아베 총리는 제안을 즉석에서 거절했다.
 
  5월 1일 정부는 “동해·일본해 병기는 1차 전략이고, 대다수 국제지도가 일본해를 단독으로 표기하는 상황에서 병행 표기가 많아진 후 단독 표기를 추진할 방침”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민주노동당은 “국제기구에 동해·일본해 병기 요청한 이명박 정부, 제 정신인가”란 제목의 대변인 논평을 통해 “지구상에 자기 나라 영토와 영해를 다른 나라와 병기해 달라고 국제기구에 의견을 제출하는 정부가 또 있는지 묻고 싶다”며 “사실상 독도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본해 병기 의견을 즉시 철회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기 바란다”고 비난했다.
 
  민노당 학생위원회는 서울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열고 “우리의 바다를 당당히 우리의 것이라고도 주장하지 못하는 정부는 도대체 어느 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부인지 모르겠다”며 정부를 규탄했다. 이를 보도한 인터넷 매체는 “정부가 동해와 일본해 표기를 병행하자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권리를 정부가 앞장서서 포기하는 심각한 사건”이라고 덧붙였다.
 
 
 
G8 지도 중 절반 이상이 동해 병기
 
국제수로기구(IHO)가 1953년 발간한 《해양과 바다의 한계》 제3판. 동해를 ‘일본해(Japan Sea)’로 표기했다.
  ‘동해·일본해 병기’는 1992년부터 추진해 온 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당시 대다수 외국 지도가 일본해로 표기하는 상황에서 동해를 되찾기 위해 선택한 ‘현실적 대안’이었다. 2000년 일본 외무성이 60개국 지도를 조사한 결과 2.8%만이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했다고 한다. 외교통상부, 국립해양조사원, 국토지리정보원, 동북아역사재단 등 동해 표기 관련 기관 모두 동해 단독 표기가 아닌 동해 병기 확산을 위해 주력해 왔다.
 
  학계와 언론계 인사가 주축이 돼 학제적 연구를 진행해 온 사단법인 동해연구회도 일본 학자들의 ‘일본해 단독 표기’ 주장에 연구 논문으로 맞서 왔다. IHO 및 UN지명전문가회의 워킹그룹(실무협의) 회의와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해 역사, 지리, 해양사, 국제법 등 전문분야에서 동해 병기의 정당성을 학문적으로 이끌어 냈다.
 
  독도와 동해를 세계에 알리는 대표적 민간단체인 반크(VANK) 역시 동해 단독 표기보다는 동해·일본해 병기를 꾸준히 추진해 많은 성과를 이뤄 냈다. “두 국가 이상 공유하는 지역에서 명칭 단일화가 이뤄지지 못할 경우 관련국 간 합의 전까지 각 명칭을 병기토록 한다”는 UN지명회의의 권고가 병기를 추진하게 된 이유다.
 
  정부와 민간단체의 노력 덕분에 2005년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한 민간 지도는 2.8%에서 18.1%까지 늘었고(일본 외무성 조사), 2007년 한국 외교부의 조사 결과 23.8%의 지도가 동해·일본해를 병기한 것으로 조사됐다. 2009년엔 28%까지 늘었다.
 
  특히 2007년 조사 당시 G8(주요 8개국) 중 일본을 제외한 7개국의 민간 지도를 조사한 결과 50.4%가 동해·일본해를 병기했다. 동북아역사재단 장동희(張東熙) 국제표기명칭대사는 “한·일 양국의 정부기관과 민간단체들이 세계 각국의 지도 중 하나라도 더 동해를 표기(한국) 또는 삭제(일본)하기 위해 물밑 교섭을 벌이고 있다”며 “전 세계 지도 제작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G8 국가의 지도 중 과반수가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한 것은 큰 성과”라고 밝혔다.
 
  독도와 달리 동해는 국제법과 관련이 없다. IHO도 세계 각국에서 발행하는 해도(海圖) 등의 통일성과 회원국 간 수로 정보를 신속하게 교환하기 위해 출범한 기구다. 82개 회원국의 의결을 통해 해양과 바다의 이름을 명명하지만, 회원국에 대해 강제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명 표기 문제를 다루는 UN 지명회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영향력이 큰 지도제작사와 언론 대부분이 IHO와 UN 지명회의의 결의안을 따른다. 한국이 IHO 사무국과 회원국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홍보활동을 해야 하는 이유다. 특히 IHO가 발간하는 《해양과 바다의 한계》(S-23)가 동해를 ‘일본해(Japan Sea)’라고 80여 년 전부터 명기해 일본해가 ‘사실상 국제 표준 수로명’일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항해 안전을 위해 개최된 국제수로회의를 전신으로 하는 IHO는 1929년 《해양과 바다의 한계》 초판을 펴냈다. 두 차례 개정판 모두 ‘일본해’ 표기는 그대로 유지됐다. 초판과 제2판(1937년)이 발간됐을 때 한국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상태였고, 제3판은 6·25전쟁 직후인 1953년에 발간됐다. 동해 표기의 정당성을 주장할 기회 자체가 없던 상황이었다. 한국이 IHO에 가입한 시기는 1957년, 북한은 1987년이다.
 
 
  조선해 표기 일본 ‘最古’ 지도 소동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6년 11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한ㆍ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에게 ‘평화의 바다’같은 제3의 명칭을 제안했다 거절당해 여론의 질타를 받은 바 있다.
  1977년 제11차 IHO 총회에서 제3판을 개정해 제4판을 발간하기로 의결하고 30년이 흘렀지만, 회원국의 이해가 달라 성공하지 못했다. 2002년 8월 《해양과 바다의 경계와 명칭》으로 제목을 바꾼 제4판 개정안이 배포되면서 IHO는 동해해역을 백지상태로 바꿨다. 회람 후 찬반 여부를 투표해 확정할 계획이었다. ‘일본해’가 삭제되자 한국은 동해 병기 목표에 한 단계 진전했다며 이를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일본이 IHO에 강하게 항의하면서 IHO는 회람 한 달 만에 투표 자체를 철회해 버렸다. 동해 부분을 백지로 남겨 둔 것과 함께 말라카 해협의 인도양 편입요구 미반영, 동시베리아해 구역 조정반대 의견 등 부결 가능성이 우려돼 철회했다고 IHO는 밝혔다. 한국은 IHO 사무국이 당사국의 의견 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개정안을 철회한 것에 강력히 항의했다.
 
  IHO는 5년마다 IHO 본부가 있는 모나코에서 총회를 개최한다. 2007년 5월 17차 총회에서 동해 표기 문제를 두고 한·일 양국의 논쟁이 확대되자 윈포드 윌리엄스 IHO 의장은 제4판을 동해 부분을 빼고 발간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12년 4월 개최되는 18차 총회에서 동해 표기 문제가 또다시 쟁점이 될 예정이다. 현재 한국은 외교통상부, 국토해양부, 국립해양조사원, 동북아역사재단, 동해연구회 등 관계기관이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북한발(發) 팩스와 동해·일본해 병기 문제로 떠들썩했던 지난 5월 3일, 《연합뉴스》는 “동해 ‘조선해 표기’ 1800년대 日 고지도 발굴”이란 기사를 통해 부산의 모 교수가 일본 고서점에서 입수했다는 지도를 공개했다. 1835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는 동해를 조선해(朝鮮海)로 표기했다. 이를 공개한 교수는 “그동안 공개된 조선해 표기 고지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음 날 《한국일보》 《문화일보》 《매일경제》 《세계일보》 등이 이 보도 내용을 그대로 받아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한 일본 최고(最古) 지도가 발견됐다”는 기사를 지면에 실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1794년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가 제작한 ‘아세아전도(亞細亞全圖)’, 1809년 다카하시 가케야스(高橋景保)의 ‘일본변계략도(日本邊界略圖)’ 등 1835년보다 앞서 조선해를 표기한 일본 고지도가 이미 공개된 바 있다. 이는 외교통상부와 국립해양조사원 홈페이지나 위키피디아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정보다.
 
  ‘최고 지도’를 처음 보도한 《연합뉴스》는 지난해 7월 이미 국가기록원이 1807년 제작한 조선해 표기 일본 고지도인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를 복원했다고 알린 바 있다. 1년 사이 보도한 기사가 서로 다른 내용을 전한 셈이다.
 
