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 Log

⊙복잡한 수식으로 ‘SNS 역량지수’ 계량화한 새누리당… “첫 단추부터 잘못 뀄다”
⊙트위터 이슈 주요 출처 ‘나꼼수’, 비키니 논란에도 ‘정봉주 구명’ 내세우며 분위기 주도
⊙左·右 양쪽에 날 세운 진중권, “나꼼수는 신앙, ‘부러진 화살’은 허구”
⊙‘선관위 디도스’ ‘박원순 아들 병역’ ‘새누리당 이름’ ‘SNS 판사 징계’… 트위터는 이미 전쟁 中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취재지원 : 이후연 월간조선 인턴기자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회의 모습.


 ‘140자(字)’가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정치판’을 뒤흔들고 있다. 신문과 방송이 경쟁적으로 정치인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영향력’을 측정하더니, 새누리당(옛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는 시그마(∑)와 로그(log)까지 포함한 복잡한 수식까지 만들어 19대 총선 공천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트위터가 도대체 뭐길래”란 하소연이 당 안팎에서 공공연히 나오는 이유다.
 
  트위터(twitter)는 2006년 3월에 서비스를 시작한 ‘마이크로(短文)블로그’ 서비스다. 현재 페이스북(facebook)과 함께 전 세계인을 하나로 묶는 대표적 SNS로 자리매김했다. 불과 2008년까지만 해도 한국에선 트위터란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 트렌드에 민감한 일부 젊은이들이 미국에서 시작된 유행을 따라 서로 질문에 답하며 일상을 나누는 도구에 불과했다.
 
  2009년 3월, 미국의 한인 요리사가 ‘타코’란 패스트푸드를 팔면서 트위터를 활용해 ‘대박’을 냈다는 소식이 《뉴스위크》와 BBC 등 주요 외신을 통해 알려졌다. 국내에서도 트위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그뿐이었다. 아이폰(iPhone)과 같은 스마트폰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상황이라, 트위터의 실시간 위력을 체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대선(大選)에 영향을 끼칠 만큼 대중화에 성공한 상태였다.
 
 
  “트위터는 SNS가 아니라 뉴스다”
 
  2009년 11월 말, 한국에 아이폰이 출시되면서 뒤늦은 스마트폰 열풍이 시작됐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는 스마트폰 날개를 달고 국내 정치·경제·문화 전반을 휩쓸었다. 정치인과 연예인 등 유명인들은 언론사 기자를 만나는 대신 트위터로 자신의 근황과 생각을 직접 전했고, 수십만 팔로워(follower)를 거느린 인기 트위터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사용자 수는 꽤 오래전 500만명을 돌파(1월 18일 기준 544만명)했다. 트위터는 그렇게 대한민국을 ‘접수’했다.
 
  국제사회에서 트위터의 거대 영향력은 이미 ‘기정사실’이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 아프리카 독재정권을 차례로 무너뜨린 ‘재스민 혁명’, 미국의 심장부 뉴욕 맨해튼을 시작으로 전 세계를 ‘점령(occupy)’한 월가 시위는 모두 트위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움직임이었다. 한국의 경우, 2010년 6월 지방선거 때 유명인들이 잇달아 올린 ‘투표 인증샷’과 지난해 ‘반값등록금’ ‘한·미 FTA 반대’ 시위를 비롯해 10월 재보궐 선거까지 이어진 ‘무한RT’(반복된 리트윗을 통해 전파) 등은 트위터가 국내 정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트위터는 이미 자신이 “SNS가 아닌 뉴스”라고 선언했다. 2010년 트위터의 케빈 다우 부사장은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자리에서 “트위터는 ‘서비스(SNS)’가 아니라 뉴스이자 정보”라며 “오늘날 뉴스의 본질을 크게 변화시켰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후 트위터는 트윗 입력창 위의 “뭐 하고 있나요?(What are you doing?)”란 메시지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What’s happening?)”로 바꿨다. 부담 없이 쓰는 140자 메시지 하나하나가 모두 기사이자 언론이 돼 버린 셈이다.
 
  기자는 취재 중 트위터의 위력을 직접 체험할 기회를 얻었다. 지난 1월 30일, 인터뷰를 진행하던 김행(金杏) 소셜뉴스 부회장이 기자의 트위터에 실린 한 트윗을 지목해 이슈화를 시켜 보겠다고 했다. 트윗은 그날 오전에 직접 찍어 올린 무소속 강용석(康容碩) 의원의 명함 사진이었다. 내용은 ‘고소고발 집착남’, ‘찌질이’, ‘모두까기 인형’ 등 이색 별칭이 담긴 명함이 “웃기다”고 적었을 뿐이다.
 
  잠시 후 김 대표는 SNS 기반 뉴스 사이트인 위키트리(Wikitree)에 해당 트윗을 리트윗했다. 일종의 테스트였다. 순간 초 단위로 리트윗이 올라왔고, 결국 약 36만개에 달하는 트위터에 명함 사진이 노출됐다. 직원의 실수로 초반에 아이디가 잘못 적혔던 사례를 감안하면 수십만의 추가 노출이 제외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용석 명함’이 뜬 사연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가 만든 ‘SNS 역량지수’ 공식.
  파장은 SNS에서 웹(web)으로 이어졌다. 다음날 오후 인터넷매체는 물론 《조선일보》 《매일경제》 《경향신문》 등 주요 일간지 인터넷판에 강 의원의 명함이 보도됐다. 별생각 없이 올린 짧은 트윗 하나가 다음날 주요 언론이 모두 받아쓴 기사가 된 셈이다.
 
  트윗은 더 이상 ‘지저귐(tweet)’이 아니다. 거대한 확성기를 단 ‘고함(shouting)’이 됐다. 국내외 주요 논객들은 더 이상 언론 기고나 인터뷰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지 않는다. 이슈가 터질 때마다 즉각 짧은 트윗을 올려 여론을 좌지우지한다. 긴 글이 필요할 경우에도 굳이 언론사를 거치기보단 자신의 블로그에 먼저 쓴 후 이를 링크하는 트윗을 날린다.
 
  《동아일보》는 지난 2월 2일 1면에서 “TV에 기대던 ‘이미지 선거’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대신 SNS와 UCC(직접 만든 저작물) 등을 활용한 ‘빅 데이터(big data)’가 선거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이날 ‘클라우트 지수(Klout score·SNS 영향력 평가 시스템)’로 집계된 정치인 트위터 영향력에 따르면, 이정희(李正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1위를 차지했으며, 박원순(朴元淳) 서울시장, 문재인(文在寅) 노무현재단 이사장, 문성근(文盛瑾)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한명숙(韓明淑) 민주통합당 대표, 정동영(鄭東泳) 민주통합당 의원이 2~6위를 기록했다. 상위 10명 중 새누리당 소속은 김문수(金文洙) 경기도지사(8위)와 박근혜(朴槿惠) 비상대책위원장(10위)뿐이었다. 무소속 강용석 의원은 7위에 랭크됐다. 여권의 ‘SNS 고전(苦戰)’이 수치로 확인된 셈이다.
 
  의원마다 SNS를 전담하는 ‘소셜(social) 비서관’을 지정하고, 관련 매뉴얼을 만들어 전략적으로 대응하며, SNS 역량지수를 계량화해 공천에 반영하는 등 갖가지 논의가 연초부터 제기됐지만, 트위터 세계에서 새누리당은 여전히 ‘아웃사이더’다.
 
  여당 지도부의 섣부른 움직임에 정치 지망생들만 바빠졌다. 최근 기자의 트위터엔 말끔한 프로필 사진을 내건 중년 남성들이 팔로우를 했다는 소식이 잇따라 올라온다. 대부분 총선 예비후보들이다. 당이 내세운 ‘SNS 기준’을 맞추기 위해 많은 예비 정치인이 무차별 팔로우를 시도하고 있다.
 
  본지 인턴기자가 임시로 트위터를 만들어 맞팔(서로 팔로우함) 시스템을 이용해 팔로워를 인위적으로 늘려 본 결과, 2주 만에 5000명을 모을 수 있었다. 기사작성과 취재 등 할 일 다 하고 남는 시간에만 작업한 결과다. ‘소셜 전담 비서관’이 종일 관리했다면 이론상 단기간에 수만 명도 어려움 없이 모을 수 있다.
 
 
  “트위터에 reader가 없다”
 
미국 소셜미디어연구재단이 공개한 월가 시위대의 트위터 네트워크.
  《조선일보》는 지난 1월 말 “트위터·페이스북 등 SNS 계정이 통째로 거래되고 있다”며 “다수의 팔로워를 보유할 경우 1명당 100~150원가량에 거래된다”고 보도했다. 이메일 주소만 있으면 무한대로 가입할 수 있는 데다, 계정 양도가 용이해 선거를 앞둔 예비 정치인을 대상으로 판매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정치권이 제시한 각종 ‘트위터 지수’가 무차별 ‘맞팔’과 ‘트윗’을 방지하기 위해 수식에 나름의 공식을 삽입하고 있지만, ‘맞팔 후 언팔’이나 ‘복제 트위터 개설’ 등 ‘꼼수’를 피해 가긴 어려웠다. 각종 조작을 원천봉쇄한다는 새누리당 비대위의 ‘SNS 역량지수’는 일반인이 식을 이해할 수 없어 인위적인 조작이 어렵다는 평이다. 복잡한 미완성 수식에 시그마의 범위까지 숨겨 수치대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새누리당의 ‘정치의 수학화’는 호응보다 비판이 많았다. SNS의 진짜 목적과 진정성을 배제한 채 계량화에만 치중한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어떤 지수를 만들든 출당시킨 강용석 의원을 따라잡기 어려울 것”이란 조소 어린 지적도 나왔다.
 
  공훈의(孔薰義) 소셜뉴스 대표는 “새누리당은 SNS 정책의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셈”이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새누리당은 SNS상의 소통은 ‘건수’가 아니라 ‘진정성’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핵심을 놓치고 있다. 비록 평소 트위터를 자주 하지 않다가도 진정성이 담긴 트윗 하나가 순식간에 표심을 흔들 수도 있다. 거꾸로 아무리 많은 트윗과 리트윗이 번지더라도 그 내용이 부정적인 경우도 허다하다. 무엇보다 트위터를 어떤 식으로 써야 하는지 정해진 공식은 없다.”
 
  ‘고난도 정치쇼’를 바라보는 유권자의 시각은 어떨까. 서울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변종국(卞鍾國·27)씨는 “어느 순간부터 정치인들의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변했다”며 “‘소통’보다는 ‘실적보고’에 치중한 트윗은 아무리 도배를 해도 절대 안 보게 된다”고 했다.
 
  변씨는 “대한민국 트위터엔 ‘기자(writer)’와 ‘전달자(messenger)’는 있지만, ‘리더(reader)’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많은 이용자가 매 순간 소식을 올리고 퍼 나르지만, 정작 이를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의미다. 실제 트위터 공간에 날려진 수많은 트윗 중 대다수는 바로 사장된다. 트위터상에서 유명세를 치른 특정인의 트윗만 제대로 읽힌다는 ‘SNS 양극화’란 용어까지 등장했다.
 
 
  트위터 이슈의 주요 출처, ‘나꼼수’
 

기자의 트위터에 강용석 의원 명함 사진을 올렸더니, 다음 날 주요일간지 인터넷판에 트윗 내용이 보도됐다.


 국내에서 이슈를 만들어 낼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트위터는 전체 이용자 수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이다. 일부에선 영향력이 막강한 몇몇 트위터를 들어 “(트위터 세상에서) 강용석은 부장검사, 진중권은 부장판사, 이외수는 대통령”이란 해석이 떠돈다. ‘쉴 새 없이 의혹을 쏟아내는’ 강용석 의원과 ‘모든 이슈를 판정하는’ 문화평론가 진중권(陳重權)씨, 그리고 ‘최다(最多) 팔로워에 좋은 소리만 한다는’ 소설가 이외수(李外秀)씨를 빗대 표현한 말이다.
 
  실제 트위터 세상에선 ‘그들만의 리그’가 진행 중이다. 과거 이슈를 단순 재생산하던 역할을 뛰어넘어 각종 기성 언론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에까지 이르렀다. 매일 논란이 제기되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속도 빠른 트위터에선 이미 결론까지 난 이슈가 다음날 신문엔 ‘사건의 발단’만 보도되는 사례도 발생한다.
 
  최근 트위터를 뜨겁게 달군 이슈 중 상당수는 정치·시사 토크쇼 팟캐스트인 ‘나는 꼼수다(나꼼수)’가 제기한 의혹이거나 멤버 본인들에 얽힌 구설수들이다. 대표적 사례가 ‘나꼼수 비키니 사건’이다. ‘나와라 정봉주 국민운동본부’ 홈페이지의 ‘1인 시위 인증샷’ 코너에 한 여성이 비키니 차림의 사진을 올린 게 화제가 됐다. 여성의 가슴에는 “가슴이 터지도록 나와라 정봉주”란 민주통합당 정봉주(鄭鳳株) 전 의원의 ‘석방 기원’ 문구가 적혀 있었다.
 
  트위터리안(트위터 사용자를 뜻하는 용어)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신선하다’ ‘재미있다’란 긍정적 반응과 ‘과하다’ ‘선정적이다’는 부정적인 반응이 뒤섞였다. 정작 논란은 사진에 대한 ‘나는 꼼수다’ 멤버들의 반응 때문에 커졌다. 나꼼수 멤버인 김어준(金於俊) <딴지일보> 총수, 시사평론가 김용민(金容敏)씨, 주진우 《시사IN》 기자가 정봉주 전 의원을 면회하기 위해 제출한 면회신청서에 “비키니 사진 대박이다. 코피 조심해라” 등의 문구를 적은 게 화근이었다. 트위터에선 곧바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본 것”이란 주장이 제기됐다.
 
  소설가 공지영(孔枝泳·@congjee)씨는 “나꼼수의 비키니 가슴 시위 사건 매우 불쾌하며 당연히 사과를 기다립니다”란 글을 올렸다. 평소 나꼼수 멤버들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공씨마저 나꼼수를 비판하고 나서자 트위터리안들은 “사과해야 한다”와 “사과할 필요 없다”는 입장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다. 한 남성은 자신의 누드 사진을 올렸고, MBC 이보경 기자는 자신의 비키니 사진을 올렸다.
 
  진중권(@unheim)씨는 “남자가 누드 찍고, 중년의 여기자까지 비키니 입고, 원래 사진의 당사자는 사과하면 고소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남이야 옷을 벗든 말든, 그것은 그들의 표현의 자유입니다. 다만 이 높아 가는 노출의 수위가 왠지 섬뜩한 느낌을 줍니다”라고 평했다.
 
 
  나꼼수 비키니 논란
 

‘나와라 정봉주 국민운동본부’ 게시판에 올라온 한 여성팬의 비키니 사진(왼쪽)과 MBC 이보경 기자가 트위터에 올린 비키니 사진.
  비키니 시위에 대해 나꼼수 멤버 김어준씨는 “성희롱이 아니다. 사과할 마음이 없다”고 밝혔다. 이에 영화감독 이송희일(@leesongheeil)씨는 “김어준, ‘비키니 발언이 성희롱이 되려면 권력관계나 불쾌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청취자와 우리 사이에는 그런 게 없다. 비키니 시위는 호오(好惡)의 문제라고 본다’ 이 세상에는 나꼼수와 나꼼수 청취자밖에 없나 보죠?”라고 비판했다.
 
  사건은 정봉주 전 의원의 편지가 공개되며 더욱 거세졌다. 지난 2월 8일 공지영씨는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정봉주 전 의원 삼국카페(여성 인터넷 카페 연합)에 사과편지 보냈답니다. ‘F4(자칭 나꼼수 멤버들)는 하나니 내가 사과하면 모두 사과한 거다. 사과란 잘못에 대한 것도 있지만 상대방들의 상처를 공감하는 대인의 풍모를 보이는 거다. 이게 다 나꼼수의 지주인 내가 빠진 탓이니 너그러이 봐주시라’ 편지 받으신 삼국카페님들. 편지 공개해 주시면 감사!”
 
  이 글을 본 트위터리안들은 “어떻게 사과를 요구할 수가 있느냐” “면회 가서 사과를 요구하다니” 등의 반응을 보이며 공지영씨를 비난했다. 결국 공씨는 “이런 식으로 연예인이 자살할 수도 있었겠다 절감했다”며 잠정적 ‘트위터 절필’ 의사를 밝혔지만, 5일 만에 재개했다.
 
  나꼼수 비키니 사건으로 ‘우리편’이 분열됐다는 ‘자아비판’적 트윗도 있었다. 성공회대 탁현민 교수(@tak0518)는 “이제 결과를 보죠. 저는 멘붕(‘멘탈 붕괴’의 약자로 혼란스런 심리상태를 뜻하는 신조어)까지 치고 왔고, 공지영은 트윗을 접었고, 주진우는 실제로 코피가 터졌고, 김어준은 다시 목이 아파졌고, 김용민은 아버지에게 욕먹었고, 문제 제기한 여성분들은 흡족하지 않고 아무도 웃지 않습니다. 웃는 사람들은 저쪽에 있죠.” “이 엄혹한 시기에, 공지영도, 나꼼수도, 김제동도, 이외수도, 강풀도, 김여진도, 그 누구라도 하나, 둘씩 사라진다면… 차이를 보면 크겠지만 지향을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최소한의 수준에서 손잡자는 게 그렇게 못할 일인지 전 모르겠습니다”라고 전했다.
 
  진중권씨는 “공지영 트윗 접었다는 소식이 실시간 1위. 나의 코멘트. 내부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얼빠진 극렬분자들이 그 입으로 ‘적 앞에서 단결하자’고 외치면서 실제로는 분열주의적 책동이나 하고 싸돌아다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 예죠”라고 평했다.
 
 
  정봉주法 對 나경원法
 
  정작 ‘비키니 시위’의 원인이었던 ‘정봉주 전 의원 구명’은 뒷전이 됐다.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된 정 전 의원이 ‘무죄’라는 트윗글은 정치인들이 많이 올렸다. 민주통합당 정동영 의원(@coreacdy)은 “‘옛날 징역 살 때 징역이 아니에요. 너무 좋아요.’ 봉도사(정봉주 전 의원) 익살은 여전했다. ‘서울o77 수인번호 앞에 붉은 동그라미는 뭐냐’고 물었더니 ‘잘했다는 표시예요.’ 깔깔깔. 순간 웃음바다가 됐다. 역시 정봉주다!”라고 전했다.
 
  이종걸(李鍾杰·@leejongkul) 의원은 “오늘 아침 건강한 정봉주를 만났습니다. 그 웃음은 그대로인데, 웬 요구사항이 그리 많아. 전 초선에게 현 삼선이 줄 서기도 힘드네요. 봉도사 전하는 말, ‘정봉주와 미권스(정 전 의원의 팬클럽 ‘정봉주와 미래 권력들’)가 뿌린 눈물 위에 표현의 자유라는 꽃을 피워 주십시오, 민주주의여’”라고 적었다.
 
  “정봉주 전 의원을 구명하겠다”는 정치인도 많다. 민주통합당 이인영(李仁榮·@Lee_ InYoung) 최고위원은 “정봉주 형과는 전민련 시절부터 함께 김근태 선배를 보좌하던 동지입니다. 정봉주 형 면회 가고 싶지만 선거용인 것 같아서 15일 이후에 가려고 생각 중입니다. 그래도 저는 정 의원 구하기에 앞장서겠습니다”라고 밝혔다. 같은 당 박영선(朴映宣·@Park_Youngsun) 최고위원도 “정봉주법이 민주통합당 당론으로 조금 전 채택되었습니다”란 글을 올렸다.
 
