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뮤지컬 브로드웨이에 수출하겠다”
⊙ <맘마미아> <시카고> <아이다> <렌트> 등 해외 유명 뮤지컬 수입해 흥행 성공시켜
‘브로드웨이 朴’으로 불려
⊙ 한정된 작품 놓고 한국인끼리 출혈 경쟁…로열티 10년 새 5배 폭등
⊙ “신시컴퍼니는 더 이상 새로운 뮤지컬 수입 경쟁에 참여하지 않겠다”
⊙ “배우로서의 정신과 인격, 그리고 품위를 생각한다면 최정원씨가 최고의 뮤지컬 배우”
朴明誠(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는 <맘마미아> <시카고> 등 해외 대형 뮤지컬을 한국 무대에 올린 주인공이다. 그는 오래된 해외 유명 작품을 베껴 무대에 올리던 국내 뮤지컬계의 기존 관행을 깨고, 최초로 정당한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공연을 해 흥행에 성공했다.
1998년 첫 계약에 성공한 뮤지컬 <더 라이프>는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제작비 6억8000만원을 훌쩍 넘는 수익을 남겼다. 이후 <렌트> <헤어스프레이> <아이다> <댄싱 섀도우> 등으로 ‘대박’을 터뜨린 그는 2007년 한국뮤지컬대상 최우수작품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덕분에 그는 한국 뮤지컬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통한다.
그랬던 그가 최근 해외 뮤지컬 수입 과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공개하고 나서 파문이 일었다. 계약 과정에서 국내 뮤지컬계의 경쟁이 벌어져 로열티 선급금(공연 계약금)이 과도하게 폭등했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계약서에서도 못 밝히게 돼 있는 로열티를 언론에 공개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한국 뮤지컬 시장이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회사가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습니다. 공급(작품)은 한정돼 있는데, 수요가 과다해진 거죠. 덕분에 저작권료를 3만 달러만 줘도 될 것을 30만 달러까지 부르는 곳이 나오는 등 거품이 형성됐어요. 흥행이 될 만한 작품의 저작권 계약을 따내기 위해 국내 업체들끼리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니 그 거품 때문에 관련업체 모두가 죽게 생겼습니다.”
박 대표는 지난 9월 1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신시컴퍼니가 초연한 해외 화제작들의 로열티를 공개했다. 1999년 초연한 <시카고>는 선급금 2만 달러, <렌트>는 3만 달러, 2002년에 계약하고 2004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초연한 <맘마미아>는 선급금 2억원에 로열티가 13.5%(매출액 기준)에 불과했다.
박 대표는 “지난 10년 동안 로열티가 비정상적으로 폭등했다”면서 현재 로열티 수준이 10년 전에 비해 최소 5배 이상 올랐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요즘은 소규모 뮤지컬도 선급금을 15만 달러는 줘야 겨우 경쟁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라며 “지금 <맘마미아>를 계약한다면 최소 10억원이 들 것”이라고 토로했다.
출혈 경쟁을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을 묻자 박 대표는 “공연계에 퍼진 한탕주의”라고 지적했다. 박 대표의 신시컴퍼니 등 몇몇 국내 뮤지컬 제작사가 해외 작품을 수입해 흥행에 성공하자 대기업 자본 등 투자자들의 자금이 공연계로 흘러 들어왔다. 작품성이나 관객의 호응도보다는 일단 유명 작품을 수입해 ‘대박’을 터뜨리겠다는 한탕주의로 인해 무리한 계약을 남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국내 뮤지컬계에 사실상 처음으로 ‘정식 수입’ 개념을 들여온 박 대표는 지난 9월 “더 이상 시장을 어지럽히는 소모적인 수입 경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10년이 한국 뮤지컬과 박 대표의 마음을 어떻게 바꿔놓은 것일까.