 
  “성공해도 욕먹을 상황”
 
  동해 표기 실무를 담당하는 정부 관계자는 “사실 확인이 제대로 안된 보도는 외교상 도움도 안될뿐더러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조선해로 표기한 일본 정부 공식 지도가 무더기로 발굴되지 않는 이상 일본 고지도 존재는 현재 IHO 논의에서도 큰 의미가 없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동해 표기와 관련해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교부를 비롯한 관계기관에서 동해 병기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일본의 정책 규모와 예산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상태(李相泰) 동해연구회 부회장(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은 “독도의 경우 국무총리실과 외교부가 앞다퉈 TF(태스크포스) 팀을 구성하는 등 범정부 차원의 대응이 이뤄졌지만, 동해는 외교부 내 전담부서도 없는 상황”이라며 “동해 표기는 독도와 달리 영토문제가 아닌 데다, 일본해 표기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적극적 의지만 있으면 충분히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나라당 권영진(權泳臻) 의원이 2009년 10월 공개한 ‘국책기관의 역사 왜곡 시정실적’에 따르면, 국책기관이 2년 동안 동해와 독도 오기 사례를 836건 찾아내 4건을 바로잡은 것에 그쳤지만, 민간단체 반크는 연평균 30건이 넘는 307건을 잡아냈다.
 
  지난 3월 서울시교육청이 편찬, 배포하고 교육과학부가 인정한 독일어 작문 교과서에 동해 대신 ‘일본해’를 표기한 것이 발견돼 논란이 됐다. 2009년 3월엔 중앙교육진흥연구소가 발행한 고교 1학년 사회과목 교과서 표지에 ‘일본해’로 표기된 지구본 그림이 실렸다.
 
  2007년 초 논란이 된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의 ‘평화의 바다’ 발언은 동해에 대한 정부 정책의 한계를 보여준 사례다. 실무진의 협의 없이 튀어나온 ‘평화의 바다’나 ‘우의(友誼)의 바다’는 물론 최근까지 꾸준히 제기된 ‘한국해’도 동해·일본해 병기 전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정부 관계자는 “제3의 명칭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나왔어야 할 이야기”라며 “일본 측이 그러한 주장을 할 수밖에 없도록 우선 동해 병기를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 한국은 “한국, 일본, 러시아 등 3개국(북한을 포함할 경우 4개국)이 접한 해역을 특정 국가 명칭으로 단독 표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근거로 병기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해’ 표기 주장은 모순된다.
 
  정부의 정확한 입장이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IHO 총회가 열리는 내년 4월이 되면 또다시 부정확한 정보와 주장이 난립할 수 있다. IHO 총회 관련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동해 병기를 관철하는 데 성공해도 욕먹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다”며 “정부와 언론 모두 동해 표기에 대해선 각성해야 한다”고 했다.⊙

월간조선 2011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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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지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박현성, 양진아, 최은경, 김인애, 하임숙, 한진식, 김형진, 박희성.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경북 포항 한동대 북한인권학회 <세이지(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지성)>가 서울 종로구 관훈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연 북한 정치범 수용소 사진 전시회가 예상외의 성황을 이뤘다. 지난 2월 2일부터 14일까지 전시회가 열린 165㎡(50평) 남짓한 전시장은 임신부 낙태 장면 등 수용소의 실체를 다룬 펜화와 삽화 등을 보기 위해 찾은 관람객들로 13일 내내 북적였다.
 
  2008년 10여 명의 학생이 모여 만든 작은 공부 모임 <세이지>는 북한의 실체와 인권에 대해 공부하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행사에 2만5000명이 방문하고 13일엔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까지 다녀갔다. ‘비수기’라고 생각했던 설 연휴 전후에도 7000명이 찾았다.
 
  하임숙 <세이지> 회장(24・기업가정신학부 4년)은 “이번 기회를 통해 정치범수용소가 세상에 더욱 알려지고, 북한 정치범수용소가 하루속히 무너져 그곳에 갇힌 자들이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기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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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열이란 사람의 한국 비난 시리즈

중국 CCTV 영어 채널 녹취 기록


베이징에 있는 주중 한국대사관 홍보기획관실에 연락했다. 홍보기획관실 관계자는 정기열씨 문제에 대해 오히려 기자에게 질문을 했다. 기획관실에서는 정기열씨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그가 했던 얘기도 처음 듣는 얘기인 듯했다.
“정기열씨가 CCTV 뉴스 채널 생방송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범죄자라고 말한 건 알고 계세요?”
“아, 그랬습니까?”(駐中한국대사관 관계자)


⊙ 정기열, 주한미군학살만행전민족특별조사委 사무총장, 《민족21》 편집위원 등 지내, 임수경 밀입북 사건 관여, 현재 중국 칭화대 초빙교수로 있으면서 중국 CCTV 뉴스채널에 출연해 親北反韓 발언 일삼아
⊙ “이명박이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南北 긴장을 조성”
⊙ “천안함 사건은 범인이 누군지 확인 안 된 사건. 연평도는 한국군이 포를 더 많이 쐈기 때문에 상호 공격”
⊙ “한국은 지난 60년간 미국의 속국. 미국이 남북형제들을 싸움 붙이고 있다”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hgu@chosun.com)

정기열

정기열 중국 칭화대 교수.

2010년 12월 20일 중국 국영방송(CCTV) 뉴스 채널 생방송의 한 장면이다.
 
  A: “기록적인 측면으로만 따진다면 현재 한국 국민의 78%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미국정부) 입장에 반대하고 있다. 이것은 1964년 베트남 통킹만(Tonking灣) 사건이 조작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연평도 사건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165발을 발사하기 전 남한정부는 7000발 이상의 실탄 사격을 실시했다. 누가 누구를 공격했다고 할 수 있나? 동북아 지역에 핵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현 시점에서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사건만 다뤄선 안 된다.”
 
  B: “43명 선원의 목숨을 앗아간 천안함 폭침 사건은 명백한 사실이다. 자기 자신이 쏘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쐈다는 이야기이다. 가장 가능한 대답은 북한의 소행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다음 연평도와 관련해서는 한국이 더 많은 사격을 가했지만, 북측 사상자는 없었고 북측 사격으로 인해 남한에서는 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한국의 실탄 사격이 북한을 도발했다고 볼 수는 있다고 본다.”
 
  일주일 후인 12월 26일 같은 방송의 다른 시간대 뉴스. 마찬가지로 생방송 토론이다.
 
  A: “동북아시아에서 어느 쪽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전쟁 훈련이 한국에서 계속되는 건, 이명박(李明博) 정권이 자신의 정치적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한반도 긴장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C: “저희는 이번 한반도 긴장 상황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은 오랫동안 북한 문제를 다뤄왔기 때문이다. 다만 걱정인 건, 북한이 최근 들어 위협을 하고 있는데, 그 위협이 현실화될까 걱정된다.”
 
  A: “전혀 동의할 수 없다. 한반도에서 오늘날 북한이 침략자라는 냉전적 사고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두 토론 모두 지난해 11월 북한의 연평도 도발 이후 조성된 한반도 긴장을 다뤘다. 두 토론에 나오는 B와 C는 다른 사람이다.
 
  B는 미국 MIT 안보연구프로그램의 짐 월시(Jim Walsh) 박사이고, C는 일본 게이오(慶應)대의 진보 켄(神保謙) 교수다.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긴다. 북한을 옹호하고 한국정부를 비난한 A는 누굴까? 중국 교수인가, 아니면 북한 대사관 관계자인가.
 
 
 
“이명박은 우리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한국정부 비난을 넘어 북한 김정일 정권을 대놓고 편드는 정기열씨의 주장에 미국의 짐 월시 박사(왼쪽)는 “정 교수, 이제 적당히 좀 하시오!”라고 생방송에서 제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CCTV 측 설명에 따르면, A는 현재 중국 칭화대(淸華大) 방문교수이며 한국계 미국인이었던 정기열씨다. 정씨는 몇 해 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국적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CCTV 뉴스 채널 측은 꼬박꼬박 정씨가 한국인이라고 일러주며, 미국이나 일본, 중국 교수들과 토론을 붙였다.
 
  정씨는 이 방송사와 가진 토론과 인터뷰에서 정말 한국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정부를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한국정부 비난을 넘어 북한 김정일(金正日) 정권을 대놓고 편들었다. 도저히 비판이라고 할 수 없는 그의 주장에, 짐 월시 박사는 “정 교수, 이제 적당히 좀 하시오(Chung, give me a break)!”라고 생방송에서 제지하는 모습도 보였다. 일본인 진보 켄 교수도 “(한국정부를 비난하는) 정 교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럴 때마다 정씨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방송이 끝날 때까지 한국정부, 미국 정부를 싸잡아 비난했다. 중국인 사회자나 중국인 교수는 그런 중요한 순간에는 정기열씨의 편을 들어 북한정부를 옹호하거나(“천안함 격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미국과 한국정부를 비난하며(“워싱턴은 북한 정권을 교체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한국의 군사 훈련은 전쟁을 부를 수 있다”) 싸움을 부추겼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정씨의 말(“이명박은 한국 역사상 최악의 경우, 최악의 대통령”)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슬그머니 다른 쪽으로 말머리를 돌리기도 했다.
 