  ‘정봉주법’에 맞서 ‘나경원법’을 주장하는 트위터리안들도 있다. ‘나경원 피부과 1억 의혹’이 조사결과 ‘허위’였다는 것이 드러나자 반발이 시작됐다. 정봉주법이 ‘표현의 자유’를 외친다면 나경원법은 ‘허위사실 유포 강경대응’을 말하고 있다.
 
  정 전 의원과 케이블 토론프로그램에서 논쟁한 20대 학생으로 이슈가 된 윤주진(@yoonjujin)씨는 “선거운동시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치명적 손상을 방지하자는 나경원법과, 선거운동시 허위사실 유포로 감옥에 간 사람을 구제해 주자는 정봉주법. 어떤 법이 상식입니까? 어떤 법이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를 공정하게 만들 법입니까?”란 글을 게시했다. 공정사회시민행동(@poli815) 측은 “저질 막장 나꼼수 비키니 쇼에 이어 주진우의 나경원 1억 피부과 발언도 허위로 판명… 닥치고 거짓에, 닥치고 성희롱까지 막장으로 달리는구나”라고 비판했다.
 
강용석 의원, 문화평론가 진중권씨, 소설가 이외수씨 트위터(위에서부터) .
 
  선관위 디도스 내부 개입說
 
  나꼼수 비판은 소위 ‘진보 진영’에서도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진중권씨다. 진중권씨는 나꼼수를 ‘신앙’이라고 규정했다. 나꼼수 측의 주장을 모두 믿는 것은 종교와 같다는 말이다. 진중권씨는 나꼼수가 제시한 소위 ‘음모론’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나꼼수 팬들과 논쟁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10·26 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DDoS)’ 사건이다. 나꼼수 측은 선관위가 이 사건에 개입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공지영씨 또한 “선관위 디도스 공격 문제가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데 모두들 가만히 있는 것이 이해 안 갑니다. 이게 그냥 덮어 줄 정도의 가벼운 사안이 아닌데 왜 이리 조용한지 이해 불가입니다”라는 글을 리트윗했다. 나꼼수 멤버인 김용민(@funronga)씨는 “비키니 이야기는 귀 쫑긋, 선관위 부정선거 은폐 기도에는 귀 닫고. 관음증을 극복합시다. 기자님들”이라고 전했다.
 
  진중권씨는 “선관위 개입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의 트윗 중 일부다.
 
  “김어준은 왜 그러냐고요? 처음에 접속 불편이 있었죠. 그래서 늘 하던 대로 음모론 편 겁니다. 선관위 부정선거 쪽으로. 근데 엉뚱하게 디도스가 터져 버린 거예요. 그 음모론이 어떻게 보면 어설프게 맞고, 어떻게 보면 확실하게 틀렸던 거죠.
 
  내부개입이 맞는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럼 얼마나 많은 황당한 가설들이 필요할까요? 선관위 DB 차단조, 동사무소의 투표소 변경조, 한나라당의 디도스 공격조… 이 거대한 조직을 무슨 수로 비밀리에 운영하나요? CIA가 들러붙어도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니 선관위 DB 차단조, 선관위 투표소 변경조, 제3의 인물, 디도스 공격조로 이루어진 거대한 음모론을 믿고 싶은 분들은 계속 믿으세요. 대한민국 헌법은 신앙의 자유를 인정합니다. 다만, 자신의 신앙을 남에게 강요하지는 마세요.”
 
 
  박원순 시장 아들 병역비리說
 
  진중권씨는 트위터 ‘전사’ 격이다. ‘우리 편’뿐 아니라 ‘남의 편’과도 싸우기 바쁘다. 무소속 강용석 의원과의 ‘박원순 서울시장 아들 병역비리’ 논쟁이 대표적이다. 강용석(@Kang_younseok)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박원순 시장의 아들이 신검 4급 판정을 받은 게 잘못됐다”고 주장하며, 박원순 시장 아들이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점프하는 동영상을 보내 주면 현상금을 주겠다는 안도 제시했다.
 
  강 의원은 아들의 병역비리 논란에 ‘잔인하다’고 평한 박원순 시장을 직접 비판하기도 했다. “박원순 2000년, 2004년 낙천낙선 운동할 때도 수많은 정치인이 잔인하다고 항변했습니다. 입장 바뀐 박원순의 변명이 가증스럽습니다 … 박원순 당신은 이제 시민운동가 아닌 대한민국 No.2 권력자 서울시장입니다. 더 이상 약자인 척하는 감성팔이는 허용되지 않아. 잔인하긴 뭐가 잔인해 공개신검 응하면 되지.”
 
  진중권씨는 강 의원의 의혹 제기에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진씨는 “내가 우리편이라고 봐주는 사람인가요? 한마디로 박원순 시장 건은 강용석 의원이 빈 카드 들고 개인정치 하는 겁니다. 의원님도 끈 떨어질 때가 돼서 그런지, 제보의 수준이란 게 고작 네티즌 고자질 수준이네요”라고 비판했다. 당시 그의 트윗 중 일부다.
 
  “병역법 위반? 그건 병무청에서 판정을 잘못했다는 얘길 텐데… 박원순 시장이 병무청에 압력을 넣었을 가능성은 강용석 의원 자신이 부정합니다. 고로 설령 판정이 잘못된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남은 건, 공무원 징계. 내가 이미 말했잖아요 … 아, 박원순 시장이 너희들이 볼 때는 못하고 있다고? 그럼 그걸 까세요. 그게 바로 정책대결이니까. 너절하게 카메라 들고 남의 사생활이나 뒤지지 말고….”
 
  지난 2월 13일 강 의원은 진씨가 “강력한 한 방이 없다”고 비꼰 것에 대응해 직접 입수한 박원순 시장 아들의 MRI 사진을 공개했다. 강 의원은 공개한 MRI가 “병역을 피하기 위해 박원순 시장 측이 바꿔치기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박원순 아들 박주신의 MRI 사진을 입수했는데 지금 신경외과, 정형외과 의사들의 의견을 받고 있습니다. 사진상 살이 많이 쪘는데 박주신은 날씬합니다”란 트윗을 남겼다.
 
  이에 진씨는 “강용석이 정치적 생명이 끊어질 위기에 몰리니까 마지막 불꽃처럼 정치 포르노의 극단으로 달려가는 거죠. 가끔 한번 툭 쳐 주면서 느긋하게 즐기면 됩니다. 지금 고발하면 그 이슈, 얼추 총선까지 끌고 갈 겁니다. 짱구는 참 잘 굴려요”라고 반박했다.
 
 
  안철수연구소 주가 조작說과 <부러진 화살>
 
지난 2월 13일 SNS 기반 뉴스 사이트인 ‘위키트리’ 생방송에 출연한 강용석 의원. 강 의원은 이날 박원순 서울시장 아들의 병역비리를 주장하며 MRI 사진을 최초로 공개했다.
  강용석 의원과 진중권씨의 ‘트위터 전쟁’은 이뿐이 아니다. 안철수연구소의 주식 문제를 두고도 트위터상에서 설전을 벌였다. 발단은 강용석 의원이 제기한 의혹 때문이었다. 강 의원은 “안철수의 BW통한 주식저가인수. 안철수, 2000년에 안철수연구소 주식 장외에서 5만원 할 때 주당 1710원에 146만주 인수. 이전 140만주였던 주식수를 286만주로 늘려”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안철수연구소 측은 “사실무근”이라며 “무상증자, 액면분할 때문에 주식 가격이 낮았다”고 반박했다. 진중권씨는 트위터에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샀다고 해서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액면분할했다네요. 무상증자에 1/10로 액면분할하면 당연히 가격이 그 정도로 떨어지죠. 강용석의 어처구니없는 헛발질”이라고 게시했다. 강 의원은 안철수연구소 측의 해명을 트위터로 재반박했다.
 
  “안철수 변명이 신문마다 다 달라. 주식인수가 1710원은 공시자료에 나온 것. ‘주주들이 원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 주주들의 고발로 구속 일보 직전까지 갔었는데 … 안철수 거짓 변명하지 않으면 전환사채 문제는 그냥 넘어가려 했으나 자꾸 헛소리하면 전환사채 문제도 본격적으로 짚어 다음 주 추가 고발할 것.”
 
  영화 <부러진 화살>을 두고 벌어진 논란의 중심에도 진중권씨가 있다. 사법부 판결에 앙심을 품은 김명호(金明浩) 전 성균관대 교수가 석궁을 들고 판사 집에 찾아간 사건을 극화한 영화 <부러진 화살>에 트위터리안의 관심은 뜨거웠다. 정지영(鄭智泳) 감독과 당시 김명호 전 교수의 변호를 맡았던 박훈(朴勳) 변호사는 “영화는 진실을 90% 이상 재현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진중권씨는 트위터에 “부러진 화살 논란? 영화는 허구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현실로 착각하면 안 되죠. 그 영화를 사실로 보라는 모 기자의 말은 영상의 원리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코웃음칠 얘기. 필리핀에 있어서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공판기록은 다 읽었습니다”라는 글을 올려 영화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그 후에도 “영화는 사실이다”란 의견이 계속되자 진중권씨는 “이걸 그냥 극영화라고 했으면 별문제 없었을 겁니다. 근데 박훈 변호사, ‘100% 사실이다’, 정지영 감독 ‘90%의 사실과 10%의 허구’, 허재현 기자 ‘100% 공판기록을 토대로 한 영화’ … 왜 쓸데없이 거짓말을 합니까”라고 비판했다. 아직도 트위터상에서는 영화 <부러진 화살>의 진실성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진중권 향한 비판과 새누리당 로고
 
  진중권씨를 비판하는 트윗글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등장한다. 팔로워 2만명을 보유한 이른바 ‘진보 성향의 파워 트위터리안’ 레인메이커(@mettayoon)는 “진중권의 오만함의 근거가 무엇인가. 철학과 논리로는 도올 선생을 넘을 수 없고, 법 지식에 대해서는 조국을 넘을 수 없고, 네트워크 보안에 대해서는 안철수를 넘을 수가 없고, 쓴소리로는 명진 스님을 넘을 수 없는데. 왜 모든 것을 아는 듯이 구는 것이냐”라고 비판했다.
 
  변희재(邊熙宰·@pyein2) 미디어워치 대표는 “예전 MBC 백분 토론에서 토론 잘하는 논객― 진중권, 유시민, 노회찬, 이렇게 늘어놓았는데, 이거 모두 낡은 발상이죠. 토론 잘하는 논객은 해당 분야 전문가들입니다. 전문성 없는 자들이 토론 잘한다면, 팩트와 논리 없이 거짓선동 일삼았단 뜻이죠”라고 전했다.
 
  트위터에는 진중권씨 패러디 계정(@unhaim, @unhiem, @uhheim 등)까지 생겼다. 패러디 계정 이름은 ‘친정권’ 또는 ‘친중권’으로, “정권이랑 친하다. 제가 바로 논리와 법의 제왕” 등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트위터의 속도성 때문에 발표 즉시 이슈가 되는 경우가 많다. 옛 한나라당의 당명 개정도 그중 하나다.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이라고 당명을 개정하자 많은 트위터리안이 ‘조롱’에 가까운 글을 올렸다. 다수의 로고 패러디물도 함께 공개됐다.
 
  통합진보당 노회찬(魯會燦·@hcroh) 공동대변인은 “누릴 것 다 누려 놓고 새로 또 누리려는 사람들이 있군요. ‘새누리’는 ‘또누리’입니다. 제발 ‘그만누리’시지요”라고 전했다. 성공회대 탁현민 교수는 “누리라는 뜻에 농작물에 큰 해를 끼친다는 의미가 있는데. 네이버가 이 단어의 뜻을 잽싸게 삭제했네요. 정말 갖은 지랄을 합니다. 3번만 삭제했네요”라는 트윗을 올렸다.
 
  연세대 김호기(金皓起·@kim_hoki) 교수는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독일 사민당과 기민당 등 세계 주요 정당들 이름은 오래됐습니다. 당의 권력을 누가 잡든, 중요한 건 인물보다는 이념, 노선, 정책을 포함한 전통입니다. 위기가 닥치면, 리더가 바뀌면 당 이름을 바꾸는 우리 정치, 한참 멀었습니다”라고 비판했다.
 
새누리당 로고 발표 후 트위터에 올라온 패러디물들.
 
  판사 징계 찬반 논란
 
  보수 진영 쪽의 ‘일갈’도 많았다. 한 보수 논객은 “그 새누리가 뭔지요? 아무도 모르는데 혼자 꿈꾼 것 좀 압시다. 제가 보기에는 말뿐이지 새누리가 뭔지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닭대가리에서 생각한 새누리? 뻔한 것 같습니다”라고 비판했다. 윤주진씨는 “새누리당 로고와 당명을 보고 내 친구가 한 말, ‘간첩 있는 거 아니야?’”라고 했다.
 
  서기호(徐基鎬) 판사의 재임용 부결과 이정렬(李政烈) 판사 6개월 정직 뉴스도 등장하자마자 트위터의 이슈가 됐다. 트위터리안들은 ‘서기호 구하기’ 계정을 만들었다. 이외수, 공지영, 김여진씨 등이 리트윗을 해 동참 의사를 밝혔다.
 
  민주통합당 김진표(金振杓·@jinpyokim) 의원은 “개념판사 서기호, 이정렬 두 분에 대한 법원의 징계는 철회되어야 합니다”라고 전했다. 민주통합당 정동영 의원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트윗을 남겼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공동대표(@heenews)는 “서기호 판사가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판결해야 한다는 법관의 책무를 어떻게 위반했는지, 부적격 판정의 어떤 타당한 이유도 저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새누리당 전여옥(田麗玉·@okstepup) 의원은 “서기호, 이정렬 이런 이들, 대한민국 덕분에 먹고 살다가 이제 대한민국을 뿌리째 흔들고 파괴하려 합니다. 서기호 판사는 지난 10년 DJ, 노무현 정권 때부터 내리 꼴찌를 했다는 것도 참고하고. 그런데도 잘리지 않은 것에 대해 특정 세력이 봐준 것 아니냐는 의심에 답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SNS와 ‘눈’
 
  2002년과 2007년 대선은 PC와 웹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이 선거판을 뒤흔들었다. 대다수 전문가는 올해 총선과 대선을 좌지우지하는 역할을 SNS가 할 것이라 전망한다. ‘2030 세대’로 불리는 젊은 이용자가 흐름을 주도해 전 국민의 정확한 의사를 알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지만, 선거 여론을 주도하는 연령층이 기존 40~50대 중년층에서 20~30대로 바뀌어 SNS 여론이 곧 선거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SNS가 ‘정치적 도구’일 뿐 아니라 정치지형 자체를 바꿨다는 의미다.
 
  블로그와 미니홈피 등 기존의 개인미디어도 SNS를 통해 재탄생됐다. 적은 구독자 수와 상대적으로 어려운 사용법 등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블로그와 달리, SNS는 쉽고 간편한 방식으로 ‘나만의 언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 140자 이상의 긴 글일 경우 블로그에 뉴스 형식으로 작성한 후, 핵심내용과 기사 링크 주소를 트윗하면 된다. 2월 14일 현재 팔로워 수를 기준으로 하면, 진중권씨는 약 21만명의 독자를 보유한 미디어를 운영하는 셈이다. 소설가 이외수씨는 121만 독자다. “웬만한 기성 매체의 보도보다 이외수의 리트윗 한방의 영향력이 더 크다”는 의견이 나온 이유다.
 
  SNS 돌풍에 신조어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트위터와 사람들의 합성어인 ‘트위플(tweeple)’, 트위터와 친구의 합성어인 ‘트친’, “정치적 성향이 강한 트위터”란 뜻의 ‘폴리터리안(politterian)’, “SNS 등을 이용하며 스마트폰을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는 인류”란 뜻의 ‘스마트포노이드(smartphonoid)’, “SNS 등 사이버 공간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이란 뜻의 ‘스마티켓(smartiquette)’ 등 계속 생성되고 있다.
 
  ‘SNS’를 한글 자판으로 치면 ‘눈’이 된다. 복잡하고 어려운 신조어들보다 “전 세계 누구나 당신이 쓴 트윗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원초적인 사실이 더욱 와 닿는 이유는 왜일까.


월간조선 2012년 3월호 - 기사 원문 보기

▶ [SNS 특집] 한국정치, SNS 以前과 以後로 나뉜다
▶ [SNS 특집] 인턴기자가 체험한 팔로워의 허상
▶ [SNS 특집] 세상에서 가장 쉬운 SNS 활용법
▶ 김유식 대표 월간조선 기고문 ‘新보수 네티즌’의 등장 - 인터넷은 北進 중
▶ [기자수첩] “4G는 또 뭔가?”
▶ 심층분석 | 농협사태로 들여다본 해커들의 세계 “노리면 다 뚫는다”
▶ 北 사이버 공격시 15분 만에 주요시설 초토화
▶ 인터뷰/ ‘연평도 北傀도발 갤러리’ 개설한 디시인사이드 김유식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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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보수 네티즌’의 등장
인터넷은 北進 중

⊙ PC통신으로 힘 키운 전교조 세대가 초기 인터넷 문화 장악… 이념투쟁 도구로 이용해
⊙ 감성적 호소와 ‘떼거리’ 문화 선점해 보수논객 공격
⊙ “마지막까지 싸우는 놈이 이기는” 인터넷 특성상 안정된 직장· 바쁜 일상의 보수파는 자리 잡기 어려워
⊙ ‘햇볕정책의 실패’ 목격한 젊은 ‘新보수 네티즌’의 등장으로 새 질서 형성


김유식 디시인사이드 대표
 

김유식


 이제는 한여름 대학 도서관을 찾아 땀 흘리며 논문 색인을 검색하지 않아도, 책상에서 마우스 클릭만으로 전 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과거 출판물로는 금기시됐던 각종 정보가 언제부턴가 인터넷을 통해 판도라 상자처럼 열려 쏟아져 나온다.
 
  지식인과 전문인의 전유물이었던 정보를 누구나 손쉽게 접하다 보니 고급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미네르바’ 같은 대학교수 뺨치는 인터넷형(型) 지식인이 탄생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려 하며,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을 찾아 헤매고 조직화를 시도한다.
 
  인터넷을 통한 소통의 영역이 무한대로 넓어졌다. 우체국까지 가지 않아도 청와대는 물론 백악관까지 항의서한을 보낼 수 있다. 원고지 뭉치를 들고 출판사를 기웃거리지 않아도 대중의 평가 속에 스타 작가 또는 논객의 탄생이 가능하다. 정보와 소통의 새 장(場)이 신기루처럼 열렸다.
 
  선전과 선동을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급진 좌파(左派)들에게 인터넷이 그 어찌 매력적인 공간이 아닐 수 있겠는가. 첨단기술의 인터넷 속에 ‘감성’이라는 핵심적인 전략 키워드를 간파한 그들은 미개한 식민지에 입성하듯 이념의 무주공산(無主空山)인 인터넷 세상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PC통신이 대한민국에 확산한 시기는 1990년대 초다. 초창기 24Kbps(초당 킬로비트) 모뎀으로 한국경제신문사가 운영한 PC통신망 ‘케텔(KETEL)’에서 토론놀이를 벌이던 이들의 수는 수만 명이었다. 1990년대 중반, 케텔은 ‘하이텔’로 바뀌었다. 케텔의 전(前) 직원들이 주축이 돼 만든 나우콤의 ‘나우누리’, 후발주자로 삼성SDS의 ‘유니텔’ 등이 등장하며 몇 년간 한국 사회는 파란 화면을 가진 PC통신의 전성기가 이어졌다.
 
