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은 무슨… 대통령의 위로 한마디면 가슴이 뻥 뚫릴 텐데”

⊙ 8만2959명 拉北者 명부 50년 만에 발굴해 전쟁拉北 사건 再조명
⊙ “아버지 생존했다면 九旬… 더 늦기 전에 대책 마련해야”
⊙ “南北정상회담 의제에 전쟁납북자 문제 반드시 포함돼야”

李美一
⊙ 1949년 서울 출생.
⊙ 서울사대부고·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 졸업.
⊙ 사회복지사 자격으로 어린이집 운영하다 2000년 6·25사변납북자가족회 설립, 초대회장 역임.
⊙ 現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원장.

1950년 9월 4일, 서울 청량리 이성환(李聖煥)씨 집에 ‘유 소좌’라 불리는 남자가 찾아왔다. 작은 키에 쌍꺼풀이 짙은 얼굴의 그는 함경도 사투리를 쓰며 이씨를 찾았다. 아내 김복남(金福南)씨는 집 뒤쪽에 있던 남편을 나오지 말라며 슬그머니 밀었다. 얼마 전 시아주버니(남편의 형)인 이성봉 박사가 인민군에 납치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다급해하는 아내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마당으로 나왔다. 마루에 걸터앉은 유 소좌는 “서북청년단에 기부를 많이 했느냐”고 물었고, 이씨는 “이북에서 내려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서 조금 했다”고 답했다. 유 소좌는 “조금은 왜 했느냐”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리고 다짜고짜 물어볼 게 있다며 지서로 가자고 했다.
 
 김복남씨는 그 후 60년 동안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당시 이씨의 나이는 30세, 아내 김씨는 28세였다. 어린 세 딸 은일(銀一), 미일(美一), 영일(英一)은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와 헤어졌다. 2010년, 중년을 훌쩍 넘긴 딸들에게 이 ‘기억에도 없는’ 60년 전 사건은 가슴에 맺힌 한(恨)이 돼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제외된 戰時납북자 8만2959명
 
이미일 이사장(왼쪽)이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두 살 때부터 몸이 아팠던 그는 수술 후 결핵성척추염으로 판정받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6·25전쟁 중 이씨와 같은 식으로 납북(拉北)된 사람은 8만2959명에 이른다. 2002년 2월 <월간조선(月刊朝鮮)>은 ‘대한민국 정부’가 1952년 작성한 ‘6·25 사변 피랍치자 명부’를 단독 입수해 보도했다. 총 5권 중 1권으로 서울시 명단만 수록된 사료(史料)였다. 한 달 후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이미일·이하 가족회)’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사장돼 있던 전국명부를 찾아냈고, <월간조선>은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 출간했다.
 
 납북인사의 직업은 정치인, 법률가, 공무원, 종교인, 교사, 언론인, 의사 등 사회지도 계층이 많았다. 북한이 남한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쟁 전 치밀한 준비를 거쳐 나온 작전이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소설가 이광수(李光洙), 현상윤(玄相允) 고려대 총장, 국회의원 안재홍(安在鴻), 방응모(方應謨) 조선일보 사장, 철학자 한치진(韓稚振) 등 유명인사들이 납북명단에 포함됐다.
 
 1946년 김일성(金日成)은 ‘남조선에서 인테리들을 데려올데 대하여’란 담화에서 “부족한 인텔리 문제를 해결하자면, 북조선에 있는 인텔리들을 다 찾아내는 한편, 남조선에 있는 인텔리들을 데려와야 한다”고 했다. 북한은 서울 점령 기간 중 남한의 국회의원들이 피신하자 자수 권고 기사를 신문에 냈고, 인력난이 계속되자 남한 내 기술자들을 찾아내 북으로 데려갔다.
 
 명부까지 공개됐지만, 정부의 반응은 여전히 미온적이었다. 관련법과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 실체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31일 통일부장관의 대통령 새해 업무보고 중 발표된 ‘국군포로·납북자 및 이산가족 현황’에서도 8만여 명의 전시(戰時) 납북자는 제외돼 있었다. 통일부는 “전체 내용 중 일부만 발췌해서 보고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기술적인 문제”라고 해명했지만, 담당부처의 무관심은 가족회 회원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겼다.
 
 
 戰後납북자만 언급한 DJ 기자회견 본 후 활동 결심
 
 지난 3월 2일,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가족회가 16대 국회였던 2003년부터 추진한 법안이 7년 만에 빛을 발한 것이다. 법안은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6·25전쟁 납북피해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를 두고 납북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에 대한 사업을 추진하는 내용이 골자다.
 
 10년에 걸친 ‘또 하나의 전쟁’의 중심엔 항상 이미일(李美一) 가족회 이사장이 있었다. 아버지 이성환씨의 납북 당시 두 살이었던 그는 사실상 평생을 ‘납북’이란 커다란 짐을 등에 진 채 60년 세월을 보내야 했다. 결핵성척추염으로 굽은 그의 등은 질곡(桎梏)의 무게를 보여주는 듯했다.
 
 “전쟁을 겪었던 분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니까, ‘당연한 사실’이 ‘모호한 추정’으로 바뀌는 것에 너무 놀랐습니다. 1950~60년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끊임없이 사설과 기사를 통해 납북 민간인 문제를 거론했죠. 그런데 2000년대가 되니 역사가 설화(說話)로 바뀌더군요. 어느 순간부터 납북 사실 자체가 아득한 세월 속에 방치돼 버린 거죠.”
 
 이 이사장이 본격적으로 납북자 관련 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김대중(金大中) 정권의 납북자에 대한 발언이었다. 2000년 9월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 전 대통령이 “납북자가 300~400명”이라고 언급한 것에 대해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전후(戰後) 납북자의 사례만 합산했다면 당시로선 비슷하게 맞는 숫자였죠. 그런데 분명 전쟁 납북자는 훨씬 많았거든요. 그래서 해당 기사를 쓴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숫자가 잘못됐다, 오보다’라고 하니, 그 기자가 ‘단체를 만들어서 활동하면 기사로 쓰겠다’고 하더군요. 혼자 얘기해 봐야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이사장은 곧바로 단체 결성에 들어갔다. ...

계속...

월간조선 2010년 4월호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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