  정기열씨의 방송이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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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북한 사이버 도발에 또 당한다

金正友

⊙ 北 ‘변종 스턱스넷’으로 전력·철도·공항 공격 후 지상군 투입 가능
⊙ 보안 전문가들 “‘디도스(DDoS)’는 초보적 공격 방식… 제어시스템 악성코드 공격에 대비해야”
⊙ 美 백악관 테러담당 보좌관 “사이버공격 활용 예상 국가 1위는 북한, 2위는 중국”
⊙ 美·中 중심으로 첨단 사이버戰 경쟁 가속화, 한국軍은 보안 취약한 불법 소프트웨어 사용
⊙ 국방부 “침해사고대응팀 24시간 운영, 北 사이버 공격 원천봉쇄 中”
 


 2011년 ○월 ○일 저녁 7시, 중국 선양(瀋陽) 시타(西塔) 거리에 위치한 구식 빌딩 606호. 컴퓨터로 꽉 들어찬 방 안에 10여 명의 직원이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다. 화면엔 한국전력과 코레일 등 한국 주요 기간산업 기관의 위성지도와 해당 기관 내부망의 트래픽(데이터 흐름) 현황을 보여주는 그래프로 가득하다. 담배를 빼어 문 한 조선족 사내가 “일반 휴대전화는 감청 위험이 있다”고 혼잣말을 하고선 인터넷 전화 ‘스카이프’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멈추자 남자의 입에서 옌볜 사투리가 나왔다.
 
  “지령 완료. 잔금 입금 바랍네다.”
 
  상대는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됐어. 우린 남조선 소주나 한잔 하러 가자고.”
 
  남자와 직원들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건물 앞 한식당으로 향했다. 늘 겪는 일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줄을 전혀 몰랐다. 북한 보위부 요원에게 고액의 선금을 받아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지난 두 달 동안 한국 주요기관 전산 기술자와 협력업체 직원들을 대상으로 집중 유포한 수천 개의 USB 메모리에 포함된 악성코드가 예상보다 훨씬 많은 곳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北 사이버공격 한 방에 南 기반 시설 초토화 가능
 
  밤 9시 정각. 대한민국 부산 기장군 고리 원자력발전소 종합통제실 모니터에 이상한 기류가 포착됐다. 예정에 따라 운영돼야 할 제어시스템에 사소한 문제가 생긴 듯했다. 당직 직원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다음날 제출할 보고서 작성에 열중했다. 아무도 몰랐지만, 이미 발전소 제어시스템은 전쟁에 돌입했고, 장렬히 전사한 후였다.
 
  악성코드에 감염된 통합 관리 소프트웨어 ‘STEP7’은 발전소 제어기기인 ‘PLC’를 공격 완료했다. 원자력발전소 시스템이 어느새 미리 심어놓은 악성코드의 지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변종(變種) 스턱스넷(Stuxnet·제어시스템 악성코드)은 발전소를 완전히 적(敵)의 수중에서 놀아나게 했다.
 
  같은 시간, 한국전력도 이 변종 스턱스넷의 공격을 당했다. 국가 핵심 기관과 군 시설이 밀집한 서울 종로구·중구 일대와 용산구 미군 부대 인근의 전력이 차단됐다. 전국 각 지역의 발전소 상태가 불안정해지면서 송전이 중지됐지만, ‘단순 정전’인 줄로만 아는 시민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인천국제공항은 관제시스템의 오작동으로 항공기 운항이 전면 중단됐다. 코레일의 KTX 운행시스템과 서울메트로의 지하철 통제시스템이 마비돼 여기저기서 철도사고가 발생했다. 전력, 철도, 공항. 국가 기반시설이 초토화되는 데 15분이면 충분했다.
 
  철벽 방어막을 자랑했던 한국군 내부망은 패닉 상태가 됐다. 최첨단 군 지휘통신체계 ‘C4I(Command and Control, Communication, Computer, Intelligence)’가 무력화되면서 미군과의 공조시스템에 심각한 위험이 발생했다. 일선 부대의 컴퓨터들이 일제히 셧다운(shutdown·작동중지)됐다.
 
  군 통제시스템 장애는 합동참모본부와 각 군 사령부의 네트워크 마비로 이어졌다. 군은 사이버사령부를 연초에 창설했지만, 대규모 사이버공격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군 지휘부와 전방 부대의 전산망이 서로 엇박자를 냈다. 손발은 멀쩡하지만, 뇌와 신경이 마비된 몸은 더 이상 싸울 능력을 상실했다.
 
  밤 11시, 한국의 기간시설과 군 전산망이 마비된 가운데, 서해 5도와 경기도 전방 부대 초소에서 긴급 무전 보고가 올라왔다. 북한 해안포 부대와 육군 포병부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다. 한 시간 후인 12시 정각, 전방 곳곳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시작됐다. ‘첨단’ 무기체계와 한미(韓美) 동맹이 있어 문제없다던 우리 국방시스템은 북한의 사이버공격 한 방에 초토화됐다.
 
 
  러시아, 사이버공격 후 그루지야 침공
 
  SF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육·해·공·우주에 이은 ‘제5의 전장(戰場)’인 사이버 전쟁을 묘사한 가상 시나리오다. <월간조선>이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과 자료를 종합해 만든 이 시나리오는 2011년 당장에라도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실체적 위협’이 되고 있다.
 
  미국은 2010년 초 4개년 국방검토보고서(QDR)에서 사이버 공간을 전장으로 추가했다. 공군 우주사령부는 같은 해 6월 사이버전(戰)을 정식 교과로 채택, 사이버 작전장교 400명을 양성하겠다는 목표로 세웠다. 미(美) 해군사관학교는 1억 달러를 들여 사이버전 교육센터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영국은 감청기구인 국가통신본부(GCHQ)에 사이버작전센터를 설립했다.
 
  2007년 에스토니아 기간전산망이 디도스 공격으로 마비됐다. 공격원은 러시아 보안기관인 연방정부 통신정보기구로 추정된다. 2008년 그루지야의 컴퓨터 통신망은 러시아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정부와 금융기관 접속이 차단됐고, 정부기관 홈페이지가 해킹당했다. 군 정보시스템의 오작동으로 군사작전이 지연됐다. 러시아는 사이버공격과 지상군을 동시에 투입해 쉽게 전쟁을 끝냈다.
 
  사이버전쟁이라 하면 흔히 ‘디도스(DDoS·분산서비스거부) 공격’부터 떠올린다. 웹사이트 서버에 트래픽(traffic)을 유발해 과부하가 걸리게 하는 이 공격은 이미 초보 해커들도 충분히 실행할 수 있을 정도의 ‘구식 공격’이 됐다. 2009년 7·7 디도스 공격으로 한국은 청와대 등 주요 사이트가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중국을 경유한 북한의 공격으로 추정되며, 한국의 사이버대응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가 됐다.
 
  ‘스턱스넷(Stuxnet)’의 등장은 원자력발전소 등 기간시설의 제어시스템이 얼마나 쉽게 뚫릴 수 있느냐를 보여준 최초의 사례가 됐다. 스턱스넷은 독일의 제어시스템 전문 개발사 지멘스(Siemens)의 운용시스템 ‘WinCC’를 대상으로 공격하... (계속)

월간조선 2011년 1월호 -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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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담록 총 분량 약 6200자… 통역 시간 감안하면 속기록과 거의 다름 없어
⊙ DJ “오바마 이전 미국의 단독주의, 善惡 양분법적 사고·행태로 국제사회 어지러워져” 발언
⊙ ‘훼방꾼’은 박지원 자신이 국내에서 여러 차례 했던 말
⊙ 박지원 “김정일이 북한 인사 중 가장 친한(親韓)·친미(親美) 인사”



2009년 5월 5일, 김대중(金大中) 전(前) 대통령이 중국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과 만났다.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 민주당 박지원(朴智元) 의원, 양원창(楊文昌) 중국인민외교학회 회장 등이 배석한 가운데 두 사람은 한·중(韓中) 양국관계, 북핵(北核) 6자회담 등에 대해 논의했다.
 
  “6자회담은 반드시 성공하고 북핵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확신한다”(김대중), “중국은 남북한 모두의 친구로서 진심으로 남북 간 협력 및 화해를 원한다”(시진핑) 등 두 사람의 주요 대화 내용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지만, 이슈가 될 정도로 특별한 발언은 없었다. 외교회담은 보통 그런 식이다.
 