  대학들은 수강신청을 PC통신 기반으로 접수 받았고 ‘채팅(chatting)’은 젊은 층이라면 필수적으로 거쳐 가는 놀이문화였다. PC통신은 속성상 이용자들이 대부분 10대나 20대의 젊은 층이었고, 젊은이라면 반드시 누려야 할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인터넷 태동기’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 시기의 온라인 세상에선 좌파의 영향력이 미약했다. 사용자 수도 그렇거니와 PC통신 자체가 가지는 한계성 때문이었다.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끼칠 만한 정보와 소통의 공간으로는 어딘가 부족했다.
 
  텍스트가 기반인 PC통신엔 인간의 감성이나 시청각을 자극할 만한 도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요즘의 ‘댓글 문화’는 아예 없었다. 토론 성향의 커뮤니티는 그들만이 향유하는 지엽적 성격으로, 그저 학내 대자보를 올리는 수준이었다. 당시는 전자메일의 개념이 보편화하기 전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1990년대 PC통신을 이용하던 세대가 이른바 ‘전교조 세대’라는 점이다. 민중주의 신화(神話)의 잔재가 아직도 짙게 드리워져 있던 시기에 활동한 이 세대는 일정 부분 ‘친북(親北) DNA’를 가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중립 성향의 네티즌들은 좌파에 대한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고, 이념적인 면역력도 약했다.
 
  PC통신이 정보와 소통의 권좌를 본격적으로 인터넷으로 넘겨주기 시작한 1990년대 말, ‘친북 DNA’를 가진 네티즌들은 일제히 인터넷으로 말을 옮겨 타면서 한국사회의 이념지형을 밑바닥부터 흔들어버리는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전교조 세대’가 주도한 1990년대 PC통신 문화가 2000년대 인터넷으로 넘어오면서 ‘인터넷 좌경화’를 견인했다. 사진은 PC통신 하이텔 접속 화면.
 
  ‘전교조 세대’가 주역이 되기까지
 
  김대중(金大中) 정권은 출범 때부터 정보화를 성장동력으로 삼고 IMF 탈출을 위해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육성했다. 정보화의 기치 아래 대한민국이 들썩이면서 ADSL(비대칭형 디지털 가입자망)이 방방곡곡 깔리기 시작했다. PC통신 시대가 업그레이드하며 인터넷 시대로 진화한 셈이다.
 
  ‘전교조 세대’는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주역이 됐다. 1989년 전교조 설립과 대량 해직사건 당시 중학생이었던 이들이 20대 중반의 패기만만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던 사춘기에 전교조 교사들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그들은 스승이 교단에서 쫓겨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교단에 오른 교사들에 의해 조금씩 의식화했고, 해직된 교사들을 그리며 정부에 대한 막연한 반발심을 키웠다. 형과 누나, 언니와 오빠들이 전교조를 위해 명동성당에서 단식하고 농성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거리에서 일어나는 민주화의 거센 풍랑을 직접 경험했다.
 
  ‘똘이장군’의 북한을 상상하다 임수경(林琇卿) 씨가 북한을 방문하자 ‘북한도 살 만한 곳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갖게 됐다. 수배 중인 미남 운동권 대학생이 여학생들의 우상이 되고,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한 잡지의 인기순위에서 영화배우 주윤발(周潤發)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시절이었다.
 
  이들이 20대의 성인으로 성장하고 독자적인 행동력을 갖추기 시작한 즈음 인터넷이 확산됐다. 시기적으로 절묘했다. 한총련이 법원에 의해 이적단체로 규정되고 대학가의 좌파세가 본격적으로 꺾이던 무렵이었지만, 전교조 세대는 인터넷에서 실질적인 여론 주도층으로 자리 잡으며 점차 그 존재감과 ‘좌파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최루탄과 화염병의 거리에서 역사가 진동하는 것을 목격하고 전교조 교사들에게서 ‘좌파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10대를 보냈던 그들에게 인터넷은 민중주의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줄 새로운 투쟁의 도구가 됐다.
 
  거리에 나서지 못해 ‘시대의 부채’를 짊어진 소심한 386들도 화염병과 깨진 보도블록 대신 마우스를 움켜쥐고 함께 나섰다. PC통신 시절부터 온라인 세계의 습성을 간파한 이들은 실증보다는 수사법과 감정호소에 능숙했다.
 
 
  인터넷 영향력 간과한 ‘보수’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김영삼(金泳三)으로 이어지는 적개심과 보복의 대상이 현실정치 저편으로 사라지자, 그들이 남겨 놓은 보수의 유산인 한나라당은 이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됐다. ‘민중’ 또는 ‘통일’을 내건 집단과 정당은 그 실체를 자세히 알아보기도 전에 무조건 선(善)과 정의(正義)가 됐다. ‘반(反) 한나라당’은 젊은이가 응당 지녀야 할 교양으로 보는 풍조가 만연했다.
 
  전교조 세대의 인터넷 선점 효과는 놀라웠다. 이 세대가 발 빠르게 감성을 통해 인터넷을 장악해 나가면서 보수우익은 점차 인터넷 어느 공간에서 발붙이기 어려운 구닥다리 사상으로 전락했다.
 
  ‘YS 정권의 유일한 치적’이라며 네티즌들이 놀리는 1996년 한총련 탄압 시절, 방송과 신문 등 전통적 매체들은 한총련 탄압의 정당성을 설파했고 여론의 지지도 적극적이었다. PC통신 세상에선 적지 않은 네티즌이 탄압의 부당성에 항의하며 치열한 이념 난투극을 벌였다. 현실에서 체감하는 실제 여론과 온라인 여론은 확실히 많이 달랐다.
 
  좌파성향의 PC통신 사용자들은 당시 일명 ‘게시판 투쟁’을 통해 한총련 활동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점차 조직화됐다. 소수 정예가 게릴라식으로 벌이는 여론투쟁은 ‘넷(net)심(心)’을 흔드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온라인에서 이런 선동의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경험한 좌파 성향의 논객들은 인터넷으로 흘러들어와 저마다 자신의 체질에 맞는 사이트를 찾아 안착하거나 직접 개설했다. 이들이 파놓은 참호가 2000년 이후 좌파 ‘키보드 워리어’(keyboard warrior·인터넷 싸움꾼)의 집단 서식지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일명 ‘보수’는 인터넷이 가진 파괴력과 영향력을 간과했다. 여전히 ‘무찌르자 공산당’ 식의 낙후된 마인드에 머물러 있었다. 반면 좌파 논객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갈고 닦은 식견과 세련된 주장을 쏟아 냈다.
 
  젊은이들의 감성을 일깨울 ‘진보’ ‘평화’ ‘희망’ ‘사람’ ‘사랑’ ‘노동’ ‘통일’ 등 개념을 선점해 포퓰리즘이 짙게 밴 용어를 적절하게 구사했다. 주체사상엔 ‘사람 중심의 시대정신’이란 인간미 넘치는 타이틀을 갖다 붙였고, 반미(反美)의식이 내재한 반정부 시위를 문화제라고 포장했다. ‘우리 민족끼리의 통일’, ‘함께 나누자’, ‘같은 민족은 도와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병역면제 자식을 둔 아버지에게 군(軍)통수권을 맡길 수 없다”는 식의 레토릭(修辭)은 네티즌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현실정치계를 흔들었다.
 
 
  좌파 네티즌의 전략
 
  인터넷에서 부자는 공공의 적, 가진 자는 질시의 대상이 됐다. DJ-노무현(盧武鉉) 정권 10년 동안 대한민국 인터넷은 좌(左)로 45도 기울었다. 올바른 방향성을 상실했지만, 인터넷은 현실세계보다 무한대로 파급력이 강한 공간이다. 누군가 올린 글은 ‘퍼가기’를 통해 사발통문처럼 전달됐다. 진원지를 알 수 없는 루머도 사실인 양 입소문으로 퍼졌다.
 
  좌파 네티즌들은 우파의 주장을 반박할 간단명료한 이념적 논거와 지침을 만들고 공유했다. 2선에 있던 심정적 좌파 네티즌들도 점차 동조됐다. 훈련된 좌파들이 던지는 지식 쪼가리에 대한민국을 지키는 건전한 상식이 송두리째 부정됐다.
 
  “북한을 왜 비난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는 “비난도 비난을 할 자유가 있어야 비난한다. 노동당 문서를 보게 국가보안법을 개정해 다오”라는 식으로 슬그머니 논점을 바꿔 일축했다. ‘대북 쌀 퍼주기’를 지적하면 “지금 북한 주민이 인육까지 먹어 가며 굶어 죽고 있다”고 울부짖는 감성적 호소가 들어 먹혔다.
 
  핵(核) 개발에 대한 비난엔 “우리 민족이 핵을 갖게 돼 오히려 자부심이 생겼다”는 식으로 맞섰다. “지금 전쟁하자는 것이냐?”는 대답은 이곳저곳에서 쓰였다. 직업 운동가인 양 행세하는 네티즌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평범하고 얌전한 직장인인 경우가 많았다. 소심해서 거리에 나가지도, 구호 하나 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단 키보드만 잡으면 용감해지고 과격한 주장을 일삼는 맹렬한 전사로 바뀌었다.
 
  좌파 네티즌들은 보수를 우롱할 ‘떡밥’(낚시성 글)을 도처에 뿌리며 인터넷 전반의 헤게모니를 야금야금 장악해 나갔다. 과격 종북 세력은 김일성(金日成) 자서전을 인용한 북한 찬양은 물론 김정일(金正日) 찬양까지 해대며 국가보안법의 무력화를 시도했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여중생들을 들어 “한국인의 목숨을 하찮게 여긴다”며 민족적 자존심을 교묘히 건드렸다. 이른바 ‘안티조선 운동’ 등은 보수언론뿐 아니라 소설가 이문열 등 보수인사 때리기를 시도하면서 문화 전반에 타격을 입혔다.
 
  좌파들의 1980년대 민중주의 향수는 디지털 시대에 부활했다. 낮은 수준의 연대를 지속해 가며 전선을 구축해 가던 좌파 네티즌들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시위 때 그간 축적된 에너지를 과시했다. 몇 년 후 촛불시위 학습효과를 경험한 이들이 다시 벌인 광우병 촛불시위는 10대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생활 정치’를 표방했지만, 심저(心底)는 MB 정권에 이념적으로 저항한 인터넷판(版) 군중정치 노선의 연장이었다.
 
 
  ‘다구리 모드’와 ‘떼거리주의’
 
2008년 여름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에 참여한 네티즌들이 포털 다음의 토론 게시판 ‘아고라’ 깃발을 들고 집회를 하고 있다. 최근 아고라가 힘이 빠지자 좌파 선동가들은 20대 초반의 젊은 이용자들이 대거 모여 있는 포털 ‘네이트’로 이동하는 양상을 보였다.
  포털 다음(Daum)의 ‘아고라’(Agora)는 비교적 여론 형성의 광장으로 네티즌들에게 잘 알려진 토론 게시판이다.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마치 치열한 토론의 장인 것처럼 보도되지만, 실제 내면을 들여다보면 정상적인 토론이 불가능할 정도로 혼탁하다. 극소수의 ‘개념 게시물’을 제외하면 논리 자체가 무색한 말싸움의 향연이 대부분이다.
 
  아고라의 이념적 좌편향 성격을 꼬집어 네티즌들은 ‘좌(左)고라’ 라고 부르기도 한다. 최근 아고라가 촛불시위 이후로 힘이 빠지자 좌파 선동가들은 20대 초반의 젊은 이용자들이 대거 모여 있는 ‘네이트’(Nate)로 이동하는 양상을 보였다. ‘좌(左)이트’란 말이 나온 것도 그즈음이다.
 
  냉소적 시각 이면엔 건전하고 수준 높은 담론 대신 좌파 네티즌의 ‘떼거리주의’가 숨어 있다. 보수 네티즌의 단결력은 좌파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고 구심체가 없다. 보수 논객의 ‘개념글’이 올라오면 ‘전진무의탁’(사격 준비) 자세로 있던 좌파 네티즌들이 득달같이 물어뜯는다.
 
  ‘자체 화력’이 달린다 싶으면 다른 좌파 성향의 사이트로 가서 지원사격을 호소한다. 속칭 ‘다구리 모드’다. 합리적 이성과 논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해당 게시물을 비하하는 수십,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리고, 서로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침묵하는 다수의 입장이 마치 좌파들의 여론과 동일시되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토론 논리에서 밀리면 상대방을 ‘알바’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좌파 성향의 입맛에 맞는 게시물에는 박수치고 추천한다. 불편한 보수 성향의 게시물은 ‘다구리’시켜 ‘넷심’을 왜곡한다. 행동하는 소수 좌파의 선공(先攻)과 지공(遲攻)에 의해 ‘건전보수’는 서서히 궤멸했다.
 
  오프라인에서의 싸움은 주먹 세고, 목소리 큰 놈이 이기지만 온라인에서는 다르다. 먼저 말 꺼낸 쪽이 유리하고, 많은 글을 쓰는 쪽이 유리하며, 마지막까지 쓰는 쪽이 이긴 것으로 본다. 행여 일부 과격한 우익 네티즌들이 도를 넘어선 게시물이라도 하나 쓰면, 즉시 좌파 네티즌들의 ‘일용할 양식’이 된다. 글 자체가 이리저리 각색되고 퍼 날라져 해당 사이트 수준 전체를 ‘꼴통 집단’으로 딱지 붙이는 데 ‘귀하게’ 쓰인다. 이를 사골처럼 푹 고아 재탕, 삼탕으로 우려먹는다.
 
  정치인들의 발언도 좌파 네티즌의 주요 관심사다. 그들은 본질을 흐리고 의도를 왜곡해 대중을 분노하게 하는 ‘포퓰리즘 수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말 한마디 잘못한 일부 국회의원의 홈페이지는 좌파 네티즌들의 공격으로 서버 다운이 된다. 이런 선동의 공포를 한두 번 겪어 본 이들이라면 이후 다른 소신 발언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인터넷에선 한가한 놈이 이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한두 번 집단 ‘다구리’를 당하면, 보수논객이 떠나가고 해당 사이트는 좌파 성향이 된다. 좌파 성향의 글에 익숙한 네티즌에게 건전한 보수 성향의 주장은 왠지 친숙하지 않고 구시대적이다. 또 촌스럽고 어딘가 불편하다. 면역력이 약한 상태에서 인터넷 좌파 문화에 장기간 드러나 있던 탓이다.
 
  보수 네티즌들은 보통 연령이 좌파 네티즌보다 높은 편이다. 안정된 직장이나 지위가 있는 이들은 시간이 남아 반(半)직업적으로 활동하는 일부 좌파 네티즌들의 공세를 결코 당해낼 수가 없다. 인터넷 토론에선 ‘끝까지 남는 놈이 이긴다’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이다. 바쁜 직장인은 한가한 백수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초창기 보수층 인터넷 유저는 나이가 많아서 인터넷에 대한 접근이 느렸고, 또 인터넷이 가진 힘을 간과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좌파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시위를 유도하며 거리로 내달을 때 이들은 침만 삼키며 강 건너 불 보듯 구경해야만 했다. “젊은 것들이 도대체 왜 그러나?” 혀를 차며 불구경하는 동안 인터넷에서는 대한민국의 보수가 무너지고 있었다.
 
  좌파들에 맞서 시위를 벌인 이들은 눈치 보기 급급한 젊은 보수 네티즌이 아니라 참다못해 거리로 나온 장년층의 애국단체들이었다. 이들이 직접 거리로 나선 것은 행동하지 않는 청년 우익 네티즌들을 향한 무언(無言)의 꾸짖음이다.
 
  좌파 네티즌들의 세(勢)는 DJ를 거쳐 노무현 대통령 집권 중 그 절정에 달했다. 이들의 맏형 격인 386세대의 지원사격도 만만치 않았다. 일찌감치 인터넷에 눈을 뜬 일부 ‘운동권’은 아예 인터넷 업체를 설립해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0년대 말부터 불어닥친 인터넷 벤처 열풍을 보자. 초창기 인터넷 업체 설립은 주로 의식화 교육을 받은 386세대가 주도했다. 이들은 부장, 차장, 과장 등 조직이 분명한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고, 스스로 사장 직위를 가졌다. 이들은 10여 년간 인터넷 업체를 운영하고, 일부는 직접 언론매체를 설립해 ‘좌편향 인터넷’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新보수 네티즌의 등장
 
  모 대형 포털의 뉴스 담당 이사는 이념적으로 확고히 무장돼 있다. 자신의 뉴스팀원들조차 “이런 기사는 너무 편향적”이라고 지적해도 그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역시 반미주의 성향을 가진 모 커뮤니티 사이트의 운영자는 2008년 촛불시위에 대해서 “아주 순수한 시민운동이기 때문에 촛불시위에 반대하는 글을 게시하면 게시물을 삭제하고 강제 탈퇴시키겠다”는 황당한 공지를 올리고 실제로 이행했다. 또 다른 커뮤니티에서는 새로 가입한 이용자에게 “우익 사이트에 가입한 전력이 있다”며 강제 탈퇴시킨 일도 있다. 민주화를 부르짖던 이들이 인터넷에서는 민주화에 역행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다.
 
  인터넷 사이트 운영자들은 초기부터 좌파 성향을 띠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젊은 이용자들의 입맛에 부응하기 위해 생계형 좌파가 돼야 했다. 완장 찬 조선사람이 일본순사보다 더 무섭다고, 그들의 좌파적 자세에 조금이라도 순응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대번에 ‘수구꼴통’으로 몰아 삭막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좌파 정부 10년간 적어도 인터넷에서 한나라당은 ‘극악한 범죄집단’으로 추락했다. 반면 북한의 김정일 집단은 함께 가야 할 친숙한 동반자로 이미지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과거 개혁적 성향을 자처하는 20·30대의 전교조 세대가 인터넷 사용자의 주류를 이뤘기에 공론장에서 좌파가 우세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지금 인터넷은 더 이상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가정주부뿐 아니라 중년층 이상까지 사용 연령이 넓어지면서 생활 필수품이 됐다. 젊은 성향의 여론만을 반영하는 사이버 세상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이 됐다.
 
  초창기 인터넷을 장악했던 전교조 세대는 중년의 나이로 접어들면서 행동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반대로 1980년대에 대한 기억과 빚이 없는 세대가 전면에 등장하며 점점 주류로 성장했다.
 
  세상은 늘 변한다. 인터넷 공간에 반동의 움직임이 없을 리 없다. 10년 좌파정권을 거쳐 서서히 신(新)보수 성향의 젊은 네티즌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했다. 최근 인터넷상에서 전교조 세대를 비웃으며 북한의 김정일·김정은 세습체제를 조롱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김정일 조롱하는 新보수 네티즌
 
  흥미로운 것은 이런 현상이 인터넷 게임을 즐기며 자란 20대 또는 그 이하 연령대의 네티즌들에 의해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들은 천문학적인 달러를 갖다 바치고 쌀 퍼 줬더니 핵과 폭격으로 돌아온 햇볕정책의 허구성을 절실히 깨달은 세대다. ‘신반북(新反北)세대’는 북한 주민의 아사(餓死)를 생생하게 목격했고, 새파랗게 어린 아들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기상천외한 3대 세습에 분노한다.
 
  담대한 신보수 세대는 강력한 반북의식으로 무장해 ‘넷심’의 한 축을 형성했다. 좌파 네티즌에 의해 좌로 기울어진 이념의 축을 반대방향에서 도로 당기고 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무엇보다 김정은의 3대 세습에 울분에 찬 네티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터넷 전반에서 과거에는 보기 어려웠던 북한에 대한 과격한 비판과 비난이 늘었다.
 
  네티즌의 분노는 급기야 몇 달 전 김정은 생일에 맞춰 북한이 운영하는 대남 사이트를 해킹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신세대답게 기상천외한 ‘세로드립(문장의 앞글자만 세로로 읽음)’으로 김정일에 대한 조롱시(詩)를 올리고, 패러디 동영상과 트위터를 통해 북한 세습정권을 비웃었다. 과거 운동권이 미(美) 대사관에 화염병을 던지듯 이들은 거꾸로 북한의 대남기구를 공격하며 본격적으로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사이버 연평해전’으로 명명하며 자발적으로 참전해 북한 사이트를 공격한 사건이 대한민국 네티즌들의 달라진 반북의식을 보여줬다. 인터넷 신보수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상징적인 서막이다.
 
  김정은의 본격 세습체제 구축, 다가올 총선과 대선 등 한반도의 전환국면을 맞아 금단 현상에 몸부림치는 좌파들은 MB 정권을 정조준해 집중화력을 퍼부으며 과거보다 한층 더 높은 수준의 공세를 펼쳐낼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좌파 네티즌은 비슷한 성향 매체들의 지원을 받으며 여론의 중심을 자신들의 비교 우위 토양인 인터넷으로 옮기려고 노력할 것이다. 복지를 전면에 내세운 ‘뉴레프트’ 기치로 좀 더 세련된 공격방식을 가다듬을 것이다.
 
지난 1월 북한의 대남선전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 홈페이지를 해킹한 네티즌들이 김정일과 김정은을 비방하는 그림을 내걸었다. 한국 인터넷의 ‘탈좌파’ 시대를 말하는 것은 성급하지만, 새로운 이념 질서가 형성돼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이 생긴 것은 분명하다.
 
  넓어진 戰場
 
  촛불시위를 넘어 조직화된 온라인 정치집단을 만들려는 시도도 예상된다. 북한의 한층 더 고도화한 대남 인터넷 여론조작도 눈여겨봐야 한다. 그러나 신보수 네티즌의 등장은 더 이상 인터넷 공간을 좌파들의 선전, 선동 공간으로 사용하도록 호락호락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대한민국 인터넷계에서 ‘탈(脫) 좌파’ 시대가 도래했다고 보는 것은 조금 성급하다. 그러나 진실의 눈을 뜬 애국 네티즌의 움직임에 좌파들이 조금씩 뒤로 밀리면서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이 생겼다. 느리지만 이념의 새로운 질서가 형성돼 가는 듯하다. 이제 보수우익 네티즌도 지난 시기를 반성적으로 사유할 때가 온 것 같다. 가까운 과거만 보더라도 한·미(韓美) FTA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문제를 좌지우지하며 정국을 이끌었던 것은 인터넷 카페와 토론광장이었다.
 
  움직여야 한다. 방심하지 말고 촛불엔 횃불로 대등하게 맞설 수 있어야 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약진, 스마트폰의 등장 등 달라진 디지털 환경으로 전장(戰場)은 한층 넓어졌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건강한 보수우익 네티즌이라면 다시금 방심과 나태함으로 전환기를 실기(失機)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이는 피땀 흘려 헌법적 기본질서를 수호해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앞선 이들에 대한 예의다.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대한민국을 물려주는 것 또한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시대의 책무다. 인터넷 전장을 젊은 네티즌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연령층을 망라한 모든 네티즌의 역사적 결단으로 시대적 요청에 답해야 한다.⊙ 

월간조선 2011년 9월호


▶ [기자수첩] “4G는 또 뭔가?”
▶ 인터뷰/ ‘연평도 北傀도발 갤러리’ 개설한 디시인사이드 김유식 대표
▶ 심층분석 | 농협사태로 들여다본 해커들의 세계 “노리면 다 뚫는다”
▶ 北 사이버 공격시 15분 만에 주요시설 초토화
▶ 한국의 파워블로거 4人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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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정보] ‘호남 재벌’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성장과 몰락
3년도 못 간 ‘500년 영속기업’의 꿈

⊙ 창업주 朴仁天, 美 중고 택시 2대로 시작해 타이어·버스 등 사업 확대… 호남 대표 재벌로 성장
⊙ 아시아나항공 사업권 획득 때부터 ‘특혜 논란’… 무리한 대우건설 인수가 결국 ‘족쇄’
⊙ 계열분리로 독립하려는 弟 박찬구 회장, 속도조절 하는 兄 박삼구 회장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금호


2008년 4월 7일 금호아시아나 본사 강당. 박삼구(朴三求)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밝은 표정으로 기자 간담회에 참석했다. 회사 창립 62주년 행사 자리였다.
 
  “숙원사업인 대한통운을 인수했습니다. 그룹 계열사 주가(株價)가 10만원까지 갈 겁니다. 앞으로 안정과 성장을 통해 500년 영속기업으로 가는 길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6월 3일. 박삼구 회장의 동생인 박찬구(朴贊求) 금호석유화학(금호석화) 회장이 검찰에 소환됐다. 벌써 세 번째 조사다. 박 회장은 비자금 조성과 배임,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 불똥은 박삼구 그룹 회장으로까지 튈 가능성이 크다. 박찬구 회장이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형인 박삼구 회장과 임원 4명을 사기 및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기 때문이다. 재계는 박삼구 회장의 검찰 소환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재계 서열 10위권에 랭크된 금호아시아나 그룹이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500년 영속기업’을 선언한 지 불과 3년 만이다.
 
 
 
“현대 계열분리와 비슷한 수순 밟을 수 있다”
 
  그동안 그룹의 사세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올해 4월 기준으로 금호그룹의 순위(자산규모 기준ㆍ공기업 포함)는 전년 대비 12위에서 16위로 뚝 떨어졌다. 재벌그룹 순위가 1년 만에 네 계단이나 하락한 것은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다. 계열사 숫자는 45개에서 36개로 줄었다. 그룹 사세가 확 줄어든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금호그룹이 인수한 대우건설과 관련 계열사들을 재(再)매각했기 때문이다.
 
  사세가 약해졌다고 ‘위기’라 하긴 어렵다. 박삼구 그룹 회장은 대우건설을 도로 토해내는 과정에서 ‘경영상의 책임’을 이유로 금호산업 지분 2.14%(2009년 말 기준) 중 대부분을 순차적으로 소각하고 채권단에 담보로 제출했다. 금호산업은 그룹 계열사를 묶는 사실상 지주회사다. 게다가 동생 박찬구 금호석화 회장과의 정면충돌이 예견된 상태다. 회사는 회사대로, 집안은 집안대로 풍비박산이 난 형국이다.
 
  이들 형제의 싸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창업주인 박인천(朴仁天ㆍ1901~1984) 회장은 슬하에 다섯 형제를 뒀는데 장남과 차남은 작고했고, 3남이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인 박삼구씨, 4남이 금호석화 회장인 박찬구씨다. 이들 형제는 지난 2009년 6월에 한 차례 싸웠다. 형제의 재산싸움으로 그룹은 당시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를 주축으로 하는 금호그룹(박삼구 몫)과 금호석화(박찬구 몫)로 쪼개졌다. 두 형제는 동반 퇴진을 했다가 지난해 다시 경영에 복귀했다.
 
  그런데 지난 4월 돌연 검찰이 금호석화에 대해 내사를 시작했고, 금호그룹 박씨 일가에 관한 비자금 의혹이 불거졌다. 박찬구 회장은 이 때문에 검찰에 세 번 출두했다. 그는 뜻밖의 사실을 털어놨다.
 
  “(금호석화) 비자금 조성 사건에 금호아시아나가 개입했다.”
 
  박찬구 회장은 형을 검찰에 고발한 상태다. 재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재벌그룹에서 재산 문제로 형제, 사촌 간에 회사를 분할시키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금호그룹처럼 내부의 속사정을 검찰에서 낱낱이 말하고 폭로전을 벌이는 일은 흔치 않다. 두 형제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볼 수 있다. 검찰 수사가 끝난 다음에 사실상 그룹이 소그룹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현대그룹의 계열분리와 비슷한 형국이 벌어질 수 있다.”
 
  현대그룹은 2011년 4월 현재 재계 서열 27위,...


기사 全文 보기 : 월간조선 2011년 8월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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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E

 
‘4G’란 게 등장했다. “3G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웬 4G냐”며 버거워하는 이가 꽤 많다. 스마트폰의 등장 후 ‘3G’를 비롯한 ‘SNS’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앱스토어’ ‘안드로이드’ 등 신조어의 파도가 생활 속 깊이 파고들었다. IT 용어 따위 몰라도 살 수 있던 ‘아날로그 시대’와 달리, 모르는 게 곧 죄가 되는 현실이다. ‘QR코드’를 보고 “요즘 광고판엔 왜 괴상한 바둑판 모자이크를 그려 놓느냐”고 묻는다면 ‘구세대 어르신’으로 낙인 찍힌다. ‘꿈의 이동통신’이라 불리는 4G란 게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이유다. 개념을 쉽게 정리해 봤다.
 
  4G를 이해하려면 1G부터 알아야 한다. ‘G’는 영어단어 ‘Generation(세대)’의 약자다. 1세대는 이동통신이 처음 등장했을 때 나온 개념이다. 물론 당시엔 그렇게 불리지 않았다. 후에 아날로그 방식이 디지털로 바뀌면서 1세대와 2세대를 구분했다. 국내에 휴대전화가 한창 보급된 1996년 이후를 2G 기간으로 보면 된다.
 
  2G는 ‘GSM’이란 유럽방식과 ‘CDMA’란 미국방식으로 나뉘는데, 한국은 CDMA 방식을 채택했다. 아날로그 시기엔 의미 없던 속도의 개념이 2G부터 등장했다. 14.4~64Kbps 정도 속도다. ‘bps’란 단위는 ‘Bit Per Second’의 약자로, 1초 동안 전송할 수 있는 비트(bit)의 수를 뜻한다. K는 1000을 뜻하는 ‘Kilo’의 약자이고, 8비트가 통상 알파벳 한 글자를 뜻하는 1바이트(Byte)이므로 2G는 1초에 대략 1800~8000자 정도의 정보를 전송한다고 보면 된다.
 
  3G는 2002년 12월 상용화돼 현재까지 이용되고 있다. ‘아이폰3G’ 국내 도입 후 3G 개념을 처음 접한 이용자가 많아 최신 기술로 오해할 수 있다. 스마트폰 이전에도 이미 수많은 이용자가 3G 서비스를 이용해 왔다. ‘아이폰4’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를 ‘아이폰4G’로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없는 제품을 입으로 만들어 낸 경우다. 아이폰4도 현재 3G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3G의 규격상 전송속도는 144Kbps~ 2.4Mbps다. 초당 1만8000~30만 자 분량으로, 사진·음악·동영상 전송이 가능하다. 2G 당시 유럽식 GSM은 ‘WCDMA’ ‘HSDPA’ 등 이름으로 발전했고, 미국식 CDMA는 ‘CDMA2000’ ‘EV-DO’ 등으로 세분화·진화했다.
    
  ‘진짜 4G’는 아직 등장 안 해
 
  4G와 3G의 가장 큰 차이는 ‘속도’다. 규격속도는 100Mbps~1Gbps로, 초당 1250만~1억2500만 자 분량의 정보를 전송한다. 2008년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은 4G를 “저속으로 이동할 경우 100Mbps, 고속(시속 100km 이상)으로 이동할 땐 1Gbps 기준”이라고 정의했다. 3G의 400배에 달하는 속도지만, 엄밀히 따지면 현재 이 기준을 맞출 수 있는 상용서비스는 국내에 없다.
 
  미국 이동통신사들이 스마트폰 등장 이후 고속화한 3G(3.9G) 규격을 4G라고 홍보했고, ITU도 결국 2010년 12월 4G의 정의에 이들 기술을 추가했다. 이때 추가된 기술은 ‘LTE’와 ‘와이브로(WiBro)’ 등이다. 와이브로는 북미에서 ‘모바일 와이맥스’로 불린다.
 
  지난 7월 1일 국내에서 처음 상용화한 ‘LTE’ 서비스는 ‘Long Term Evolution(장기진화)’의 약자다. 유럽식 3G인 HSDPA에서 한층 진화한 규격으로, 2009년 12월 북유럽 통신사 텔리아소네라(TeliaSonera)가 삼성전자 단말기를 이용해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했다.
 
  LTE 사업을 본격화한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는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LTE의 최고 속도는 75Mbps지만, LG U+는 데이터 수·발신대역을 10MHz로 사용해 5MHz인 SKT보다 2배 빠르다고 주장한다. LTE를 기준으로 4G의 속도는 3G의 30배 정도다.
 
  KT는 현재 LTE가 아닌 와이브로 서비스를 선택한 상태다. SKT와 LG U+의 전국 서비스가 내년 7월에서 내후년이 돼야 가능하지만, KT는 이미 4G 와이브로 전국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LTE’의 공세에 KT가 “지금 당장(Right Now)”이란 광고로 대응할 수 있는 이유다. KT는 “단말기 없는 LTE는 요란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실속이 없다”고 비판했지만, 오는 11월부터 LTE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다. 최고속도 40Mbps인 와이브로보다 빠른 LTE의 속도와 높은 세계 시장 점유율 때문이다.⊙

4G - 4세대 이동통신 (위키피디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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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 농협사태로 들여다본 해커들의 세계 “노리면 다 뚫는다”

⊙ 스스로 취약점 찾는 고수들은 국내 15명 내외… 나머지 대부분 실력 미달

⊙ PC 기반에서 스마트폰, 전자단말기 등으로 범위 확대… ‘ATM 잭팟’도 가능
⊙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도 해커 출신… “전문·도덕성 갖춘 해커 집중 양성해야”
⊙ “아무리 뛰어난 해커라도 2중·3중 보안 시스템 갖춘 ‘준비된 기업’은 절대 못 뚫는다” (김홍선 안철수연구소 대표)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질끈 묶은 장발에 두꺼운 안경.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앉아 키보드 몇 번 두드리면 몇 초 만에 패스워드를 알아내 보안시스템을 무력화시키고, 각종 군사·산업 기밀자료를 빼돌려 돈을 받고 넘겨주는 남자….”
 
  ‘해커(hacker)’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그들은 주인공인 영웅을 돕거나 적으로 등장해 핵심 정보를 아슬아슬하게 입수하며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실제 이런 ‘환상’만 보고 해킹 공부를 시작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대부분 해커들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며 웃어 넘긴다. ‘해킹이 생업’인 그들은 ‘영화 속 해커’의 가장 큰 오류로 “해킹 시도 후 몇 초 만에 뚫리는 시스템과, 그 과정을 시원하게 보여주는 모니터 화면”을 꼽는다. 실제론 며칠에서 수개월까지 걸리는 사전작업을 거쳐 시나리오를 세워 실행해야 하고, 모니터 화면도 텍스트 형태의 각종 코드가 가득할 뿐이다.
 
  최근 현대캐피탈 고객정보 유출과 농협 전산망 파괴 등 금융시스템 해킹 사건으로 해커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컴퓨터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살던 사람들도 해킹의 피해를 직접 입는 시대가 오면서 해킹은 더 이상 ‘다른 나라 먼 이야기’가 아니게 됐다. 뉴스엔 매일 해커 이야기가 나오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해커에 대해 잘 모른다. 도대체 해커는 어떤 사람들일까.
 
▣ 해커의 기원
 
  1950년대 말 미국 MIT 학생 동아리에서 ‘해커’란 말이 처음 등장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DEC사(社)의 미니컴퓨터 ‘PDP-1’으로 모형기차 제어시스템을 연구하던 학생들이 문 닫힌 전산실을 몰래 드나들면서 컴퓨터를 사용했고,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데 뛰어났던 학생들을 해커라고 불렀다고 한다.
 
  해커에도 至尊이 있을까
 
각종 해킹대회를 휩쓴 ‘3세대 해커’ 박찬암씨. ⓒ 김정우
  ‘해커’에 대해 오해가 많은 이유는 단어 자체가 한 문장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도 해커를 “통신망 따위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컴퓨터에 무단 침입하여 데이터와 프로그램을 없애거나 망치는 사람”, “컴퓨터 시스템에 대하여 강한 흥미를 갖고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뛰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 등 두 뜻으로 설명했다.
 
  전자(前者)는 ‘블랙햇(black-hat) 해커’ 또는 ‘크래커(cracker)’로 불리고, 후자(後者)는 ‘화이트햇(white-hat) 해커’라고 불린다.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검은 모자를 쓴 악당과 흰 모자를 쓴 주인공에서 유래했다. 블랙햇은 주로 해킹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고, 화이트햇은 이를 방어하는 보안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을 창(矛·모)과 방패(盾·순)로 묘사하는 것엔 무리가 있다. 블랙햇과 화이트햇 모두 사실상 창(槍)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만 블랙햇은 실제로 피해를 주기 위해 창을 실전에 사용하지만, 화이트햇은 보다 훌륭한 방패를 만들기 위해 창을 연마한다. 많은 화이트햇 해커가 의뢰인의 시스템을 ‘모의해킹’해서 취약점을 찾는 일을 하고 있다.
 
  블랙햇과 화이트햇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해커를 ‘그레이햇(gray-hat) 해커’라고 부른다. 기본적인 보안 윤리의식을 갖추고 있지만, 해킹 범죄도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해커로, 낮에는 보안업체에서 일하지만, 밤엔 악성코드를 유포하고 정보를 빼내는 등 범죄행위를 할 수 있다.
 
  박찬암(朴贊庵·22)씨는 최근 몇 년간 국내의 각종 해킹대회를 휩쓸며 이름...


계속...

월간조선 2011년 6월호 -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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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일군 기업인들] 朴泰俊과 포스코

⊙ 제철보국, 우향우 정신, 열연 비상… 朴泰俊의 신념은 곧 포항제철과 대한민국의 역사가 됐다
⊙ 박태준의 실패는 포항제철의 실패, 포항제철의 실패는 곧 대한민국의 실패
⊙ 80%까지 진척된 공사현장에 부실 드러나자 다음 날 다이너마이트로 현장 폭파
⊙ 25년 대역사 준공 후 朴正熙 묘 앞에 서서 “각하, 임무 완수했습니다”


글 : 李大公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정리 :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착공식에 참석한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왼쪽부터).

“자네, 한 달만 여기에 올 수 있겠나.”
 
  2006년 여름, 미국 플로리다 주(州)에 머물던 박태준(朴泰俊) 명예회장이 포항에 있던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그날로 이구택(李龜澤) 당시 포스코 회장에게 보고하고 바로 짐을 쌌다. 평생 모신 분이기에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다.
 
  나는 1973년부터 그를 직접 모셨다. 덕분에 누구보다 그의 철학과 생각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미국에서 한 달을 보냈다. 차도 그가 뒷자리에, 내가 조수석에 앉으니 마치 20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는 변한 게 없었다.
 
  “여기 소나무가 많네. 미국에 웬 소나무가 이렇게 많을까.”
 
  “저 건물은 15층인데 위쪽 색깔이 다르네. 증축을 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저렇게 설계를 했을까.”
 
  “이 동네엔 도요타 차가 왜 이리 많을까.”
 
  질문은 끝이 없었다. 사소한 것도 그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나는 멍청히 지켜볼 뿐이다. 내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것들이 그의 눈엔 너무나 크게 보였다. 40년 전 포항의 건설현장에서도 그는 그랬다. 아무도 몰랐던 부실현장을 발견해 수차례 바로잡았다. 그 눈이 없었다면 포항제철이 제대로 건설되기나 했을까.
 