  민주당 원내대표가 된 박지원 의원은 그로부터 1년 반 후 “시진핑 부주석이 ‘이명박(李明博) 정부가 한반도 평화의 훼방꾼 노릇을 한다’고 비판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올해 10월 19일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박 원내대표는 “시 부주석이 지난해 5월 ‘왜 한국 정부는 과거 정부와 달리 남북관계의 교류협력을 하지 않으면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명박 정부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도 있는데 왜 일본과 함께 한반도 평화의 훼방꾼 노릇을 하느냐’고 지적했다”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가 ‘평화 훼방꾼’ 발언을 한 10월 19일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시진핑 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가부주석을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했다고 발표한 바로 다음날이다. 시 부주석은 중국의 차기 최고지도자로 확정되자마자 한국 정치권의 정쟁(政爭)에 휘말린 셈이다.
 
 
 
中 정부 “사실 부합하지 않아”
 
‘훼방꾼’ 발언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10월 21일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열린 민주당 고위정책회의에서 박지원 원내대표가 모두발언을 한 뒤 생각에 잠겨 있다.

  여권(與圈)은 곧바로 박 원내대표의 주장을 반박했다. 홍상표(洪相杓) 청와대 홍보수석은 지난 10월 20일 브리핑에서 “국내 정치 목적으로 외교를 악용하고 국익을 훼손하는 이적행위와 다를 바 없다”며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고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나라당 배은희(裵恩姬) 대변인은 “박 원내대표가 당리당략(黨利黨略)을 위해 이젠 외국 지도자까지 이용해 국익을 해칠 정도”라며 “일단 뜨고 보자는 발상으로 소설 같은 발언을 지속하는 민주당 원내대표에 국민이 얼마나 속아 줄지 의문”이라는 논평을 내놓았다.
 
  박 원내대표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언론매체들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직접 들은 얘기를 한 것이고 사실에 근거해 말한 것”이라며 “이번에 처음 한 발언이 아니라 몇 차례 언론 인터뷰에서 했던 얘기인데 그동안 청와대 참모들은 무엇을 하고 문제 삼지 않다가 이제 와서 발끈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지난 10월 21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 국정감사에 출석한 김성환 외교부 장관의 메모지에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이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평화 훼방꾼”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한 것과 관련, “강력 대응 요망”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메모의 가려진 부분에는 ‘VIP 지시’라고 적혀 있어, 청와대 측이 김 장관에게 강력대응을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10월 2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고위정책회의에서 박 원내대표는 “지금까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해 본 적이 없다”며 “수차례 언론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라고 재반박했다. 그는 “(청와대가) 어떻게 외교부 보고만 믿고 우리측 인사들의 얘기는 믿지 않느냐”라며 “벌떼처럼 달려들어 쏴 봐야 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발언에 대해 “궁색한 말이지만 대통령을 지칭한 게 아니라 이 정부를 말한 것”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한동안 계속돼 온 여권과 박 원내대표의 공방은 결국 중국 정부가 공식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공방이 한창이던 10월 21일 오후 마자오쉬(馬朝旭) 중국 외교부 부대변인이 정례 브리핑에서 박 원내대표의 발언에 대해 “확인해 본 결과 이런 발언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공식 부인했다. 한국의 정쟁에 중국 정부가 판관(判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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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정보부, A-3 통신 통해 북한과 비밀지령 주고받으며 무장공작선 제주도로 유인
⊙ 逆공작에 걸려 통혁당 간부 구출 시도한 北 무장공작선, 軍·警·情 합동작전에 섬멸
⊙ 작전 참가 요원 “한명숙 前 총리의 남편 박성준 교수는 통혁당 중간 간부인 소조책”
⊙ 韓 前 총리의 北 시누이, 2006년 총리 임명 직후 이산가족 상봉 신청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1968년 11월 16일 열린 통혁당 사건 군(軍) 관련 피고인 4명에 대한 구형공판 장면. 이날 공판에서 군 검찰은 당시 신영복 피고인(사진 맨 왼쪽)에게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죄 등을 적용하여 사형을 구형했고 나머지 3명에게는 징역 7~10년을 구형했다.



통일혁명당(통혁당) 핵심간부를 구출하기 위해 북한이 1968년 8월 20일 제주도 서귀포 해안으로 보냈다가 우리 군·경·정(軍警情) 합동작전에 의해 나포됐던 무장공작선은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의 역(逆)공작에 의해 밀파됐었다는 사실이 42년 만에 밝혀졌다.
 
  이날 군·경·정 합동작전에서는 북한군 12명 사살, 2명 생포와 함께 공작선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우리 군경은 작전 중 2명이 중상을 입었고 2명이 경상을 입었으나 사망자는 없었다. ‘독 안의 쥐 작전(훗날 Z 작전으로 불림)’으로 불렸던 이 작전에는 중앙정보부를 비롯해, 육·해·공·해병대 작전참모부와 합동참모본부, 치안국이 동시에 참여했다.
 
1979년 4월 20일 당시 치안본부가 발표한 통혁당 재건 사건의 증거물들. 당시 북한의 지령에 따라 통혁당 재건을 기도해 오던 북한간첩 임동규 등 일당 10명이 검거됐다. 1968년 통혁당이 일망타진된 후에도 북한은 지속적으로 통혁당 재건을 시도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혁당 사건의 전모를 제주도 무장공작선 격침 4일 후인 8월 24일 공식 발표했다. 중앙정보부 발표에 따르면 당시 통혁당 간부들은 ▲민중봉기 ▲무장집단 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양륙(揚陸)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越北)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띠고 있었다고 한다. 8월 20일 제주도 서귀포로 침투했다 섬멸된 북한의 무장공작선 탑승 생존 공비들에 대한 기자회견도 같은 날 열렸다. 인민군 소속 이승탁(李承卓)과 김일룡(金一龍)은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접선(接線)’이라고만 답했다. 이날 언론에 공개된 이승탁과 김일룡이란 이름은 가명으로 이들의 실명(實名)은 훗날 이관학과 김승환인 것으로 밝혀졌다. 두 사람 모두 인민군 현역 장교들이었다.
 
  이후 판결문과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무장공작선은 북한 753부대 소속 공작선으로 김종태 등 통혁당 간부를 구출하기 위해 남파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Z작전에 대해 현재까지 관련 사료들은 통혁당 간부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보당국이 간첩선을 섬멸한 것으로 설명해 왔다.
 
1969년 1월 22일 서울형사지방법원 통혁당 결심공판에 나온 피고인들.

  하지만 <월간조선>의 취재 결과 무장간첩선은 애초 남한 중앙정보부 요원이 보낸 A-3 지령(간첩 지령용 방송)을 통혁당 간부들이 보낸 것으로 판단한 북한이 통혁당 간부들을 구출하기 위해 밀파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남한의 유인공작(역공작)에 북한이 걸려든 보기 드문 사례다.
 
  1983년 12월에 있었던 부산 다대포 간첩사건도 1960년대에 귀순했던 간첩을 이용한 역공작 사건이었지만 규모면에서 제주도 서귀포 무장간첩선 사건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부산 다대포 간첩사건은 다대포에 남파간첩을 내려놓고 귀환하려던 간첩선을 격침한 사건으로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다.
 
  1968년 당시 중앙정보부의 역공작에 의한 무장공작선 검거작전에 참가했던 군·경·정 관계자들은 대다수 작고(作故)하거나 노환(老患)으로 증언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행히 극소수의 전직 요원이 작전 당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밝힌 ‘통혁당 구출시도 북한 무장공작선 유인·섬멸 작전’(Z작전)은 한 편의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다. 전직 요원의 증언과 관련 자료를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A-3 간첩 지령 이용해 북한軍 유인
 
무장공작선에 승선, 통혁당의 이문규를 구출하기 위해 남파됐다가 생포된 이관학(오른쪽)과 김승환. 두 사람 모두 인민군 장교였다.

  통혁당 총책격인 김종태가 검거된 시기는 사건 발생 두 달여 전인 1968년 6월이었다.
 
  통혁당 전체를 주도한 핵심 인물은 김종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북한에선 통혁당 내 엘리트 그룹을 이끌고 있던 서울대 문리대 출신 이문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친북반미(親北反美) 성향의 월간지 <청맥사> 편집장이었던 이문규는 공군 정훈장교 출신이며, 통혁당 내에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을 조직한 인물이다. 1967년 5월에 월북해 북한 노동당에 입당했다.
 
  김종태가 체포된 후 이문규는 경남 지역을 다니며 도피하다 대구에서 검거됐으며, 그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암호문건이 발견된다.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당국은 도피 상태에 있던 이문규를 북한이 어떻게든 데려가기 위해 작전을 펼칠 것이라 판단, 이문...

월간조선 2010년 10월호 <기사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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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北 전날 北에 있던 로버트 박에게 “중국 투먼에서 만나자”는 메일 보낸 기록
⊙ 北 공작원 또는 제3의 인물에 의한 유인 납치 가능성

Aijalon Gomes

지난 1월 12일 경기도 임진각에서 열린 로버트 박 석방 촉구 행사에 참가한 아이잘론 곰즈 씨. 그는 로버트 박씨와 절친한 친구다.