 
 
‘교육王 박태준’
 
  ‘철강왕(王) 박태준’이란 말 이전에 ‘교육왕 박태준’이라 부르고 싶다. 그는 포항과 광양에 15개 초·중ㆍ고등학교, 유치원, 그리고 포항공대(포스텍)를 세웠다. 지역 기업이 성공하려면 인재 유치가 핵심인데, 이들이 오기 위해선 우수한 교육 수준이 보장돼야 한다. 그는 교육 수준을 양적으로만 넓힌 것이 아니라, 수월성 교육을 통해 교육의 질까지 끌어올렸다. 그 결과가 현재의 포스텍과 포스코교육재단이다. 1989년 노벨상 수상자 10명 초청, 제철장학회 71명 해외유학생 선발 지원, ‘베서머(Bessemer)금메달 수상 기념 장학회’의 16명 해외 장학생 선발 지원, 청암재단의 기초과학 분야 매년 30명 선발 지원, 한국 최초 체조 및 축구 전용 경기장 건립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육 지원이 이뤄졌다. 복지교육의 모델인 핀란드와 최근 수월성 교육의 성공사례로 급부상한 상하이(上海)의 성공사례를 그는 이미 40년 전에 내다봤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주택단지 조성과 학교 설립은 직원의 충성도와 업무 효율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박태준 사장의 합리적인 리더십은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줬다. 그의 확고한 제철보국(製鐵報國) 신념은 포항제철 임직원 모두를 하나로 뭉치게 했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었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꿨다.
 
  이건희(李健熙) 회장은 “21세기엔 한 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했다. 이 말은 20세기에도 통한다. 박태준 한 명이 적어도 수백만 명을 먹여 살렸다. 당시 산업의 파급 효과를 뜻하는 전후방 연관 효과는 석유산업이 가장 높았고, 그다음이 제철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제철이 가장 높았다. 자동차, 조선(造船), 가전, 건설… 철이 안 들어가는 곳이 없었다. 박태준의 실패는 포항제철의 실패였고, 포항제철의 실패는 곧 대한민국의 실패였다.
 
  ‘박태준의 신화’는 ‘우향우의 기적’으로 불린다.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으로 지어진 포항제철은 ‘선조의 피의 대가’였다. 그는 이렇게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나라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합시다. 제철보국! 이제부터 이 말은 우리의 확고한 생활신조요, 인생철학이 돼야 합니다.”
 
1968년 11월 불시에 포항 현지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롬멜하우스 2층에서 박태준 사장의 보고를 받고 있다. 창 밖을 보던 박 대통령은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며 혼자 말했다.

 
  ‘우향우 정신’은 구호가 아니라 진실
 
  만약 포항제철이 실패했다면 그는 정말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지켜본 그는 항상 말이 앞서지 않았다. 실패했다고 사표 내고 끝낼 상황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목숨 걸고 사업을 이끌었다.
 
  일본의 군신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ㆍ1849~1912) 대장은 뤼순(旅順) 고지 전투에서 부하 13만명 중 6만명이 전사하는 고전 끝에 승리했다. 그의 아들 2명도 전사자 명단에 포함됐다. 그는 ‘황군 6만명을 잃은 죄’를 씻기 위해 메이지(明治)왕에게 할복을 허락해 줄 것을 간청했지만, 허가를 받지 못했다. 7년 동안 조용히 지냈던 그는 메이지 왕이 죽자 그날 바로 할복했다. 국경을 초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다.
 
  러일전쟁의 또 하나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ㆍ1848∼1934) 제독은 러시아 발트함대와 싸우기 전날 밤 이순신(李舜臣) 장군에게 승전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영국의 넬슨보다 이순신이 낫다”고 한 그는 러시아 함대를 상대로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그는 이순신 장군의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 정신을 배웠다.
 
  6ㆍ25전쟁 당시 나토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아들은 육군 소령으로 참전했다. 그 조건은 “만에 하나 포로로 붙잡히면 자결하라”는 것이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이들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그는 평생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싸워야 했다. 6ㆍ25전쟁 당시 육군대위였던 그는 포항 형산강 전투에 참전해 이후 함경도 청진까지 북진(北進)했다. 청진에서 흥남으로 내려올 땐 추위를 이기기 위해 드럼통에 고무호스를 꽂고 녹물이 섞인 ‘카바이드 소주(화학주)’를 빨아 마셨다. 흥남에선 맹장염에 걸려 응급수술 후 해병대 상륙함(LST)에 실려 후송됐다. 그는 일생이 전쟁이었고, 매일이 전투였다. 그의 우향우 정신은 생사를 건 그의 인생철학에서 나온 산물이다. 말뿐인 구호가 아니라, 그를 설명하는 사실이요, 진실이다.
 
  ‘롬멜하우스’란 곳이 있다. 현재 ‘포스코 회사 자산 1호’로 기록된 건물이다. 1968년 영일만 현장에 지어진 초라한 슬레이트 지붕의 목조 건물로, 건설 초기의 애환과 사연이 담긴 곳이다. 직원들은 이 건설사령탑을 사막의 영웅 롬멜(Rommel) 장군의 야전군 지휘소라 하며 ‘롬멜하우스’란 이름을 붙였다.
 
 
  준공 직후 朴正熙 묘에서 “각하, 임무 완수했습니다”
 
25년 제철소 건설의 대역사를 마무리한 박태준 회장은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가 “각하, 임무를 완수했습니다”라고 마지막 보고를 했다.

  1968년 11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건설 현장을 불시 방문했다. 당시 현장은 황량한 모래벌판이었고, 건물은 롬멜하우스 하나였다. 박태준 사장은 박 대통령을 롬멜하우스 2층으로 모셨다.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초가집들을 헐어낸 폐허 그 자체였다. 박 대통령의 표정이 어두웠다. 자신 있게 시작했고 “하면 된다”고 했지만, 막상 현장에 와보니 걱정이 됐나 보다.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
 
  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박태준 사장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배짱 좋다던 분이 이날 위경련까지 일으켰다고 한다. 겉으론 강한 분이었지만 속은 항상 그렇게 타들어갔다. 그만큼 민족적 사명에 대한 부담이 컸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총 13차례 포항 현지를 방문했다. 직접 눈으로 현장을 보고, 직원들을 격려했다. 그의 의지가 이렇게 강하지 않았다면, 포항제철 역사는 오랜 기간 연기됐을 것이다.
 
  1970년 2월 공사가 한창이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친필서명이 적힌 메모지를 주며 박태준 사장에게 설비구매에 대한 전권을 일임했다. 일명 ‘종이마패’다. 서슬이 퍼렇던 시절, 그 종이 한 장은 큰 힘이 있었다. 하지만 박태준 사장은 단 한 번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다가 박 대통령 서거 후 공개했다.
 
  포스코에 단 6개월 관여한 사람들도 “내가 포항제철을 만들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25년 4반세기 대역사 종합준공을 끝낸 그는 국립묘지의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각하.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박태준의 리더십
 
1971년, 계획보다 3개월 지연된 공기를 만회하기 위해 ‘하루 700㎥ 콘크리트 타설’이란 특명, ‘열연비상’이 내려졌다.

  미국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등 세계적 기관에서 포항제철의 성공사례를 연구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장남 박성빈(朴成彬)씨는 미국 스탠퍼드대 유학 당시 건축품질관리 사례로 아버지의 부실공사 현장 폭파 이야기가 나오는 수업을 들었다. 영국 학교의 교과서에도 포스코 사례가 실렸다고 한다. 이들이 꼽은 첫째 성공 요인은 모두 같다. 바로 박태준 회장의 리더십이다.
 
  ‘평상시’ 회사엔 다른 어느 곳보다 용역이 많았다. 그만큼 그는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분위기가 바뀐다.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전환돼 업무 추진의 속도가 빨라졌다.
 
  자기희생적 솔선수범을 통해 조직문화를 정립했고, 부하직원을 철저하게 훈련해 내부 승진의 전통을 절대 고수했다. 이는 구성원의 조직 충성도를 더 높였다. 전투를 지휘하며 몸에 밴 리더십은 ‘동시다발’ ‘전천후’ ‘전방위’ 업무로 전환됐다. “지휘자의 최고 책임은 부하 육성 교육”이라며 상세한 설명을 통해 교육했다. 소통 경영을 위해 임원회의록을 전 임직원에게 공개 배포한 것도 획기적인 전통으로 남았다.
 
  그의 리더십은 여러 방향으로 확대됐다. 저가(低價) 설비 구매, 공기 단축을 통한 건설원가 절감, 원료 염가 확보, 주택단지, 직원 자녀 교육을 비롯한 폭넓은 복지정책 등이 오늘날 포스코를 만들어낸 핵심요소들이다. 모두가 안된다고 할 때, 박태준은 확고한 비전을 품었다. 눈으로는 황량한 모래벌판을 보면서 머릿속엔 세계 최고 수준의 제철소를 이미 그리고 있었다.
 
  1978년,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이 일본 기미쓰(君津) 제철소를 방문했다. 그는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 달라”고 했는데, 이나야마의 답변은 간단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소?”
 
  1969년 당시 IBRD 실무자였던 자페(Jaffe)는 한국의 일관제철소 건설에 타당성이 없다는 보고서를 냈다. 그리고 18년 후인 1988년 방한(訪韓)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포철에 대한 당시 나의 보고는 정확했다고 아직 확신한다. 다만 박태준 같은 리더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빅토르 사도브니치 모스크바 대학 총장은 광양제철소 방문 당시 “마르크스와 레닌이 꿈꾸던 노동자의 천국을 광양에서 봤다”고 했다. 신화가 된 그의 역사는 철강인 최고의 명예인 ‘베서머(Bessemer)’ 금메달과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 등 수상으로 증명됐다.
 
 
  ‘담배꽁초 강철파일’
 
  “왜 나한테만 보이나. 너희 눈엔 안 보이나.”
 
  1971년 봄, 제강공장 건설 현장을 둘러보던 박태준 당시 포항제철 사장의 눈에 강철 파일(pileㆍ땅속에 박아넣는 말뚝) 몇 개가 들어왔다. 마침 레미콘 이 콘크리트를 쏟아부었는데, 파일이 옆으로 슬쩍 기울었다. 이를 눈여겨본 사람은 없었다. 공사 책임자, 건설회사 책임자, 현장간부들 모두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박태준 사장은 공사를 중단시키고 불도저를 불렀다.
 
  “밀어 봐.”
 
  불도저가 파일을 밀었다. 모래 위에 박힌 담배꽁초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엄청난 부실공사 현장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용광로에 쇳물을 정제하는 제강공장은 아무 땅에나 짓지 않는다. 땅속 깊은 암반에 강철 파일을 박고, 콘크리트를 친 후, 그 위에 다시 앵커볼트(기초볼트)를 연결한다. 그리고 그 위에 제강공장을 ‘얹는다.’ 한마디로 지구 암반에 고정시켜 짓는 셈이다.
 
  포항의 평균 지반 깊이는 38m다. 38m 정도 길이의 파일을 박아야 제대로 고정이 된다. 지반 높이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파일을 박아넣으면 남는 부분이 생긴다. 당시 일부 현장에선 2~3m 길이의 남은 토막 파일들을 대충 모아 꽂아놨다. 대형 부실공사였다. 박태준 사장은 건설회사 소장과 일본 설비회사 현장감독을 불러 크게 호통을 쳤다. 일본인 현장감독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그 현장은 곧바로 전면 재시공에 들어갔다.
 
  그날 ‘담배꽁초 파일’이 박태준 사장의 눈에 안 들어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100년을 가야 할 공장이 10년도 안돼 무너졌을 것이다. 그게 무너졌다면 포항제철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망하는 것이다. 2006년 여름, 명예회장과 함께한 한 달 동안의 미국 합숙 기간에 그 시절이 다시 떠올랐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오직 아이젠하워의 눈에만 보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오직 맥아더의 눈에만 보였다. ‘영일만 상륙작전’은 오직 박태준의 눈에만 보였다. 모두가 실패할 거라 했지만, 이들은 확고한 신념과 계획을 갖고 있었고, 죽음을 각오했다.
 
 
  볼트 24만 개 재조사, 부실현장은 폭파
 
박태준에게 부실공사는 곧 이적행위였다. 1977년 발전 송풍설비 공사현장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그는 80% 진척된 공사현장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다.

  그에게 부실공사는 곧 이적행위였다. 그는 끊임없이 현장을 찾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제강공장을 시찰하던 중 철골구조물 연결 볼트가 허술하게 조여진 것을 발견했다. 모든 간부를 집합시켜 즉시 모든 볼트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대형볼트 24만 개를 일일이 조사한 결과 400여 개가 잘못 조여진 것으로 밝혀졌다.
 
  1977년 발전 송풍설비 공사현장, 그의 눈에 부실 현장이 들어왔다. 80% 정도 진척된 공사현장을 다음 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다. 당시 포항제철의 관련 임직원, 건설 책임자, 외국인 기술 감독자 등이 한자리에 모여 이 광경을 지켜봤다. 따로 설명하거나 강조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완벽주의에 대한 확실한 인상을 직원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1978년 6월, 아침 8시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그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건설현장을 찾았다. 현장소장은 없었고, 반장이 대략적인 인원을 보고했다. 조말수(趙末守) 당시 비서과장(후에 포항제철 사장)이 동행해 보고사항을 기록했다.
 
  8시 회의, 현장소장이 헐레벌떡 도착했다. 전날 늦게까지 과음하고 곧바로 회의에 나온 것이다. 그는 박태준 사장이 아침 일찍 현장에 다녀온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박 사장의 질문이 시작됐다.
 
  “오늘 현장 인원이 몇 명인가?”
 
  “875명입니다.”
 
  “다 나왔나?”
 
  “다 나왔습니다.”
 
  박태준 사장은 “현장에 직접 가봤느냐”, “보고 내용에 책임질 수 있느냐”며 물었고, 현장소장은 “현장에 가서 직접 확인했고, 책임질 수 있다”고 답했다. 박 사장은 조말수 비서과장을 불렀다.
 
  “조 과장, 아까 내가 가서 본 숫자와 비교해서 발표해 봐.”
 
  현장소장의 얼굴이 순간 하얘졌다. 거짓말이 들통났고, 그날 이후 모든 건설현장의 인원을 5일 동안 전면 재조사했다. 그런데 조사 결과가 분명하게 나오지 않았다. 사람 수가 계속 틀렸다. 직원들은 이상하다 생각했고, 박태준 사장은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전체 공장을 포위한 후 한 명도 빼놓지 말고 사람 수를 조사하라고 했다.
 
  그러자 정확한 결과가 나왔다. 이쪽에서 조사를 하면 다른 현장에 있던 인부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왔다. 서로 돌려가면서 ‘인원 메우기’를 했다. 하지만 결국 박태준 사장의 ‘군사작전’에 모두 들통났다. 박 사장은 그들을 ‘유령’이라 불렀고, 시공회사 책임자로부터 20%의 작업인원 조작이 있었다는 실토를 받아냈다. 자재와 인력이 충분했음에도 예정 공기(工期)를 따라가지 못했던 이유가 밝혀졌다.
 
  그는 사소한 것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이런 부분은 정주영(鄭周永), 이병철(李秉喆) 회장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답답한 사람 눈에는 모두 보인다. 회사에서 가장 답답한 사람은 CEO고, 나라에서 가장 답답한 사람은 대통령이다. 본인은 몰라도, 부모 눈에는 자식의 얼굴 상처가 보인다. 이런 눈을 가진 리더만이 조직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
 
 
  첫 쇳물이 나오던 날
 
1973년 첫 쇳물이 나오던 순간 포항제철 모든 임직원이 만세삼창을 외치고 있다. 다른 이들과 달리 박태준 사장은 이 순간에도 굳은 표정을 지은 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열연비상’은 그의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1971년 8월, 그는 계획보다 3개월이나 지연된 공기를 만회하기 위해 보고서 위에 ‘9월-700입방미터’라고 썼다. “9월 중엔 무조건 하루 700m³의 콘크리트 타설을 실시하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이것이 포항제철의 제1호 건설비상, ‘열연비상’이다. 당시 하루 300m³ 정도 타설했던 건설현장은 24시간 비상체제에 들어섰다. 최대 장비와 인원이 동원돼 밤낮없이 일했다. 결국 두 달 만에 5개월 분량의 타설을 완료했고, 10월 31일, 박태준 사장은 ‘열연비상’을 풀었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30분, 첫 아들이 나왔다. 오랜 산고 끝에 첫 쇳물이 터져 나왔다. 한국 최초의 대형 고로인 영일만 제1 고로의 첫 출선(出銑)을 바라보던 포철 임직원들은 모두 머리 위로 두 팔을 올리며 만세를 외쳤다. 그 순간 언론의 모든 카메라는 일제히 쇳물을 향했다. 포철의 사진기사가 방향을 돌려 마지막 만세를 외치는 임직원들을 찍었다. 공보과 이재영 기사가 유일하게 포착한 이 사진이 지금까지 수많은 지면에 등장한 출선 사진이다. 1초만 늦게 몸을 돌렸다면 영원히 놓칠 뻔한 사진이다.
 
  사진을 보면 모든 사람이 크게 웃으며 만세를 외쳤다. 그런데 단 한 명만이 입을 다문 채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가장 큰 주인공인 박태준 사장은 그날 크게 웃지 않았다. 사진 속 그의 시선은 평소와 똑같았다. 한곳을 응시한 채 흔들림이 없었다. 모두가 감격할 때도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조국근대화를 위한 종합제철소 건설은 애초 ‘불가능한’ 민족적 과제였다. 박태준 명예회장과 모든 임직원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5차례 제철소 건설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5개국 8개 회사로 구성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은 와해됐고, IBRD도 포항제철 사업의 타당성을 부인했다.
 
  첫 단추부터 풀기 어려웠던 자금조달 문제를 박태준 당시 사장은 ‘대일청구권 자금 전용 계획’이란 ‘하와이 구상’을 통해 성사시켰다. 그는 하와이에서 바로 귀국하지 않고 일본으로 갔다. 야하타 제철의 이나야마 사장과 후지 제철의 나가노 사장 등 철강선진국인 일본 철강산업의 대표들을 직접 만나 기술협조 약속을 얻어냈다.
 
  KISA의 조강 연산 50만t 계획은 하와이 구상 후 1단계 조강 연산 103만t 규모로 확대됐다. 당시 대일청구권 자금 사용 잔액을 제철소 건설에 투입했는데, 만약 건설에 실패했다면 대한민국 경제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포항제철은 당시 대일청구권 자금 중 7370만 달러와 일본수출입은행 상업차관 등 총 1억2370만 달러로 지어졌다. 그리고 2000년 10월 초 민영화되면서 배당금과 주식매각 및 양도 등으로 모두 3조6155억원을 정부에 갚았다.
 
 
  한 달 독서량 30권
 
박태준의 집념은 공기 단축을 통한 건설원가 절감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1978년 포항 3고로 본체 공사 장면.

  박태준 명예회장은 한 달에 책 30권을 읽는 ‘독서광’이다. 그가 사장이던 시절 비서실과 도쿄(東京)사무소 직원들은 읽을 책을 찾아서 그에게 보내는 것이 큰 업무 중 하나였다. 관심을 가지고 읽는 책은 속독(速讀)했고, 아주 중요한 책일 경우엔 천천히 정독(精讀)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본 책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땐 책에 친필로 메모해서 보내줬다.
 
  1992년, 그는 “앞으로 중국이 원료의 블랙홀이 될 것”이라며 원료 조기 확보를 강조했다. 최근 중국과 일본의 분쟁 가운데 발생한 희토류 수출 통제 일화를 보면서, 18년 전 이를 정확히 예고한 그의 독서력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됐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외강내유(外剛內柔)의 리더십이다. 제철소 건설을 성공적으로 끝낸 날, 지난 시절 밤낮없이 돌관(突貫) 공사를 하던 중 처벌된 모든 임직원을 징계해제 조치했다. 지금 말로 표현하면 일반사면을 단행한 셈이다.
 
  그는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를 철저하게 지키는 신사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항상 부인인 장옥자(張玉子) 여사가 먼저 타게 한다. 딸들은 부모를 ‘닭살 부부’라 할 정도였다. 학교에 방문할 때, 여교사가 아무리 젊어도 말을 놓는 법이 없다.
 
  그는 평생 세 번 눈물을 흘렸다고 알려졌다. 1973년 6월 9일 첫 출선에 성공했을 때 첫 눈물을 흘렸다. 두 번째 눈물은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포항에 보낸 장녀 진아씨가 결혼할 때가 돼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읽었을 때 나왔다. 세 번째 눈물은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서거 때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태준 명예회장의 관계는 유성룡과 이순신처럼 특별한 관계였다. 1969년 3선개헌 당시 예비역 장성 500명이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박태준 당시 사장은 “정치엔 끼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이를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 친구 원래 그런 사람이야. 제철소 일이나 열심히 하게 건드리지 마.”
 
  5ㆍ16군사혁명 당시에도 박정희 소장은 박태준 대령을 배려해 혁명에 직접 가담시키지 않았다. 다만 혁명이 실패할 경우 그의 가족을 책임져 달라는 부탁을 했고, 박태준 대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므리바’
 
1999년 1월, 포항중앙교회를 찾은 박태준 회장이 세례를 받기 위해 꿇어앉은 모습.

  그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낸 몇 안되는 애국자다. 수많은 이가 번지르르한 말을 하며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만, 그는 초연하게 일했고, 그 결과가 현재의 포스코다. 그의 업적은 포항제철소, 광양제철소, 포항공대를 보면 된다.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다. 이 글은 사족(蛇足)에 불과하다. 다만 곁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감히 주제넘게 글을 썼다.
 
  보잘것없는 내 이야기를 정리하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나는 ‘므리바’ 이야기를 계속 강조하고 있다. 구약성경 <민수기>에 나오는 물가 이름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지팡이로 바위를 쳐 백성이 필요한 물을 솟아오르게 했다. 하지만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의 능력인 것처럼 행동했다가 결국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오늘날 포스코의 영광은 박태준과 박정희,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의 몫이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종교는 기독교다. 2006년 포항 지역 목사님들의 요청에 의해 박태준 명예회장이 어떻게 기독교인이 됐는지 간증한 적이 있다. 그날 제목은 ‘포스코의 기적을 주관하신 하나님’이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미국에 거하던 시절 교회에 처음 출석했고, 1999년 1월 포항중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날 ‘천하의 박태준’이 꿇어앉은 모습을 보며 난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이 한민족을 살리기 위해 박태준을 보내신 거라고.⊙

李大公
⊙ 1941년생.
⊙ 경기고ㆍ서울대 법대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 1969년 포항종합제철 입사 후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부사장,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등 역임.
⊙ 現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월간조선 2011년 신년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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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 朴正熙 경제참모의 증언

⊙ 중국, 인도 경제발전 모델의 원형은 한국의 ‘수출제일주의+공업입국’(EOI) 개방 경제
⊙ 최종제품→중간제품→중간원료→기초원료 順 ‘피라미드型 개발전략’ 채택으로 한국型 산업혁명 완성
⊙ ‘자력갱생ㆍ자급자족’의 주체사상 외치다 망한 북한
⊙ ‘중화학공업 진입 마지막 버스’ 탄 한국, ‘진정한 기술강국’으로 성장

글 : 吳源哲 전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  
정리 :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1971년 지하철 공사현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임자! 100억 달러 수출하자면 무슨 공업을 육성해야 하지?”
 
  1972년 5월 30일 오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서재 소파에 앉은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불필요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항상 정확한 질문을 했고, 참모들은 정확한 답을 제시해야 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산업구조 고도화에 대한 전략’을 밝힐 때가 됐다고 결심했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
 
  답변은 육하원칙으로 짧고 명료해야 했다.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해서(Why), 중화학공업 육성을(What), 일본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을 국가 중요시책으로 추진한 것과 같이(How), 대한민국도(Where), 앞으로 10년간(When), 정부 주도 아래 민간 기업체가 담당해서(Who) 추진한다”고 설명했다.
 
 
  ‘중화학공업 진입을 위한 마지막 버스’
 
박 대통령이 직접 작성해 중화학공업기획단에 하사한 ‘전 산업의 수출화’ 휘호.

  이날의 짧은 대화는 역사가 됐다. 한국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그해 우리나라 수출 목표는 18억 달러로, 15년 전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일본은 수출액이 20억 달러였던 1957년 중화학공업화 정책으로 전환했고, 10년 만에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다음 보고는 며칠 후에 이뤄졌다. 나는 일본의 중화학공업 정책과 수출 목표 달성 관계를 자세히 설명했다. 한국은 1960년대 ‘선진국에서 사양화돼 가던’ 섬유산업 등 경공업을 유치, 수출산업으로 육성했다. 1970년대는 중화학공업 육성의 적기였다. 나는 “경쟁 관계에 있던 동남아국가보다 먼저 출발해야 한다”며 “현 시점이 ‘중화학공업 진입을 위한 마지막 버스’를 탈 수 있는 기회”라고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한참 동안 도면을 들고 지켜봤다. 몇 분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각하! 우리나라는 이미 중화학공업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종합제철과 석유화학입니다. 그런데 그 규모는 국제 규모의 3분의 1입니다. 하루속히 국제 규모의 공장을 건설해야 수출도 가능합니다.”
 
  조선공업, 전자공업, 자동차공업, 방위산업 등에 대한 현황과 계획도 함께 이어졌다. 그러자 박 대통령의 눈이 빛났다. 아마 ‘이 정도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듯했다. 이때 함께 회의에 참석한 김정렴(金正濂) (대통령)비서실장이 “자금 문제 중 내자(內資)는 문제없다. 외자(外資)도 수출이 순조롭게 증가하는 한 차관이 가능하다”며 성공 가능성에 힘을 실었다.
 
  또 잠시 말이 없던 박 대통령이 한마디를 던졌다.
 
  “오 수석! 우선 중화학기획단 같은 것을 구성해서 계획을 짜보도록 하지!”
 
  비서실장에겐 기획단 구성에 대한 내각 지시 명령이 내려졌다. 이 간단한 지시가 ‘중화학공업 발진 명령’이었다. 대한민국이 ‘승부수’를 거는 상황이었다.
 
 
  북한의 실패
 
2010년 8월 비날론 공장을 시찰하는 김정일. 북한의 잘못된 경제정책은 주민의 의식주도 해결하지 못했다.

  2010년 8월, 김정일(金正日)이 함경남도 비날론 공장을 시찰한 사진이 북한 매체를 통해 보도됐다. 나는 사진을 보며 “북한이 완전히 망했다”고 확신했다. 비날론은 한국에선 더 이상 찾아보기도 어려운 섬유다. 그 공장을 재가동한다고 떠들썩한 나라는 정상이 아니다. 전후(戰後) 기반시설과 자원 환경에서 남한을 월등히 앞섰던 북한 경제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1952년 4월 27일, 북한에서 과학자대회가 열렸다. 핵심과제는 ▲전력 및 지하자원 개발 ▲기계공업과 철강공업 육성 ▲식량문제 해결 ▲의류문제 해결 ▲과학원 창설이었다. 김일성은 이를 자력갱생, 자급자족 원리로 이루겠다며 주체사상을 내놓았다. 북한경제의 고립화와 후진성이 공식적으로 선포되는 순간이다.
 
  약 60년 후, 결과는 참혹하다. 가장 기본적인 식량문제와 의류문제부터 북한은 실패했다. 1인당 농토가 남한의 2.4배에 달했지만, “인민에게 쌀밥에 고깃국을 먹이겠다”는 김일성의 약속은 어느새 손자의 몫이 됐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주체농법이다.
 
  결과가 평등한 집단농장체제는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었다. 남의 배부름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중국은 개혁ㆍ개방 이후 집단농장을 포기하면서 6할 증산이란 성과를 이뤄냈다. 현재 북한 주민들은 자신의 먹을 것과 별로 상관없는 농장보다는 개인 텃밭을 가꾸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의(衣)와 식(食)뿐 아니라 주(住)도 실패했다. 주택문제의 가장 기본은 난방이다. 북한은 석탄 등 지하자원이 우리보다 훨씬 풍부하다. 하지만 북한은 땔감 쓴다며 산을 모두 민둥산으로 만들어버렸다. 반면 남한은 연탄 보급 정책으로 에너지와 산림녹화란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북한의 전기 사정은 최악이다. 도시를 벗어나면 전선 가설이 제대로 안되어있고, 전봇대도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사회에서 전기는 곧 ‘문명’을 뜻한다. 전기는 정보교환의 가장 중요한 도구다. 전기가 없으면 신문부터 보기 어렵다. 배달만 이틀 걸리는 신문을 누가 보겠는가. 라디오와 TV방송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型 산업혁명과 전화 보급
 
중화학공업 육성계획 확정을 보도한 1973년 5월 25일자 <조선일보>.

  우리나라 경제발전 요인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많이 꼽는다. 나는 고속도로보다 농어촌 전화(電化)사업이 국민 생활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경부고속도로는 km당 1억원, 총 429억원의 건설비가 투입됐다. 농어촌 전화사업은 만 15년간 926억원이 들었다.
 
  박 대통령은 이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964년 서독에서 농민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보고 크게 자극을 받은 그는 우선 우리나라 농가에 전기부터 가설해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귀국 후 농어촌 전화사업, 즉 전기가설 사업을 전개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의 전화율은 고작 12% 정도였다.
 
  석유 판매 세금 전액을 농어촌 전화사업비에 투자하는 등 적극적인 정책 추진 결과, 새마을농촌에서 전화사업 붐이 일었다. 농촌 출신 여공(女工)들은 월급의 일부를 시골의 부모님에게 송금하면서 전기라도 놓고 살라고 권했다. 휴가 땐 라디오와 전기다리미를 선물로 사갔다. 이런 일들이 유행처럼 전국으로 퍼지면서 전화사업은 급진전하게 됐다.
 
  전기와 통신 분야에서 고속 성장을 이룬 한국은 노동시간 확대, 학습능력 증대, 고속 정보 교류 등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북한은 이 모든 부분에서 ‘미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북 경제 정책의 가장 큰 차이는 ‘피라미드형 개발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섬유제품을 예로 들면, 피라미드의 최하부는 의류다. 그리고 위로 직물, 합성섬유, 석유화학이 자리 잡고 있다. 아래에서부터 최종제품→중간제품→중간원료→기초원료다. 위로 올라갈수록 높은 수준의 기술력이 필요하다. 이 구도는 곧 한국의 수출 전략 순서가 됐다.
 


  한국은 처음부터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지 않았다. 와이셔츠와 같은 최종제품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직물과 같은 중간원료 공장을 세워 수출했고, 이후 폴리에스테르와 같은 합성섬유를 개발했다. 이 피라미드의 마지막 단계가 석유화학공장 및 종합제철 건설이다.
 
  북한은 반대였다. 처음부터 “자급자족하겠다”며 그네만의 틀로 전략을 세웠다. 석유를 석탄으로 대체하는 등 세계 조류와 동떨어진 정책을 밀어붙였다. 출발부터 비현실적 정책을 추진한 1957년 제1차 5개년계획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김일성은 “5개년계획을 2년 반 만에 완수, 공업 총생산이 2.6배로 증가했고 공업생산 증가율이 매해 36.6%에 달했다”고 자평했지만, 통계치를 분석해 보면 의혹투성이다. 결국 북한은 1960년에 심각한 식량난을 경험했고, 이는 50년 후인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경공업 수출을 통한 산업개발 전략으로 ‘산업혁명’에 돌입한 한국의 실험 결과는 수출액 증대로 나타났다. 1964년 12월 31일 저녁 10시경,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해 ‘수출산(山)’ 정상 정복의 베이스캠프를 마련했다. 바로 제1단계 산업혁명이다. 밤늦게 대기하고 있던 상공부 직원들은 모두 감격의 만세를 불렀다.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박 대통령에게 상공부장관이 전화로 보고를 시작했다.
 
  “각하! 수출대전(代錢) 1억2000만 달러가 입금됐습니다. 이로써 금년도의 목표를 달성했음을 보고 올립니다.”
 
  3년 후인 1967년 말, 한국은 수출 3억 달러를 돌파했다. 3억 달러는 당시 미국으로부터 받았던 연간 원조금의 최고 수준이었다. 1965년 방한(訪韓)한 미국의 경제학자 로스토(Rostow)는 한국이 경제성장의 결정적 전환기인 ‘이륙(take off)’ 단계에 진입했다고 말해 우리 국민에게 도약의 용기를 심어줬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는 제2단계 산업혁명이다. 수출공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공장이 우후죽순 늘어났다. 주로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였지만, ‘원료의 국산화’를 위해 기초원료 공업과 제철공업 건설이 시작됐다. 대망의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던 날 풍경은 이랬다.
 
  1969년 12월 31일, 대만 소형어선 20척 수출 작업이 끝났다. 인수증 서명도 받았고, 한국에 갖고 오면 수출 절차가 마무리된다. 그런데 마침 서울에 큰 눈이 내려 항공기 운항이 중지됐다. 인수증을 든 직원은 자동차 비상등을 켜고 서울까지 달려왔다.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였고, 종무식은 이미 12시에 시작해 끝난 상황이었다. 은행은 마감시한을 연장해 그를 기다렸다. 당시 상공부에선 장관과 모든 직원이 이 순간을 애타게 지켜봤다. 은행으로부터 ‘입금완료’란 통보가 오는 순간, 모두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1970년부터 1977년까지는 제3단계 산업혁명이다.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 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분야로 주력산업이 옮겨갔다. 제1단계는 여자 단순기능공의 공이 컸던 반면, 제3단계는 남자 기능공의 역할이 커졌다. 기술자와 과학자도 양성됐고, ‘기계의 국산화’가 이뤄졌다.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제철소와 석유화학공장이 증설됐고, 조선소, 자동차공장, 공작기계공장, 전자공업공장 등이 건설됐다. 수출액이 크게 늘어 100억 달러 수출을 이룩했다.
 


 
  南北 간 제2의 전쟁은 경제전쟁
 

중화학공업 건설은 방위산업 육성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1978년 국산전차 생산현장.

  1977년 이후 제4단계 산업혁명은 중화학공업에 정밀공업과 두뇌공업이 더해졌다. 산업구조 개편을 끝내 내실을 다진 단계다.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에너지와 자원을 절약하는 정책이 세워졌다. 수출은 1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기적에 가까운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핵심 키워드는 ‘수출제일주의’와 ‘공업입국’이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EOI(Export Oriented Industrializationㆍ수출주도산업화)’다. ‘피라미드형 개발전략’은 CEOI(The Construction of Pyramid type EOI)다. EOI가 “노동집약적 상품의 수출을 장려하는 정책만으로도 수출이란 견인력에 의해 공업을 선두로 경제가 발전한다”는 이코노미스트(economist)적 관점이라면, CEOI는 “공업기반이 없는 한국에서 수출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구조(피라미드)를 정부 주도하에 새로 구축한다”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적 관점이다.
 
  한국은 경제개발 모델이 다른 나라와 완전히 달랐다. 당시 대부분 선진국은 공업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중화학공업화가 이뤄졌고, 수출도 늘어났다. 우리나라는 먼저 수출 목표를 수립해 놓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했다.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한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는 1972년 5월 30일, 상공부가 개최한 수출확대회의를 마친 후 수출 상품 전시장을 시찰했다. 마침 자동차 부품이 전시됐는데, 박 대통령은 기계제품 수출에 관심이 컸다. 피스톤 핀(piston pin)의 정밀도에 대한 그의 질문에 한 관계자가 “1/100mm 정도 되는, 아주 정밀한 부품”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M16 총열의 정밀도와 비슷하구먼”이라고 해 함께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내게 수출 100억 달러 달성에 관한 ‘역사적 질문’을 했다.
 
  중화학공업 발진 명령 직후 나는 우리나라가 공업을 발전시켜 오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정리, 종합해서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중화학공업화와 80년대의 미래상’이란 제목의 보고로, 후진국 경제개발 전략, 공업화 발전의 5단계, 경제개발계획의 계획상 문제점과 대안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날 보고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각하!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을 건설한다는 것은 ‘남북 간의 경제전’에 돌입한다는 뜻입니다. 이 전쟁에서 패하면 패한 쪽의 체제는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중화학 건설의 성공 여부로 남북문제는 결판이 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국민은 앞으로 10년간 ‘제2의 한국전쟁’을 치른다는 단단한 각오로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정부나 기업가나 국민이 모두 필승의 신념을 갖고 분투노력하겠다는 결의를 다져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을 개시할 때 선전포고를 하는 식으로, 각하께서 정부의 단호한 의지를 국민에게 다짐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건의를 올립니다.”
 
 
  ‘중화학공업화’와 ‘국민과학화’
 
  박 대통령은 이날 보고에 만족했다. 그는 “기능자는 조국근대화의 기수”라고 했다. ‘기능자→중화학공업 건설→조국근대화→민족중흥’이란 행정 식이 성립된 셈이다. 그는 또 공단계획을 수립할 때 주거지역에 대한 도시계획까지 포함하라고 했다. 공단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토 전체를 놓고 보라는 의미였다. 기술인력 양성 문제와 국토개발 문제 등 중화학공업 건설에 필요한 모든 사항을 계획에 포함하라는 지시다.
 
  이는 우리나라의 공업구조를 완전히 개편하는 계획이다. 군대식으로 표현하면 ‘작전계획’이 아니라 ‘전략계획’을 수립하란 의미였다. 박 대통령은 이미 결심을 굳혔고, ‘남북 간의 경제전’은 이미 개시됐다. 나는 임무의 중대성과 책임의 막중함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은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10월 유신)’을 발표했다. 이를 체제개혁에만 한정해 보는 것은 옳지 않다. 10월유신에서 ‘체제개혁’과 ‘혁명과업’은 차량의 두 바퀴와 같은 개념이다. 이제 중화학공업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박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와 ‘국민과학화’를 선언했다. 그날 회견 내용 중 일부다.
 
  “우리나라 공업은 바야흐로 ‘중화학공업 시대’에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또 하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내가 제창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 모두가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과학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개발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국력이 급속히 신장할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 없이 우리는 절대 선진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80년대에 가서 우리가 100억 달러 수출, ‘중화학공업의 육성’ 등등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범국민적인 ‘과학기술의 개발’에 총력을 집중해야 되겠습니다.”
 
  ‘100억 달러 수출’은 그 의미가 크다. 목표가 달성되면 우리나라 국력은 북한을 완전히 압도하게 되고, 국민 생활 수준이 북한 주민보다 월등히 윤택해진다. 방위산업을 비롯한 중화학공업이 북한을 능가해, 감히 6ㆍ25전쟁과 같은 도발을 하지 못하게 억제할 수 있다. 남한의 자유경제체제가 북한의 사회주의체제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입증돼 남북한 간 ‘체제 경쟁’에서 완승하게 됨을 의미한다.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1973년 1월 31일,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 태완선(太完善) 부총리, 남덕우(南悳祐) 재무장관 등 주요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업구조 개편론’에 대해 최종 브리핑을 했다. 중화학공업 계획, 방위산업과의 관계 등 핵심 사안이 모두 포함돼 있었다.
 