북한에 7개월째 억류 중인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Gomesㆍ31) 씨가 입북 직전인 지난 1월 24일 로버트 박(Parkㆍ28)씨에게 “(중국) 투먼(圖們) 호텔에서 만나자”란 이메일을 보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로버트 박씨는 지난해 12월 25일 스스로 두만강을 넘어 입북했다 43일 만에 풀려난 대북 인권운동가다.
 
  중국에 있는 사람이 북한에 억류돼 있는 사람에게 ‘만나자’고 이메일을 보낸 것은 누가 생각해 봐도 정상이 아니다. 이 때문에 곰즈의 북행(北行)에 뭔가 사연이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지금까지 곰즈는 지난 1월 25일 중·북(中北) 국경을 스스로 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송자인 야후 메일 계정은 곰즈 씨가 기존에 써 오던 주소인 것으로 확인됐다. 수신자인 G메일도 로버트 박씨의 주소다. 박씨는 이 편지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서야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다.
 
  곰즈가 로버트 박에게 보낸 이메일 제목은 “나는 투먼에 있어요(I’m in Tumen)”이다. 내용도 아주 간단하다.
 
 
  곰즈, 在北 로버트 박에게 “중국에서 만나자” 메일
 
  “로버트, 나는 지금 투먼 호텔에 있어요. 우리 (이) 호텔에서 만납시다. 안부를 전하며, 아이잘론 곰즈.”(Hello Robert, I'm at the Tumen Hotel tumeldasha-hotel. Let's meet at the Hotel. Best Regards, Aijalon Gomes)
 
  영문 원본에 적힌 ‘tumeldasha’는 ‘tumen dasha(圖們大廈)’의 오기로 추정된다. 중국 투먼엔 실제로 같은 이름의 호텔 건물이 있다. 발송 시점은 지난 1월 24일 오전 5시32분이다.
 
  한국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당시 로버트 박씨가 북한에 억류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박씨의 절친한 친구인 곰즈가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중국 투먼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맨 처음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정은 북한의 발표대로 곰즈가 자진 입북했을 가능성이다. 곰즈가 북한에 들어간 시점은 1월 25일이고, 북한은 그 사흘 뒤인 1월 28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미국인 1명 억류 사실만 확인했다. 당시 조선중앙통신은 “25일 조·중 국경지역을 통해 비법 입국한 미국인 1명이 억류됐다”면서 “현재 해당 기관에서 조사 중”이라고 보도했다. 북한은 그 다음 날인 1월 29일 미 국무부에 미국 시민 억류 사실을 통보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때까지도 억류 미국인의 이름과 신원은 밝히지 않았다.
 
  일부 언론은 “북한에 억류 중인 미국인은 28세의 남성으로 자본주의 군대에서 총알받이가 되기 싫어 이를 피해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북한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하지만 이후 곰즈 씨의 신원이 밝혀지면서 나이와 입북 정황이 서로 맞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유인(誘引) 납북됐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3월 22일, 억류 미국인의 신원이 처음 공개됐다. 조선중앙통신은 “조선의 해당 기관에서는 비법입국한 미국 공민 아이잘론 말리 곰즈(남자, 1979년 6월 19일생, 미국 마사츄세쯔주 보스톤 거주)에 대한 범죄자료들이 확정된 데 따라 재판에 기소하기로 하였다”고 보도한 것이다.
 
  소식을 접한 국내외 곰즈의 지인들은 모두 놀랐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과 가족 모두 그에게서 입북에 대해 사전에 들은 얘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곰즈의 지인들과 대북단체들은 그와 친분이 깊은 로버트 박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박씨와 비슷한 목적으로 북한에 자진 입북했을 것으로 추정하고는 있다. 하지만 곰즈와 로버트 박의 입북 과정은 너무 많은 차이가 있다.
 
  스스로 북한에 들어간 로버트 박의 경우, 입북 5개월 전부터 중국 현지 답사 등 사전 점검을 했고, 그 사실을 지인들에게도 털어놨다. 종교적 신념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로버트 박 같은 경우가 정상이다. 하지만 곰즈로부터는 입북 전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람이 없다. 곰즈와 가깝게 지냈던 탈북자 J씨는 “열정적인 로버트와 달리 곰즈는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다. 북한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그가 직접 북한에 들어가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했다.
 
 
  로버트 박 “북에 있는 날 만나자고 할 수 있나”
 
곰즈 씨가 로버트 박씨와 만나기로 했던 투먼호텔.

  정상 입북이 아닐 가능성에 대한 또 하나의 근거는 곰즈가 중국 투먼까지 혼자 갈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곰즈는 한국어도 많이 서툴러 대화는 주로 영어로 한다. 중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것은 물론이다. 한국어와 중국어를 못하는 사람이 중국 투먼에 가서 북한에 억류 중인 친구에게 만나자고 이메일을 보냈다는 사실은 전후, 사방 어느 곳을 둘러봐도 정상적인 구석이 없다.
 
  그 때문에 곰즈가 누군가에 이끌려, 또는 누군가의 말만 믿고 중국까지 가서 로버트 박에게 이메일을 보냈을 것이라는 가정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렇게 보면 곰즈는 입북이 아니라 유인 납치됐다는 말이 된다. 곰즈가 납북된 것이 맞다면 1968년 나포된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미국인 납북은 처음인 셈이다. 지난해 미국인 여기자 2명과 로버트 박씨의 억류는 과실 또는 자의에 의한 입북이었다.
 
  북한이 로버트 박을 석방하기 전 곰즈의 재북(在北) 사실을 발표했고, 이어 로버트 박을 석방한 것도 석연치 않다. 곰즈가 자발적이든 강제든 중·북 국경을 넘은 것은 1월 25일이고, 재북 11일째인 2월 5일 로버트 박의 석방 계획이 발표됐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그 11일 동안 북한이 두 미국인을 두고 어떠한 공작을 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대북 전문가의 지적대로, “로버트 박씨가 석방 후 지금까지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는 이유가 곰즈 씨의 억류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곰즈가 한국에서 가장 가깝게 지냈던 지인은 바로 로버트 박이다. 박씨는 최근 지인에게 “나는 당시 아이잘론과 만난 사실이 없으며, 그가 굳이 나를 호텔에서 만나자고 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북한에 있었단 사실을 한국에 있는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北, 곰즈를 對美 협상 카드로 활용?
 
  곰즈는 어떤 사람일까. 그는 2001년 보스턴 보딘(Bowdoin) 대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2008년 4월부터 2009년 3월까지 경기도 포천의 신봉초등학교에서 영어 원어민 교사로 근무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데다 북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로버트 박씨가 주최하는 ‘북한동포해방’ 기도회 등 대북인권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4월 6일 북한 당국은 곰즈에게 8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했다. 조선중앙통신은 다음 날인 7일 “8년의 노동교화형과 7000만원(북한 화폐 기준)의 벌금형을 언도했다”고 보도했다. 공식 환율로 계산하면 약 72만2300달러(약 8억1000만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
 
  북한이 그에게 적용한 죄목은 ‘조선민족 적대죄’와 ‘비법 국경출입죄’다. 이례적으로 중형과 거액의 벌금형을 내린 것에 대해 북한이 대미(對美) 협상 카드로 이번 억류건을 이용하거나 협상 과정에서 최소한 몸값이라도 챙기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당시 북한은 곰즈에게 중형을 선고하면서도 구체적인 혐의는 물론 입북 경위도 공개하지 않았다.
 
  5월 1일, 북한은 곰즈가 전날 미국의 가족과 전화통화를 했다고 밝혔고, 6월 24일엔 “곰즈에게 전시법을 적용해 추가 조치를 할지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천안함 대북제재 방침에 대한 대응이었다. 미국은 “정치 문제와 연계시키지 말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곰즈 씨를 석방해 줄 것을 요구한다”고 했다.
 
  7월 9일엔 ‘미국인 곰즈 자살 기도’ 소식이 전해졌다. 조선중앙통신은 ‘해당 기관의 통보’를 인용, “교화 중에 있는 미국인 곰즈가 심한 죄책감과 구원 대책을 세워주지 않고 있는 미국 정부에 대한 실망감에 최근 자살을 기도했으며 현재 병원에 옮겨져 구급치료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7월 31일엔 “단식농성 중”이란 소식도 전해졌다. 곰즈 씨의 지인들은 이 소식에 “독실한 기독교인인 곰즈가 자살이나 단식농성을 할 이유가 없다”며 “아마 금식기도를 한 것이 그렇게 와전됐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왜 곰즈의 ‘옥중 소식’까지 두 번씩이나 중계하는 것일까. 평소 북한 같으면 미국과의 협상 라인을 활용해 은근 슬쩍 풀어주고 대가를 챙기려 했을 것이다. 실제 8월 10일 미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북한이 미국 고위급 인사의 방북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고 보도했다. 미 국무부가 부인했지만 RFA의 보도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본지는 이메일 내용에 대해 미국 대사관에 문의했지만, “미국 기관은 정보 사안에 대해선 어떤 확인도 하지 않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국내 정보기관 관계자는 “그의 납북 가능성은 현재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월간조선 2010년 9월호 - 기사 바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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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KAL858기 폭파범 金賢姬가 말하는 나의 삶과 천안함 사건

“천안함 사건이 지금도 北 소행 아니라는 자들,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식이 그렇게 죽었어도 그런 말 하겠나?”