  이날의 클라이맥스는 브리핑이 끝난 후 박 대통령의 짧은 네 문장의 말이었다. 엄숙하고 조용한 말투였는데, 한마디 하고 말을 끊고, 한참 후 다음 말을 하고 또 말을 끊었다. 이때 박 대통령의 표정은 중대 결심을 앞둔 군사령관과 같았다. 입은 굳게 다물었고, 시선은 줄곧 정면을 향했다. 부동의 자세로 홀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최종 결단에 앞서, 또 한 번의 정리를 하기 위해 자문자답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그는 계속 먼 곳만 바라봤다. 질문인 동시에 대답이었다. 이 말의 뜻은 “나(박 대통령)는 6ㆍ25와 같은 전쟁의 재발을 막으면서 평화통일을 하자는 것이지, 동족상잔의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목적 아래 중화학공업을 추진코자 하는 것이다”란 의미였다. 독백은 천천히 이어졌다.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국민들이 기꺼이 따라줬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때 패전을 해서 국민에게 막중한 피해를 주었지만.”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 해줘서야 되나.”
 
  방위산업 육성과 중화학공업 건설에 대한 그의 결론이 나왔다. 마지막 한마디 말의 뜻은 “중화학공업은 꼭 해야만 한다. 그 결과는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다. 최후의 결단은 국가원수인 내가 혼자서 내려야 한다”였을 것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누구보다 고독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2월 12일, 박 대통령은 ‘전 산업의 수출화’라는 휘호를 직접 써서 중화학공업기획단에 하사했다. 중화학공업 건설의 목적은 수출에 있다는 명령이었다. 중화학공업기획단은 이 휘호를 액자로 만들어 단장실 정면에 걸었다.
 
  중화학공업 건설은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을 이룩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조국의 국운(國運)을 건 민족적, 역사적 과업이었다. 한국이 중화학공업 국가가 된다는 것은 “우리도 산업혁명을 이룩했다”는 의미다.
 
  1970년대 세계정세는 우리에게 크게 유리하지 않았다. 남북 간의 긴장이 고조됐고, 석유파동에서 시작된 에너지 위기로 물가가 인상되는 등 경제불안이 이어졌다. 당초의 3차 5개년계획은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난관을 우리나라는 슬기롭게 극복해 냈다.
 
 
  진정한 기술강국
 
  1973년 원유 값 폭등이 수입상품 가격 인상을 불렀고, 이는 경상수지 적자로 이어졌다. 1960년대 ‘달러 고갈’이 몰고 온 위기 후 두 번째 경제위기였다.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통해 국민 불안 심리를 안정시키고 중동 진출로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우리 역사엔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스스로 목숨 걸고 나선 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들을 의병(義兵)이라 부른다. 삼국통일 때의 화랑, 임진왜란 때의 어린 의병, 6ㆍ25전쟁 때의 학도병은 모두 10대 후반의 청소년이었다. 1973년 석유위기로 나라 경제가 파국지경에 이르렀을 때, 어린 용사들은 분연히 나섰다. 중동에 파견된 17~18세 청소년 기능사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수만 리 이국 땅의 경제전쟁의 최전선에서 나라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일했다.
 
  1974년, 세계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동안 한국은 GNP 8.1% 성장, 수출 38.3% 성장이란 대기록을 세웠다. 기능사와 기술자를 양성해 중화학공업과 엔지니어링 산업을 육성했다. 공업구조를 선진화해 해외에 플랜트까지 수출할 수 있게 됐다. 수출 100억 달러와 중화학공업 비율 50% 이상을 이룬 한국은 완전한 선진공업국으로 성장했다. 기적 같은 업적을 국민이 이뤄낸 것이다. 방위산업의 육성은 자주국방 실현 의지를 한 발자국 앞당겼다.
 
  세계는 ‘불굴의 도전’으로 이룬 ‘한강의 기적’을 주목했다. 20세기 후반 경이적으로 발전한 4마리의 용(龍ㆍ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중 선두주자로 한국을 꼽았다. 1977년 미국 <뉴스위크>는 커버스토리로 한국을 다뤘다. ‘한국인이 몰려온다(The Koreans are coming)’란 제목의 이 특집기사는 한국인을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공업구조와 국민 생활을 갖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일본인을 게으른 사람으로 보는 세계 유일한 국민”이라고 소개했다.
 
  33년 후, <뉴스위크>는 또 하나의 특집기사를 내놨다. 미소(美蘇) 냉전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 지형도를 인종ㆍ종교ㆍ문화적 요인을 기초로 재조명한 기사다. 미국 채프먼 대학의 조엘 카트킨(Kotkin) 석좌 연구원이 분류한 북미동맹, 중남미 자유주의국, 이란 권역, 중화 왕국 등 복잡한 구도에서 한국은 일본, 프랑스, 브라질, 스위스 등과 함께 ‘자립국가(stand-alones)’로 구분됐다. 중요한 대목은 그들이 한국을 ‘진정한 기술강국(true technological power)’으로 규정한 부분이다. 40년 전 아프리카 가나보다 경제 수준이 낮았던 나라가 일본과 대등한 힘으로 성장한 것에 대해 그들은 또 한 번 놀랐다.
 
  하지만 여전히 위기는 존재한다. 인접한 대국(大國) 중국의 경제는 무섭게 성장하고, 일본은 여전히 막강한 힘을 유지하고 있다. 북한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등을 통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한다.
 
2010년 9월 미국 <뉴스위크>가 보도한 새로운 세계질서 지도. <뉴스위크>는 한국을 ‘진정한 기술강국’으로 규정했다.

 
  2061년의 대한민국
 
  한국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한 새로운 국가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국태를 위해 자주국방과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을 확립하고 국민생활 안정 및 향상이란 민안을 이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핵심정책으론 우선 전 국민의 정신무장이 필수다. “하면 된다” 정신과 근면ㆍ자조ㆍ협동ㆍ저축 정신이 부활해야 한다. 그리고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안보 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1970년 닉슨독트린에 의한 주한미군 7사단 철수 당시 ‘한국군 현대화 5개년계획’이란 협의가 있었다. 한국 측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해 25억~30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요구했지만, 결국 15억 달러로 낙착됐다. 당시 경제 규모로도 우리는 ‘자위(自衛)’에 경주했다. 지금은 훨씬 큰 경제규모와 국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된 안보정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달성하면 국민 총생산은 1조8000억 달러가 된다. 국방비로 5%를 쓴다면 900억 달러를 지출할 수 있게 된다. 한 해 1000억 달러 정도의 시장이 형성되면 최첨단 군 장비의 연구, 개발, 생산이 가능해진다.
 
  국가안보 확립과 국부창출을 통해 후손을 위한 미래지향적인 국토개발과 경제개발을 이뤄야 한다. 전 산업의 수출화와 전 국민의 과학화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선진 최첨단 기술공업국가를 건설하고 이를 위한 인력 양성을 지속해야 한다. 과학기술 발전은 우리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조건이다.
 
  50년 전 경제개발계획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가난하고 못 배운 여성근로자들의 희생으로 시작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땀은 세계사(史)에 유례없는 초고속성장을 이뤄냈다. 경제사령관 박정희는 조국을 경제강국으로 만들었다. 경제개발계획 100주년이 되는 2061년,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현재 우리의 선택과 노력이 후손에게 잠시 빌린 조국의 흥망(興亡)을 결정한다.⊙

吳源哲
⊙ 1928년생.
⊙ 북한 해주동공립중ㆍ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 졸업.
⊙ 공군소령 예편, 시발자동차회사 공장장, 상공부 화학과장ㆍ공업제1국장ㆍ기획관리실장ㆍ
    광공전 차관보,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 기아경제연구소 상임고문 등 역임.
⊙ 現 한국형 경제정책연구소 상임고문.
⊙ 저서 : <한국형 경제건설>(7권)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더 코리아 스토리> 등.


월간조선 2011년 신년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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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錫金 회장이 계열사까지 동원해 가며 개인 재산 축적 위해 인수했다”(이도랜드 관계자)
“그룹 피해 최소화 위해 개인 자산 투입한 책임경영의 결과”(웅진그룹 관계자)


⊙ 부천 ‘타이거월드’ 경영권 두고 기존 운영자와 새 소유권자 간 분쟁 벌어져
⊙ “적법절차를 거친 정당한 권리행사” 對 “대기업의 不法 무단 점거”

인수 분쟁으로 영업을 멈춘 ‘타이거월드’

지난 11월 4일 밤 경기도 부천시 상동에 위치한 스포츠 레저 시설 ‘타이거월드’에 시설 관계자와 회원 등이 몰려와 출입문을 부수는 등 충돌이 벌어졌다. 전날인 3일 토지와 건물 소유권이 이전되면서 골프연습장과 실내스키장 등 시설 경영권을 두고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타이거월드는 기존 운영자인 ‘이도랜드(회장 都圭永)’와 새 주인인 ‘태성티앤알(대표 白承岩)’ 간의 경영권 인수 협상이 결렬돼 진통을 겪어왔다. 태성티앤알은 웅진그룹의 尹錫金(윤석금) 회장이 개인 자산으로 세운 그룹 계열사다.
 
 이도랜드 측은 “웅진그룹의 윤 회장이 개인 재산 축적을 위해 계열사 자금까지 동원해 가며 타이거월드를 인수했다”면서 “점거 과정에서 용역직원들이 동원되는 등 불법 행위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태성티앤알은 “재무구조가 악화된 타이거월드를 살리기 위해 대주주인 윤 회장이 직접 私財(사재)를 지원, 특수목적법인인 태성티앤알을 설립해 公賣(공매) 낙찰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면서 “법원의 경매 집행관의 합법적인 절차하에 점유를 개시했으며, 당시 이도랜드 직원이 한 명도 없어 이 과정에선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이도랜드 측은 태성티앤알을 주거침입과 영업방해 등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고, 태성티앤알은 영업방해 가처분 등의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이도랜드 임원진을 업무상 배임, 횡령 등의 혐의로 형사 고발했다.
 
 당시 목격자와 경찰 증언에 따르면, 태성티앤알의 점거 이후 이도랜드 측 직원이 진입을 시도하면서 출입문이 부서지는 등 일부 파손이 일어났으나, 인명 피해나 시설 파괴는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분쟁의 시작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6년 12월, 정인코아(現 이도랜드)를 인수한 도규영 회장은 당시 60%의 상가가 분양된 타이거월드 공사를 시공사인 극동건설과 함께 진행했다. 극동건설은 지난 2007년 6월 웅진그룹이 인수했다.
 
 
 “尹 회장이 개인 재산 축적 위해 인수”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2007년 6월 준공된 타이거월드는 국내 최초의 실내스키장과 국내 최대 골프연습장, 대형 워터파크 등을 갖춘 복합스포츠레저시설. 하지만 준공 전 분양 과정에서 工期(공기·공사 기간) 지연과 설계 변경 등의 이유로 분양자들의 항의가 잇따랐다. 공기 지연과 설계 변경에 대해 현재 이도랜드와 극동건설은 서로 상대방에게 책임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도랜드는 결국 총 600억원대의 분양금을 175명 분양자 전체에게 돌려주는 조건으로 전체 분양 계약을 해지한 후 준공 승인을 받았다. 태성티앤알 측은 “再(재)분양에 대한 확신도 없이 무작정 은행 빚을 얻어 분양 해지를 결행한 것은 이도랜드의 명백한 오판이었다”고 주장했다.
 
 태성티앤알의 법무 담당자는 2007년 6월 웅진그룹이 론스타로부터 6600억원에 극동건설을 인수한 것에 대해 “당시만 해도 건설경기가 나쁘지 않았고, 그룹 차원에서 건설사 인수합병(M&A)을 추진하던 중 법정관리에서 완전히 회복해 경영정상화가 이뤄진 극동건설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며 인수 배경을 설명했다.
 
 이듬해인 2008년 상반기부터 건설경기가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상가 재분양은 실패했고, 프로젝트 파이낸싱(PF)으로 조달된 1300억원에 대한 상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자금 사정이 악화된 데다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찾아와 2009년 1월 사실상 부도가 발생했다. 결국 2009년 8월 이뤄진 공매에서 타이거월드는 웅진그룹의 계열사인 태성티엔알에 2210억원에 낙찰됐다.
 
타이거월드 출입문에 붙은 “‘웅진’의 무단점거로 인해 임시 휴장합니다”란 안내문.

 이도랜드 측은 “자산가치 4000억원에 이르는 타이거월드를 반값 수준으로 인수했다”면서 “사실상 윤석금 회장의 개인기업이 2000억원에 이르는 차익을 남긴 셈”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태성티앤알 측은 “채권은행들이 극동건설에 타이거월드의 채무 1300억원을 대신 지급할 것을 요구했고, 공사비 미회수로 극동건설의 재무구조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입찰 경쟁자보다 높은 가격에 낙찰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금융감독원의 공시에 따르면, 2009년 6월 설립된 태성티앤알은 웅진그룹의 윤석금 회장이 보통주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회사 설립 과정에서 윤 회장이 지분 86%를 보유한 또 다른 자회사 ‘렉스필드컨트리클럽’을 통해 240억원, 윤 회장 개인을 통해 700억원의 자금이 태성티앤알에 대여됐다.
 
 이도랜드 측은 “차입 과정에서 웅진홀딩스와 웅진폴리실리콘 등 계열사들이 수백억 원에 이르는 담보제공과 금전대여를 지원했다”면서...

계속...

월간조선 2009년 12월호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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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경제부·군인공제회·중부발전·강원랜드… 관계자들 줄줄이 구속

로비 혐의 받았던 金永哲 前 국무총리실 사무차장, 검찰 수사 앞두고 자살
케너텍: “회사의 성장배경은 기술 경쟁력과 영업력, 특혜나 배후 없었다” 주장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hgu@chosun.com


지난 3월 3일 김영철 전 국무총리실 사무차장이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 받고 있다.
 지난 10월 10일 오전 8시, 서울 강남구 일원동 한 아파트에서 60대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딸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화장실에서 목을 맨 남성의 시신을 확인했다.
 
  이날 집엔 그의 아버지와 아내, 딸 등이 있었다. 별다른 외상이나 외부 침입의 흔적은 없었다. 가족들은 그가 전날 오후 10시쯤 잠자리에 들었고, 이상 징후는 없었다고 증언했다.
 
  안방 서랍장 위에서 A4용지 한 장이 발견됐다. “여보 사랑해, 미안해. 힘들어서 먼저 갑니다.”
 
  故人(고인)의 이름은 金永哲(김영철·61), 사망 일주일 전까지 그의 직함은 국무총리실 사무차장(차관급)이었다. 1972년 행정고시를 합격한 후 30여 년 동안 상공부와 대통령비서실에서 공무원 생활을 해온 김씨는 2002년 7월부터 2005년 8월까지 한국중부발전 사장을 역임했다. 검찰은 그가 재임 당시 케너텍이란 에너지회사로부터 금품을 받은 정황을 최근 포착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검찰은 수사선상에 오른 인사가 사망하자 당혹스러워 했다. 김씨에게 소환통보를 하거나 내사 중이라고 발표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대검 관계자는 “아직 혐의 사실을 구체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 사건이 발생해 안타깝고 당혹스럽다”고 밝혔다.
 
  행사 참석차 대전을 방문 중이던 韓昇洙(한승수) 국무총리는 보고를 받은 후 한참 동안 할말을 잊은 채 침통함을 감추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현재 김씨의 사인을 자살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그가 죽음으로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있었을까. 그에게 수천만원의 금품을 건넨 혐의를 받고 있는 케너텍은 어떤 회사일까.
 
 
  승승장구 속의 끝없는 의혹
 
  케너텍(대표 정복임)은 자본금 67억원에 임직원 수 239명의 에너지절약 시스템 전문 중소기업이다. 1997년 9월 24일, ‘고신엔지니어링’이란 이름으로 자본금 5000만원에 회사가 설립됐다. 2000년 1월 ‘케너텍’으로 상호를 변경한 후, 2003년 5월 코스닥에 등록됐다.
 
  회사는 이때부터 乘勝長驅(승승장구)했다. 상장 6개월 후인 12월, 군인공제회가 제3자 유상증자 방식으로 9억7200만원을 케너텍에 투자했다. 다음해 11월엔 서울 사당지구 區域(구역)전기사업자로 선정됐다. 2005년 7월, 케너텍은 자산 1400억원 규모의 대전열병합발전소를 포스코건설, 조선내화와 함께 인수했다. 그리고 2년 뒤 지분 전량을 매각해 114억원의 차익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2007년 5월, 케너텍은 인도네시아 에너지그룹인 누안사(NUANSA)와 ‘직접석탄액화(DCL) 기술을 이용한 석유 생산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이후 11월까지 한국전력, 포스코건설 등과 파트너십을 구축해 인도네시아 석탄개발 사업에 관한 MOU를 연달아 체결했다.
 
  케너텍은 상장 5년 만에 자산 2000억원, 연매출액 950억원에 달하는 기업으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최근 수많은 의혹 속에 이 회사와 인연을 맺었던 관련자들이 검찰에 줄줄이 소환구속되고 있다. 구속된 인사들의 면면은 강원랜드 시설개발팀장, 지식경제부 사무관, 前(전) 군인공제회 이사장, 전 한국중부발전 사장, 케너텍 회장 등 각양각색이다. 큼직한 거래 뒤엔 관계자들의 검찰수사와 구속이 뒤따랐다.
 
  시작은 강원랜드 비자금 조성 의혹 수사였다. 당시만 해도 ‘곁가지’에 불과했던 케너텍 수사는 새로운 관련자와 사건들이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이어져 나와 이젠 ‘케너텍 게이트’란 말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2008년 8월 26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부장 박용석)는 강원랜드 비자금설과 관련해 케너텍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입수된 회계장부와 메모를 통해 케너텍이 68억원 상당의 비자금을 조성해 로비활동을 벌인 단서를 잡아냈다.
 
  사흘 후인 8월 29일, 강원랜드의 전 시설개발팀장 김모(56)씨가 구속됐다. 강원랜드 열병합발전시설 공사 수주 과정에서 허위서류를 작성해 케너텍이 금융기관으로부터 에너지합리화 자금 97억여원을 대출받을 수 있게 도와주고, 8500만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혐의였다.
 
  9월 2일, 검찰은 금품 수수 혐의와 관련, 鄭長燮(정장섭·60) 전 한국중부발전 사장의 서울 삼성동 사무실과 자택을 압수수색 해 회계장부 등을 확보했다.
 
  9월 3일, 검찰의 강원랜드 압수수색이 실시됐다. 경영기획팀·재무기획팀·회계팀 등에서 회계장부와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확보한 검찰은 강원랜드의 자금 흐름을 집중 추적했다.
 
 
  朴仙淑 민주당 의원 : “韓昇洙 총리 중앙亞 순방 時 케너텍 관계자 동행”
 
  9월 9일, 케너텍 李相善(이상선·61) 회장과 지식경제부 이모(52) 사무관이 각각 뇌물공여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이 회장은 10일 전 구속된 김씨에게 8500만원을 준 혐의와, 2004년 11월 구역형 집단에너지사업(CES) 허가와 관련해 이 사무관에게 1억원 상당의 금품을 건넨 혐의를 받고 있다.
 
  9월 20일엔 金勝廣(김승광·74) 전 군인공제회 이사장이 케너텍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2004년 3월 케너텍으로부터 자금투자 및 열병합발전설비 공사수주와 관련해 회사 주식 3만주를 받은 혐의다.
 
  9월 30일, 韓秀洋(한수양·63) 포스코건설 사장이 국내외 에너지 사업 공동 추진 등의 청탁과 함께 케너텍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를 포착하고 수사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동아일보>가 보도했다. 대검 중수부는 11월 4일에 한 사장을 소환 조사했다.
 
  10월 1일, 케너텍으로부터 사업수주 청탁과 함께 수억 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정장섭 전 한국중부발전 사장이 구속됐다. 이후 비슷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영철 국무총리실 사무차장에 대한 언론 보도가 잇따랐다. 검찰이 소환 조사할 것이란 추측과, 후에 사법 처리되면 李明博(이명박) 정부 고위공무원으로는 첫 사례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김 사무차장은 의혹이 일던 당시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말씀드릴 게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제 말이 (혐의를)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10월 2일, 김 사무차장이 사의를 표명했고, 다음날 사표가 수리됐다.
 
  10월 6일 국정감사에서 민주당의 朴仙淑(박선숙) 의원이 지난 5월 중앙아시아 순방에서 한승수 총리를 수행한 경제인단 선정과정의 문제점과, 김영철 사무차장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박 의원은 趙重杓(조중표) 국무총리실장에게 질의 중 “한 총리가 순방을 갈 때 경제인단 64명 가운데 케너텍 관계자(이상선 회장)가 포함돼 있었다”면서 “(회사의) 규모나 인지도 면에서 특이하다”고 했다. 또 “케너텍의 주가가 총리 순방 당시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나흘 후, 김영철 사무차장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전방위적인 로비의혹이 끊이지 않는 케너텍, 그 의혹의 열쇠는 현재 구속된 이상선 회장으로 집중되고 있다. 이씨는 각종 언론과 대외 자료에서는 ‘회장’이란 직함으로 등장하지만, 회사 등기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케너텍 측은 이씨가 기술 및 영업에 대한 고문 역할을 담당했다고 밝혔다.
 
 
  고신열관리와 케너텍의 ‘알 수 없는 관계’
 
정복임 현 케너텍 대표이사.

  현재 케너텍의 대표이사 및 대주주는 鄭福任(정복임·53) 사장이다. 연세대 간호학과 출신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수간호사로 근무하다 1997년 9월 케너텍의 전신인 고신엔지니어링을 인수했다. 당시 정씨의 직책은 감사였고, 1999년 2월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정복임 사장은 2005년부터 여성 CEO 중 코스닥 보유 주식 순위 1~2위로 꼽히고 있다. 올해 4월엔 한 주간지가 뽑은 ‘한국 100대 CEO’에 선정됐다.
 
  여론은 현재 이상선 회장이 故(고) 李在晩(이재만) 전 의원의 아들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1950년까지 주식회사 조선제유공업이란 기업을 운영했던 이 전 의원은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회 자문위원이 됐다. 그는 1년 후 치러진 총선에 공화당으로 출마해 당선, 이후 산업기술개발본부 회장, 농업기술연수회장, 기업경영진단사협회장,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명예회장, 과학기술교육진흥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80년 5월, 이 전 의원은 열관리기기 제조판매업체인 ‘고신열관리’를 설립한다. 이 회사의 대표이사가 이상선 회장이다. 고신열관리는 1992년 5월에 부도가 났고, 같은 해 12월 23일부터 정리절차에 들어갔다. 1994년 3월 30일 정리계획 인가가 났지만 결국 1998년 8월 문을 닫았다.
 
  그런데 고신열관리와 케너텍(고신엔지니어링)은 회사명, 주소, 전화번호, 업종, 임원이 모두 같거나 비슷하다. 본점이 모두 서울시 여의도의 한 빌딩에 위치하고 있다. 지점과 공장도 각각 포항과 수원의 같은 주소지로 돼 있다. 회사 전화번호도 같다. 고신열관리의 각종 의장등록권과 실용신안등록권을 비롯해 연구용역 과제들이 케너텍으로 이전됐다고 전해진다.
 
  고신엔지니어링 설립 당시 대표이사는 이상선 회장의 아내이며, 이 회장 부부와 현재 케너텍 대표이사인 정복임 사장은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상선 회장의 여동생은 정 사장과 같은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정 사장이 수간호사로 있었던 병원에 근무 중이다. 이상선 회장의 아내와 동생이 모두 정 사장과 친분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선 회장의 여동생에게 답변을 듣기 위해 몇 차례 직장으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담당자는 “바쁜 일정 때문에 통화가 어렵다”고 말했다. 결국 직접 찾아가 “이 회장에게 정 사장을 소개시켜준 당사자가 아니냐”고 물어봤다. 그는 “이 회장의 일에는 전혀 관련된 바가 없고, 아는 것도 없다”고 답했다.
 
  고신열관리 대표이사였던 이모(58)씨는 케너텍 설립 초기 생산본부장(이사)으로 근무했다. 고신열관리 이사였던 김모(52)씨는 현재 케너텍 감사 직을 맡고 있다. 하지만 회사에서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들의 약력 중 고신열관리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주간동아> 2008년 11월 11일자(660호) 보도에 따르면, 고신열관리의 대여금 채권을 인수한 동양파이낸셜은 2005년 10월 케너텍을 상대로 약 36억원 규모의 양수금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동양파이낸셜 측의 한 관계자는 <주간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케너텍은 고신열관리라는 회사가 있던 그 자리에 법인 번호만 다르게 세워진 회사다. 직원들은 물론 기존 거래처도 그대로 넘겨받았다. 채무만 넘겨받지 않았다. 그래 놓고 제삼자를 내세워 영업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채무를 갚지 않기 위해 기업을 세탁한 게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했다.
 
 
  “케너텍, 정부 지원금 2000억 이상 받아”
 
김영철 전 국무총리실 사무차장.

  1심 재판에서는 케너텍이 승소했다. 동양파이낸셜 측은 판결에 대해 불복, 항소를 제기했고 현재 서울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진행 중이다.
 
  케너텍은 고신열관리와의 관계에 대해 “아무런 상관이 없는 회사이며, 이상선씨는 30년 동안 연소사업 분야에 종사했던 사람으로, 회사는 이씨에게서 연소기술에 대한 도움을 받았을 뿐 회사 설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답했다.
 
  동양파이낸셜 담당자는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한 회사를 어떻게 하려는 것이 아니며, 다만 동양파이낸셜 입장에선 일이 커지는 것이 조심스러운 상황”이라며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이라 공식입장 표명은 어렵다”고 했다.
 
  케너텍은 설립 때부터 현재까지 ‘미스터리’한 행적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에 대해 지난 10월 열린 국정감사를 전후로 국회의원들의 의혹 제기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鄭泰根(정태근) 한나라당 의원은 “에너지 관련 카르텔인 ‘블랙 네트워크’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정 의원은 “케너텍은 참여정부 시절 추진했던 에너지 정책의 모범 사례였으나, 결국 블랙 네트워크로 채워져 있었다”면서, “향후 이명박 정부 5년간 막대한 규모로 투입될 에너지 관련 정책 자금이 성과 없이 특정 기업을 배 불려 낭비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승광 전 군인공제회 이사장.

  정 의원은 지난 9월 17일 열린 국회 지식경제위원회에서 케너텍에 대한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정 의원은 “케너텍이 2007년도 에너지절약 전문기업(ESCO) 융자 중 가장 큰 규모의 금액이 지원됐는데, 실태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함께 융자를 받은 케너텍의 자회사인 L사와 C사도 마찬가지로 실태조사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틀 후인 9월 19일, 李載勳(이재훈) 지식경제부 제2차관은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총 34건의 융자 지원이 케너텍에 있었고, 21건에 대해 사후관리 실태조사가 이뤄졌으며, 그중 6건은 현장조사가 실시됐다”면서, “케너텍의 실태조사는 전체 평균치보다 높으며, 위법부당한 자금 지원은 없었다고 들었다”고 답했다.
 
  10월 13일, 한나라당 李達坤(이달곤) 의원은 ESCO에 대한 지원사업이 삼성에버랜드와 케너텍 2개사에 집중됐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에 따르면, 2000년 이후 8년 반 동안 162개 업체가 총 1조403억원을 지원받았는데, 이중 삼성에버랜드가 2076억원으로 전체의 20%, 케너텍이 1369억원으로 13.2%를 차지했다.
 
  지원을 받은 162개 업체 중 95개 기업은 사업을 중도에 포기, 사업포기율이 59%에 이른다. 이 의원은 “지원금액은 늘었지만 사업 업체 수는 점점 줄고 있다”면서 “반면 일부 업체에 지원이 편중되는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케너텍의 입장
 
정장섭 전 한국중부발전 사장.

  한나라당의 金起炫(김기현) 의원은 지난 10월 23일 발표한 보도자료를 통해 “케너텍에 대한 지식경제부 산하 기관들의 지원규모가 2065억7164만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에 따르면, 에너지관리공단, 중소기업진흥공단, 산업기술평가원부 등 지경부 산하기관들은 60차례에 걸쳐 총 1568억원을 케너텍에 지원했다. 이 외에도 한국전력공사가 ‘하이브리드 SCR 탈질 시스템 개발’에 약 17억원, ‘중국 화력발전소 탈질설비 시험사업’에 약 27억원을 케너텍에 지원했고, 중부발전은 서천 12호기 질소산화물 저감설비에 약 160억원, 인천 12호기 질소산화물 저감설비에 약 112억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일반 중소기업들은 1000만원도 빌리기 어려운 실정에서 유독 지경부 산하기관들이 앞다퉈 특정회사 지원하기에 나선 것은 참으로 의문이 아닐 수 없다”면서 “지원액수만 보더라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케너텍은 이러한 의혹에 대해 “자금 지원은 모두 회사의 기술력과 영업력으로 심사를 통과하여 받았으며, 특혜 및 배후는 없었다”고 답해 왔다. 케너텍 측의 답변이다.
 
  “ESCO는 기술력을 가진 업체가 에너지절감 사업에 적극 참여하도록 국가가 장려하는 사업이다. 당사(케너텍)는 국내 최초로 아파트 소형 열병합발전 시스템을 도입, 전국에 보급 및 활성화했다. 타사 대비 우월한 기술력과 영업으로 2008년 10월말 기준 전국 40개 단지에 소형 열병합 발전 최다 실적을 갖고 있다.
 
  현재 ‘소형 열병합발전시스템 ESCO 투자사업에 대한 적격심사기준’에 의해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자금은 금융기관의 심사를 통해 지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특혜나 배후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삼성에버랜드와 함께 지원금이 편중됐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2007년 이전까지는 ESCO 자금이 선착순 배정으로 조기에 소진됐다”며 “케너텍의 사업 특성상 여름철에 난방공사를 진행해야 하는 특수성 때문에 연초 계약체결이 돼 ESCO 자금 신청을 조기에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케너텍 측은 시장원리와 회사의 기술 경쟁력을 강조했다. 친환경 에너지 시스템 중 하나인 ‘축열식 연소시스템’의 국산화 성공, 국내 최초 ‘소형 열병합발전 시스템’ 도입, ‘목질계 바이오매스 열병합발전’ 국내 최초 도입 등 다양한 기술 도입과 발 빠른 사업다각화를 통해 프로젝트를 수주했다는 것이다.
 
  케너텍은 일부 관계자들의 구속 및 소환에 대해서는 “회사 급성장 과정에서 관련 업계에 금품을 전달했음은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이는 영업상의 일반적 범위였다고 생각된다”고 밝혀왔다. 또 “회사의 성장 과정을 로비와 연계하는 것은 회사 임직원들의 피와 땀, 노력의 결과를 구름 속으로 날려버리는 것과 같다”고 했다.
 
  케너텍의 사외이사 중 김모(61)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 후보 시절 정책자문단으로 활동했었다. 지금은 모 정부부처의 정책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주간동아> 2008년 11월 4일(659호)자는 “이 회장이 동갑내기인 김씨를 직접 영입했고, 이 회장의 인맥이 정재계 인사들과 정부 사정기관 최고위급 인사까지 거론된다”고 보도했다.
 
 
  現 정부 정책자문위원, 사외이사에서 중도 퇴임
 
  김 교수는 이 보도가 나간 사흘 후인 11월 7일 사외이사에서 중도 퇴임했다. 퇴임 이유는 ‘일신상의 사유’다. 정확한 퇴임 사유를 묻기 위해 김 교수의 휴대전화로 몇 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기는 계속 꺼져 있었다. 김 교수는 현재 소속 대학에서 안식년을 얻은 상태다.
 
  케너텍의 공동대표인 辛東午(신동오) 사장은 1968년에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1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사망한 김영철 전 사무차장은 1년 뒤인 1969년에 서울대 농화학과를 졸업, 12회 행정고시를 통과했다. 둘은 상공부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고, 또 서로 막역한 사이로 알려졌다. 구속된 이상선 회장과 신동오 사장, 김영철 전 차장은 모두 1947년생 동갑이다.
 
  신동오 사장은 김 전 차장과의 관계에 대해 “김 전 차장은 상공부에서 20여 년, 신 사장은 상공부 및 중소기업청에서 28년간 공직생활을 해 직장동료로서 잘 아는 사이이나, 금품로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면서 “그의 사망에 대해선 전 직장 동료로서 애석한 심정”이라고 알려 왔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김영철 전 차장은 생전에 ‘완벽주의자’란 말까지 들을 정도로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知人(지인)은 김씨에 대해 “항상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려 했고, 가족을 끔찍이 아꼈다”며 “미국에서 공부 중인 아들에게서 사흘 이상 연락이 안 되면 안절부절못할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또 “올해 초 좋은 인연이 돼 좋은 자리(국무총리실 사무차장)를 잡았다며 함께 축하해줬는데, 이런 불상사가 생겨 안타깝다”고 했다.
 
  김 전 차장의 동생은 현재 강원도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에게 형의 자살 사건에 대해 묻자 “현재로선 어떤 의혹이나 배후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숨겨진 진실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는 것이 없어 안타깝지만 답변할 것이 없다”고 답했다.
 
  김 전 차장의 사위는 현직 검사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그의 지인들 사이에선 “김 전 차장이 사위 보기 부끄러워서 갔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평소 강직한 성격으로 알려졌던 그에게 로비혐의가 제기돼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지난 7월 29일 독도를 방문한 한승수 국무총리(오른쪽 두번째). 김영철 전 국무총리실 사무차장(왼쪽 두번째)은 한 총리를 항상 최측근에서 수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韓昇洙 총리와 金永哲씨는 ‘죽어서도 못잊을’ 관계
 
  김 전 차장의 사망 직후 한승수 국무총리와의 인연이 화제가 됐다. 김 전 차장은 상공부에서 공직생활을 한 정통 관료 출신이다. 한 총리가 상공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1988년 12월~1990년 3월) 김 전 차장은 장관 비서관(1989년 2월~1990년 4월)으로 재직했고, 한 총리가 대통령 비서실장(1994년 12월~1995년 12월)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를 청와대로 데려가 청와대 비서실장 비서관(1995년 1월~1996년 1월)으로 근무했다. 한 총리가 근무지를 옮기면서 그를 데려간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상당히 가까웠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 총리가 대통령 비서실장에서 물러났을 때 김 전 차장은 청와대에 그대로 남아 대통령 비서실 정무수석실 정무비서관(1996년 2월~1998년 2월)을 지냈다. 김 전 차장이 대통령 비서실에서 정무수석실로 자리를 옮길 때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나는 한 총리가 당시 李源宗(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그를 천거했다고 한다.
 
  김 전 차장은 지난 2002년 7월에서 2005년 8월까지 한국중부발전 사장직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무리했으나 한 총리와의 인연으로 올 2월 다시 공직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한 지인은 “김 전 차장은 기수(행정고시)로 따지면 차관급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현직의 동기들은 대부분 장관급이다. 그런데 한 총리의 부름을 받자 두말 없이 사무차장(차관급) 자리를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살아생전 김 사무차장은 지인들에게 “내가 죽어서도 못 잊을 고마운 세 분이 있는데 金正濂(김정렴) 전 대통령비서실장, 이원종 전 수석, 그리고 한승수 총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 전 차장은 공직 사회에서 실력을 꽤 인정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증언에 의하면, 1970년대 초 朴正熙(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청와대에 군 출신이 너무 많다’며 행정고시 출신을 뽑으라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행정고시 합격생 중 성적 5등 이내의 우수한 인사들이 청와대로 뽑혀 오게 됐는데, 그중 한 명이 김 전 차장이었다. 이 전 수석은 김 전 차장에 대해 “지금까지 만나 본 공무원 중에 가장 겸손하고 진지하며 소명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증언했다. 그의 말이다.
 
  “사람이 진지하고 참 성실했어요. 문제의식도 있었고, 남의 의견을 인정할 줄도 알았습니다. 소명감이 있어 아부도 하지 않았어요. 대한민국 공무원이 모두 김 전 차장만큼만 했으면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사건이 마무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 그 사람 성품으로 보자면 (그의 사망은) 뭔가 구조적 요인이 있었을 것이라 봐요.”
 
  이 전 수석은 “그저 힘든 고비 잘 이겨낸 후 세상 등지고 조용히 지낼 줄로만 알았는데, 갑자기 자살사고가 발생해 몹시 당황스럽고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死者(사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수사는 계속되고 있고,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고구마줄기’는 계속 전방위로 그 의혹을 확산시키고 있다. 김 전 차장이 죽음으로 지키려고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케너텍 사건 주요 일지
 
  2008년
  5월 11일    한승수 총리 중앙아시아 순방 동행 경제인단에 이상선 케너텍 회장 포함됨.
  8월 26일    검찰, 케너텍 서울사무소 압수수색.
  8월 29일    강원랜드 전 시설개발팀장 김모(56)씨 구속(배임수재 혐의).
  9월 2일    검찰, 정장섭 전 한국중부발전 사장 사무실과 자택 압수수색.
  9월 3일    검찰, 강원랜드 압수수색.
  9월 9일    이상선 케너텍 회장, 지식경제부 이모 사무관 구속(각각 뇌물공여뇌물수수
              혐의).
  9월 17일    정태근 의원(한나라당), 국회 지식경제위원회에서 ESCO의 케너텍 지원에
              의혹 제기.
  9월 20일    김승광 전 군인공제회 이사장 구속(배임수재 혐의).
  9월 28일    <일요신문>, “케너텍 ‘비자금 X파일’ 단독 추적” 기사에서 ‘현직 차관급
              고위공무원 A씨’(김영철 사무차장)에 대한 의혹 제기.
  9월 30일    <동아일보>, 검찰의 한수양 포스코건설 사장 금품수수 혐의 수사 보도.
              대검 중수부의 케너텍 수사 보도에서 ‘현직 차관급 공무원 김모(김영철
              사무차장)씨’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함.
  10월 1일    정장섭 전 한국중부발전 사장 구속(배임수재 혐의).
  10월 2일    김영철 국무총리실 사무차장 사의 표명.
  10월 3일    김 사무차장 사표 수리.
  10월 6일    박선숙 의원(민주당), 국감에서 한 총리 중앙아 순방 수행에 동행한
              경제인단 선정에 대한 문제 제기 중 김 전 사무차장 거론.
  10월 7일    <조세일보>, 박 의원의 발언 내용 보도.
  10월 10일    김 전 사무차장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자살로 추정).
  11월 4일    대검 중수부 한수양 포스코건설 사장 소환 조사.
              <주간동아>, 케너텍 사외이사 김모 교수에 대한 의혹 제기.
  11월 7일    김 교수 사외이사에서 중도 퇴임.


월간조선 2008년 12월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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