⊙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읽고 “내가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어도 되는가” 하는 생각 갖기도
⊙ 국가안보의식 고취 위해 최근 국정원 신입직원 상대로 12년 만에 공개 강연
⊙ “北은 증거인멸과 발뺌전략, 南은 국제공조와 증거획득… 천안함은 23년 전 KAL기 폭파 사건과 닮았다”
⊙ “23년 전 ‘증거인멸 위해 (KAL기) 폭파 위치를 바다 위로 선택했다’는 말 들었다”
⊙ “北, 나를 가짜라 선전하다 일부 간부들에게 내 사진이 공개된 후 ‘이 여자 안다’는 사람 너무 많이 나오자 당혹해하며 입단속”

김현희


1987년 11월 29일, KAL858기(機)가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돼 승객과 승무원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 한국 정부는 국제공조를 통해 일본인 하치야 마유미(蜂谷?由美)로 가장한 범인 김현희(金賢姬)의 신병을 확보했고, 김정일(金正日)의 지령에 의한 테러임을 확정 지었다. 그 사건 후 지금까지 23년째 북한정권과 남한의 일부 좌파(左派)단체는 “증거가 없다”, “김현희는 가짜”라며 한국 측의 조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010년 3월 26일,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서해 백령도 해상에서 침몰해 장병 40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됐다. 한국 정부는 다국적 민군(民軍)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북한산 어뢰 ‘CHT-02D’의 추진체 등 결정적 증거를 확보했고, 북한 잠수정의 어뢰 공격임을 확정 지었다. 북한정권과 남한의 일부 좌파단체는 “북한의 어뢰가 아니다”, “합조단 발표에 의문점이 많다”며 조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KAL858기 폭파사건의 ‘결정적 증거’이자 ‘살아 있는 증거’인 김현희씨는 지금 천안함 폭침(爆沈)사건을 어떻게 지켜보고 있을까. 지난 6월 1일, ‘북풍(北風)’과 ‘노풍(盧風)’이 뒤섞인 지방선거 관련 기사에서 ‘KAL858기 폭파사건’이란 단어가 보이자 다시 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 순간 기자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02’로 시작하는 발신번호를 본 후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기자, 정○○입니다.”
 
 휴대전화가 없는 김현희씨의 남편 정씨는 항상 공중전화로 연락을 한다. 주소지인 서울로 투표를 하기 위해 올라왔다가 안부인사차 전화를 한 것이었다. 먼저 연락할 길이 없는 기자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뭔가 통했다’는 느낌이 왔다.
 
 8일 후인 6월 9일, 지방의 한 식당에서 김현희씨를 만날 수 있었다. 지난해 2월과 6월 <월간조선>(月刊朝鮮) 인터뷰, 3월 일본인 납북(拉北)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씨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飯塚耕一郞) 씨와의 공개 만남 등 몇 차례 언론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지만, 질문지를 미리 전달하는 등 사전 협의하에 단독으로 정식 인터뷰를 한 것은 국내 언론으로선 잠적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北에선 ‘1호’ 대신 ‘1번’ 훨씬 많이 써
 
지난 5월 20일 민군 합동조사단이 공개한 어뢰 추진체와 모터. KAL858기 폭파사건의 범인이자 ‘결정적 증거'인 김현희씨는 자신을 '살아있는 프로펠러’라 표현했다.

 “천안함 사건과 KAL858기 폭파사건, 23년의 간극(間隙)을 둔 두 사건은 범인, 피해자, 범행방식, 증거 확보 등 여러 모양에서 너무나 닮았습니다. 둘 모두 사건이 터지자마자 한국 정부가 국제공조를 추진했고,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해 진실이 밝혀졌죠. 북한은 계속 발뺌을 하고 있고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생각을 묻자, 김씨는 23년 전 ‘악몽’을 다시 끄집어내면서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1997년 12월 안기부 직원이었던 정씨와 결혼한 후 세상과 거리를 둔 채 평범한 아내이자 엄마로 살려고 했지만, 좌파정권과 방송언론은 그들을 곱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월간조선>의 연이은 특종(特種)보도 후 어느 정도 평온을 찾은 듯했으나, 천안함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23년 전 사건이 불거져 나온 것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의 발표를 국민의 25~30%가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이 조사결과에 대해 ‘경탄’의 표현까지 쓴 것과 상반되는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살아 있는 프로펠러’입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결정적인 증거가 됐죠. 북한의 소행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쌍끌이 어선의 그물에 걸려 올라왔는데, 종북(從北)세력은 여전히 조작을 주장합니다. 그들에겐 진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북한이 했다’는 진실이 두렵고 싫은 것이죠. 자기 집 아들이 맞아 죽었는데, 가해자를 규탄하는 대신 집안 형제끼리 싸우고 뒤집어엎는 경우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또 가해자는 그렇게 보호하려고 하고요. 그 사람들이 정말 대한민국 국민인지 궁금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돼요. 의식화된 세력이라고 봅니다.”
 
 지난 6월 13일, 참여연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과 이사국에 “한국 정부의 조사에 의혹이 많으니 안보리 대북제재에 신중을 기해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대상으로 한 한국 민군 합동조사단의 ‘천안함 사건 조사 브리핑’을 하루 앞두고 일어난 일이다. 의장국인 멕시코는 지금까지 안보리 논의에서 NGO의 자료를 회람한 적이 없다며 선을 그었지만, 여전히 모호한 입장을 보이는 중국과 러시아의 대응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천안함 사건 조사 결과 발표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게 어뢰 추진축에 적혀 있던 ‘1번’이라는 글씨다. 북한에서는 ‘1번’이라는 용어를 안 쓴다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金大中·盧武鉉)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세현(丁世鉉)씨가 그런 주장을 했다. 정씨는 “북한에선 1번, 2번 같은 일본식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1962년에 ...

계속...

월간조선 2010년 7월호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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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8월 北 미그機 백령도 상공 침공 등 도발에 대응해 작전계획 수립
⊙ 작전명 ‘망치’, “백령도 인근 북한 3개 섬 기습·초토화 목적”
⊙ 1982년부터 2년10개월간 해병대 정예요원 선발해 백령도 현장에서 특수훈련·작전 실시
⊙ 작전 참가 장교 “NLL 근방에서 기만작전 펼쳐 北 도발행위 억제했다”

해군특수전부대(UDT/SEAL) 대원들이 해상침투훈련을 하는 모습.

1980년대 초 북한군의 잦은 도발에 대응, 백령도 인근 해상(海上)에서 구체적인 북한 침투 작전 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망치작전’으로 불리는 이 계획은 1982년 1월부터 2년10개월 동안 해병대 요원들을 선발해 백령도 인근 NLL(북방한계선) 해상에서 기만(欺瞞)작전을 펼치며 북한의 월례도(島) 등 3개 목표지역에 침투해 ▲군사시설 파괴 ▲요인 암살 ▲납치·교란 등 2시간 만에 작전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작전계획은 1980년 11월 전남 횡간도 무장간첩 침투, 1981년 8월 북한 미그기(機) 백령도 상공 침공 및 미(美)정찰기 SR-71(블랙버드) 격추 시도 등 고조된 남북(南北) 대치 상황에서 수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1981년 10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국군의날 행사에서 “단순히 적의 도발을 물리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도발에 대한 철저한 응징력도 함께 갖춰야 한다”면서 “특히 도발의 대가가 더없이 비싸다는 사실을 증명할 막강한 군사력의 유지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망치작전에 관여한 한 관계자는 “무장공비 및 간첩선(船) 침투 등 북한의 잇따른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해병대 정예요원을 선발해 포항에서 집중 훈련을 한 후 백령도와 연평도에 배치해 인근 NLL 해상에서 훈련 및 기만작전을 실시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이다.
 
 “해병대 각 부대에서 1차로 선발된 요원들은 1982년 4월까지 포항에서 훈련을 받은 후, 백령도로 이동해 소대 규모로 훈련 및 작전을 펼쳤습니다. 주로 공수교육 또는 특수수색교육 이수자와 무술유단자 등이 신원조회를 거쳐 선발됐습니다.”
 
 
 철저한 신원조회 거쳐 요원선발
  
1981년 9월 UDT, 공수교육 등 이미 특수 교육을 이수한 인원 중 최정예 대원을 뽑는 것으로 1차 요원 선발이 시작됐다. 이들은 기본 교육 후 이듬해 1월부터 ‘망치교육’이라 불리는 ‘특수침투훈련’을 받고 백령도로 파견됐다.
 
  같은 해 8월엔 백령도에 이어 연평도에도 소대 규모 병력이 추가됐다. 작전에 참여했던 한 장교는 “공황장애 또는 내부혼란을 막기 위해 사단계획 수립 당시 ‘단순 전지훈련’이란 용어를 불가피하게 사용했지만, 지휘관들은 정확하게 작전의 목적을 알고 있었고 장병들도 대부분 눈치로 파악했다”고 밝혔다.
 
  소대규모로 편성된 ‘망치부대’는 3개월 단위로 교체돼 훈련 및 작전을 수행했고, 1983년 10월 말까지 총 300여 명의 요원이 6차례에 걸쳐 투입됐다. 작전 관계자는 “장기간 배치될 경우 고도의 특수훈련과 심리적 압박 등의 이유로 작전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면서 “3개월마다 현장 인원을 교체하는 한편 포항에선 다음 기수를 위한 훈련이 진행됐다”고 했다.
 
  신원조회 결과 문제가 있는 요원은 곧바로 복귀 조치했다. 당시 작전을 담당했던 고위급 장교는 “신체검사나 경력에서 결격사유가 없는 대원인데, 상급부대의 지시로 훈련 중 제외된 인원이 다수 있었다”며 “친인척 관계까지 정밀하게 신원조회를 실시한 듯하다”고 했다.
 
  특히 백령도에 배치된 이들이 훈련 및 작전을 펼친 곳은 지난 3월 26일 침몰한 해군 초계함(哨戒艦) 천안함의 함수(艦首)가 가라앉은 지점 부근이다. 백령도 앞바다에서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해상침투훈련을 반복했던 부대원들은 28년 후 벌어진 사건에 대해 남다른 소회를 밝혔다.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당시에도 물이 혼탁하고 조류가 빨라 훈련 강도가 굉장히 높았습니다. 훈련은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습니다. 이번 천안함 사고가 나는 순간 구조 및 인양 과정이 분명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고(故) 한주호 준위의 희생도 참 안타까웠고요. 망치부대가 지금까지 존재했더라면, 좀 더 익숙한 바다에서 구조작업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부대원들의 주장에 따르면, 망치작전은 일명 ‘812 계획’에 의해 탄생했다고 한다. 1981년 8월 12일 북한의 미그21기 편대가 백령도 상공에 침공해 저공비행을 실시한 사건으로 인해 서해 5도의 안보 위험이 증폭되자, 북한의 대남무력 도발 의지를 사전에 봉쇄하고 도발 시 보복작전을 통한 전술적인 대응 차원에서 시작된 계획이라는 것이다.
 
  작전에 참여했던 한 장교는 “육군에서 실시한 ‘벌초계획’도 같은 시기에 계획된 것”이라며 “최종 하달된 비밀 임무 지시에 망치와 함께 ‘벌초’란 작전명이 적힌 것을 분명히 봤다”고 말했다.
 
 
 
“보이는 것은 다 죽여라”
  “체포되면 자살하라”

 
1981년 8월 미그21기 2대가 백령도 상공을 침공하고, 미군 정찰기 SR-71(블랙버드)가 공격을 받는 등 북한의 도발이 잇따라 발생했다. 망치부대원은 이에 대한 대응 차원으로 망치작전계획이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지난 4월 12일 <주간조선> 보도에 따르면, 육사 12기 출신 군(軍)지휘관들이 주도한 벌초계획은 패러글라이더를 이용해 특수부대를 평양으로 파견, 주석궁(宮)을 폭파하고 김일성(金日成)을 사살한 뒤 육로(陸路) 또는 해로(海路)를 통해 돌아오는 비밀계획이다. 이 계획은 전두환 대통령이 “북한과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다”며 부정적 입장을 표명해 1983년 12월경 폐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망치부대원들은 “‘벌초’가 훈련 단계에서 마무리된 것과 달리 ‘망치’는 실제 작전 현장인 NLL 인근 해상까지 접근해 기만작전을 벌였다”며 “북한 특수요원과 반(半)잠수정이 수시로 출몰하는 곳에서 ‘교육훈련’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이들이 받은 훈련은 사실상 실전에 가까웠다. 북한군 장비인 AK47소총과 TT권총 등을 지원받아 사용 및 분해 교육을 실시했고, 적의 레이더 탐지를 피하기 위해 반(反)레이더 고무커버를 지급받아 무장했다. 목표지역의 항공사진 등 정밀한 해안정보는 상급부대를 통해 수시로 전해졌고, 상륙 기습부대를 중심으로 상세하고 치밀한 작전계획이 수립됐다.
 
  낮에는 정신교육을 통해 적개심 고취, 영웅심, 복종심, 담력배양, 북한 사투리 훈련 등으로 실제 침투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돌발상황에 대비했고, 주(主)훈련이 이뤄지는 야간엔 IBS(고무보트) 기습 작전을 중심으로 전략적 훈련을 반복했다.
 
  북한의 내륙지휘소가 위치한 일부 지역과 유사한 지형을 가진 경북 영일군 일대에서 가(假)시설을 설치해 기동사격, 시설습격, 도피·탈출, 폭파, 요인암살 등 다양한 훈련을 실시했다. 백령도 해상에선 실탄이 지급된 상태에서 반복 침투 훈련이 이어졌다. 한 관계자는 “백령도를 비롯한 NLL 지역은 당시 사실상 전시 지역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실탄을 지급했다”면서 “훈련 및 작전 중 파도에 휩쓸려 북한 지역으로 넘어갈 경우 탈출을 위해서 꼭 필요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부대원들은 “(명령만 떨어지면) 보이는 것은 다 죽여라” “체포되면 자폭하라” 등 실전에 대비한 구호를 매일 반복해서 외쳤고, 돌격·정찰·엄호 3개 팀으로 구성돼 상부의 명령을 기다렸다. 단순 대기가 아니라 전투태세를 유지, 기만·교란 작전을 펼쳐 북한의 도발에 대한 남한의 억제력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망치작전 계획은 군 내에서도 일부 인사를 제외하곤 정보가 철저하게 통제된 기밀이었다. 해병대가 소속된 해군 내부에서도 정황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부대 이동 과정을 ‘전지훈련’ 등으로 위장했고, 대원들은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참모급 장교였던 한 인사는 “이제 수십 년이 지나 역사적으로 기록될 필요성이 있어 부대원들이 공개에 나선 것 같다”면서 “작전의 핵심 내용을 알고 있는 당시 군 고위급 인사들이 이미 노령이 돼 기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의문”이라고 했다.
 
 
  北派작전인가 단순 전지훈련인가
 
1960년대 북파 공작원들이 훈련을 받는 모습.

  또 그는 “이번 천안함 사태를 지켜보면서, 28년 전 북한의 도발에 대응해 계획된 망치작전이 다시 떠올랐다”면서 “군사적이든 비(非)군사적이든 확실한 대응조치를 통해 북한의 도발 의지를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전에 참가한 다른 인사는 “당시 주된 작전인 실제 침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계속된 전투태세 가운데 NLL 해상에서 기만작전을 펼친 것으로 보아 망치작전 외에 다른 비밀작전이 계획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정전협정(停戰協定)은 서해 NLL 침범과 같은 비무장지대에서의 적대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를 통과하기 위해선 반드시 군사정전위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망치부대원들은 사실상 아군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NLL 인근해상까지 접근해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훈련을 받았다. NLL을 넘어가진 않았지만, 사실상 기만작전을 펼치며 북한의 도발에 대응한 것이다.
 
  망치작전에 대해 군 고위급 관계자 중 일부는 “일반적 작전일 가능성이 큰데, 그게 크게 와전(訛傳)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해병대 관계자도 망치부대에 대해 “해병대가 공식 보관 중인 자료상으론 북파 작전에 대한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북 보복작전 훈련을 했다’는 부대원들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28년 전 대한민국은 백령도 인근에서 빈번히 발생한 북한의 도발행위에 대해 단호한 응징대책을 마련했다. 작전의 최종 목적에 대한 부분은 공식 확인되지 않더라도, 이들의 훈련이 북한의 도발 계획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줬음은 분명하다.
 
  지난 4월 15일, 천안함이 침몰 20일 만에 인양됨에 따라 대응 수위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28년 전 ‘북파작전’은 이런 점에서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 기만작전(欺瞞作戰·Deception Operation)
 
  아군의 작전의도, 능력, 배치 등을 적이 오판(誤判)하도록 유도해 적을 아군의 의도대로 유인하거나 적의 기도를 사전에 포기하게 하는 계획적인 작전활동을 말하며, 그 방법에는 양공(陽攻), 양동(陽動), 계략(計略), 허식(虛飾) 등이 있다. 망치부대원들은 “부대의 주 작전 목표는 북파 후 요인암살 및 시설폭파 등이었지만, 명령대기 중 NLL 부근에서 전투태세로 벌인 작전은 기만작전을 수행한 것”이라고 말한다.

 월간조선 2010년 5월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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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온도 영하 30℃… 實戰같이 뜨겁게 전투수행능력 점검

『훈련이란 단어는 사치, 주어진 모든 임무가 곧 실전』(李東熙 연대장)


영하 15℃에서 맛본「더위」
『탕! 탕!』
 
 지난 1월14일 오후 8시35분, 위병소 부근에서 2발의 총성이 울렸다.
 
 『특작부대 출현! 수색 1조는 좌측 능선, 3조는 우측 능선으로 침투! 2조는 정면으로 공격한다!』
 
 소대장 金賢宇(김현우·25) 소위의 명령이 떨어졌다. 대기하던 21명의 기동타격대원들이 칠흑같이 어두운 언덕 위로 달려간다. 모두 일곱 겹을 껴입어서일까, 동작이 왠지 부자연스럽다.
 
 『엎드려!』
 
 부소대장 朴泰豪(박태호·26) 하사가 수색 1조 대원들에게 속삭인다. 대원들 모두 동시에 몸을 낮췄다. 눈밭에 엎드린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옷을 껴입은 채 달려서인지 몸에선 땀이 난다. 눈 위를 타고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콧물이 얼기 시작한다. 몸은 하나인데 온도 반응은 제각각이다.
 
 출동 직전 봤던 온도계가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영하 15℃, 경남 마산이 고향인 高秉鉉(고병현·21) 이병에겐 이 모든 것이 새롭다.
 
 고개를 살짝 들어 봤다. 보름을 1주일 앞뒀지만 명월리 하늘에 뜬 달이 꽤 밝았다. 능선 너머 동편 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유독 3개의 별이 눈에 들어온다. 「오리온자리」다.
 
 『병현아, 왜 사람들이 오리온자리를 좋아하는지 아니? 그건 가장 찾기 쉽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항상 찾기 쉽고, 가기 쉬운 길만 가려고 하지』
 
 전날 밤 함께 경계작전에 투입된 趙一煥(조일환·22) 상병이 들려 준 이야기다. 軍에 들어와 별자리를 제대로 알게 됐다는 그는 지금 高이병 옆에 엎드려 저 멀리 소나무 숲을 조준하고 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땀이 식었는지 슬슬 한기가 느껴질 무렵, 20여m 전방의 숲 속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사격!』
 
 金소위의 명령에 몇 발의 총성이 울렸다. 부소대장과 1조 대원들이 먼저 뛰어나갔고, 나머지 조가 추격에 나섰다. 결국 3개 수색조에 둘러싸인 敵(적)은 모두 「사살」됐다. 습득물은 소총 3정과 군장 2기.
 
 꽤 많은 부대를 취재했지만, 가장 「실전」 같은 훈련이었다. 탄만 공포탄이었을 뿐 현장은 戰場(전장) 그 자체였다. 예전 취재는 주로 대열 뒤편에 서서 관찰하고 기록했는데, 이번엔 캄캄한 산 위를 향해 함께 포복하고 함께 뛰었다. 「영하 15℃의 더위」가 그대로 전해졌다.
 
기동타격대 임무를 수행한 3소대 장병들.

 
 「敵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우 투 파이트(how to fight)」, 즉 敵과 어떻게 싸울 것인지가 훈련의 가장 큰 핵심이에요. 이기자부대에서는 「훈련」이란 단어는 사치입니다. 모든 임무가 곧 실전입니다. 전시편제 장비 그대로 다 왔어요』
 
 훈련을 지휘한 연대장 李東熙(이동희·학군23기) 대령의 말이다. 말투에서 느껴지는 그 의미심장함이 남달랐다.
 
 그래도 조금은 꾸며진 설정이 아닐까 싶어 취재기간 많은 병사들과 직접 얘기를 나눠 봤다. 병사 중에 가장 꾸밈없고 솔직한 답변을 해주는 「新兵(신병)」과 「말년병장」들이다.
 
 그들에게 『훈련강도가 예사롭지 않은데, 사전에 따로 지시는 없었는지』 물었더니, 『절대로 그렇지 않다』며 『이기자부대가 훈련을 「빡세게」 하는 건 대한민국 육군 출신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육군 출신의 기자였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한기 훈련 취재 일정이 잡히자 걱정부터 앞섰던 게 사실이다. 모든 예비역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훈련이지만 혹한에서의 숙영과 행군을 빼면 새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몇몇 선배기자들도 『거기 눈 빼면 취재할 게 있겠어?』라며 농담 半 진담 半 했다.
 
 이틀 후 廣德峴(광덕치·광덕고개) 위로 굽이진 75번 국도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서야 그 모든 걱정이 섣부른 생각이었음을 알게 됐다. 서쪽 하늘의 붉은 노을처럼 젊은 장병들의 피는 뜨거웠고, 「이기자」의 기세는 「强軍(강군)」의 위용 그 자체였다.
 
 기자는 육군 이기자부대의 혹한기 훈련을 2박3일간 동행하며 취재했다.
 
 
 눈밭에 멈춰 버린 지프
 
金賢宇 소위.

 지난 1월14일 오후 1시, 강원도 화천군 명월리의 눈 덮인 雪山(설산) 위엔 白色(백색) 위장을 한 장병들이 부산한 모습으로 오가고 있었다. 모두 집결지 편성을 위한 병력과 장비를 점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용호연대 1대대는 오전 9시30분 주둔지에서 출발, 이미 15km 행군을 마친 상태였다.
 
 눈이 꽤 많이 왔다. 화창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눈은 녹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나를 태우고 가던 지프차는 눈밭에 멈춰 버렸다. 눈 속에서 핸들을 무리하게 꺾다 보니 타이어 바퀴와 휠을 연결하는 부속이 부러져 버렸다. 강원도 중부전선의 관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2시42분 부로 총 85명 집결지 도착 완료했으며, 현재 주변 지형 이상 없다는 보고입니다. 집결지 편성 최종 완료 시각은 17시 정각입니다』
 
 중대장 金學榮(김학영·3사36기) 대위가 군기 가득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경계초소 너머 1소대 2분대원들이 야전삽으로 땅을 고르고 있었다. 꽁꽁 언 땅을 파헤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정수는 왼쪽 땅을 좀더 고르고, 진석이는 나뭇가지로 쓸어내. 현수는 솔잎을 뿌려. 아, 저기 야전깔개하고 판초우의 가져와』
 
 분대장 宋琓土宣(송완선·22) 병장의 목소리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여러 훈련을 겪을 만큼 겪은 선임병의 눈에는 아직 후임들의 움직임이 어설프다.
 
 훈련의 전체 설정은 2개 부대가 서로 전투를 치르는 방식이다. 용호연대와 14개 지원배속부대가 합쳐져 수천여 병력으로 구성된 전투단은 사단 수색대대로 구성된 대항군과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는다. 대항군 역시 연대급 규모로 가정한다.
 
 무조건 혹한만 극복하는 과거 훈련과는 달리, 전술적 중요성이 커졌다. 훈련의 가장 큰 목적은 쌍방자유기동 방식을 통해 동계작전수행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워게임 모델과 지휘통제체계 시스템을 이용, 입체적인 전투수행 환경이 접목됐다.
 
 용호연대 측이 북쪽 명월리를 중심으로 집결지를 편성할 무렵, 대항군인 수색대대는 남쪽 華岳山(화악산)과 道馬峙(도마치) 고개 일대를 점령 중이었다. 1월14일 오후 3시, 득봉 유격장에 도착하니, 수색 2중대는 집결지 편성을 마친 후 주변 지형을 정찰 중이었다.
 
 산세가 꽤 험준했다. 「道馬峙」란 고개 이름은 弓裔(궁예)가 王建(왕건)을 피해 도망가다 길이 험해 말에서 내려 걸었다고 해서 유래됐다. 이름에 선입견을 가져서인지 대낮인 데도 해가 진 듯 어둑어둑하다. 계곡 사이로 수색대원들의 텐트가 드문드문 보였다.
 
 
 「최고 수색병」이 된 가수 金泰佑
 
金泰佑 일병과 수색대원들이 지형정찰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꽤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이름은 金泰佑(김태우), 나이는 27세, 소속은 수색 2중대 1소대, 계급은 일병이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입대 전 직업이 「가수」라는 점.
 
 「어머님께」, 「거짓말」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지난 10년간 각종 가수상...


월간조선 2008년 4월호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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