그는 1962년 전남 해남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천상 ‘촌놈’인 까까머리 고등학생의 마음을 뒤흔든 것은 車凡錫(차범석)의 <산불>이란 연극이었다. 1979년, 광주 서석고에 재학 중이던 박명성은 당시 상황을 그의 저서 <뮤지컬 드림>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진짜 촌놈이었던 나는 극이 시작되자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공산당이라면 무조건 때려잡거나 물리쳐야 했던 시절, 극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여자들만 남겨진 마을에 낙오된 북한군이 숨어들고 두 여자가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때려잡지는 못할망정 ‘괴뢰군’과 사랑에 빠지다니,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인생을 바꾼 한 편의 연극
그날 시골 학생 박명성의 장래가 결정됐다. 배우. 그에겐 한 편의 연극 관람이 ‘혁명에 버금가는 일대사건’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청소년 시절엔 한 권의 책이, 사람의 말 한마디가, 한 번의 음악회가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잖아요. 저는 연극 한 편이 제 인생을 바꾼 셈이죠.”
이듬해 대학에 낙방한 그는 무작정 上京(상경)해 극단을 찾았다. 우연히 전봇대에 붙은 연구생(연습생)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이 ‘동인극단’이었다. 서울에 친구도, 친척도 없었던 그는 극단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온갖 잡일을 도맡아 했다. 이듬해인 1983년, 그는 서울예전(現 서울예술대학) 무용과에 입학했다.
―포기했던 대학에 다시 도전한 이유가 뭐였습니까.
“불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죠. 당시엔 대학 안 가고 연극만 하면 말 그대로 ‘딴따라’였잖아요. 기왕 대학 가는 것, 연극과 관련된 학과를 찾았죠. 연극과와 무용과를 놓고 고민했는데, 경력자들이 많이 지원하는 연극과보단 남자가 귀한 무용과가 낫겠다 싶어 지원했습니다.”
―연극과 무용은 많이 다른 분야 아닙니까.
“대학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는데, 너무 재미가 있어 ‘그냥 무용을 계속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자가 귀하기도 했고, 저의 체형도 무용에 유리했습니다. 한국무용은 170cm를 전후한 무용수가 가장 적합한 체형이라고들 하는데, 제 키가 171cm예요.”
하지만 ‘무용의 꿈’은 잠깐이었다. 그는 다시 배우로 돌아왔고, 학교보다 극단을 더 많이 찾아다니는 연극인이 됐다. 그의 연극계 첫 데뷔작은 <여자의 창>이란 작품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된다.
“제 평생 그렇게 긴장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분장실에서 무대까지 가는 길이 한없이 멀게 느껴졌어요. 갑수 형(金甲洙)이 주인공이었고 저는 그 친구역이었는데, 대사도 열 마디가 채 안되는 단역이었습니다. 연극을 끔찍하게 사랑했지만, 배우로선 소질이 없었나 봐요. 사실 지금까지 배우로 3분 이상 무대에 서본 적이 없어요.”
배우의 길 포기
함께 연기한 배우 김갑수씨와의 인연이 ‘박명성 연극인생’의 시작이었다. 차세대 배우로 각광받고 있던 김씨는 출연섭외가 들어오는 대로 작은 배역이나마 박씨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장충동에 ‘연극촌’이란 소극장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2년 넘게 갑수 형과 함께 살았어요. 둘 다 결혼 전이었고, 어려운 시절이었죠. 같이 라면 끓여먹고 족발 시켜 먹으면서 연극인의 꿈을 키웠습니다. 극단이 없어진 후에도 갑수 형이 저를 여러 군데 소개시켜줬어요. 제가 함께 출연하거나 조연출을 맡는 조건으로 자신의 출연을 결정하기도 했고요.”
연출가 故(고) 金相烈(김상렬)씨와의 만남도 김갑수씨를 통해 이뤄졌다. 극작...
계속...
월간조선 2009년 12월호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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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맘마미아> <시카고> <아이다> <렌트> 등 해외 유명 뮤지컬 수입해 흥행 성공시켜
‘브로드웨이 朴’으로 불려
⊙ 한정된 작품 놓고 한국인끼리 출혈 경쟁…로열티 10년 새 5배 폭등
⊙ “신시컴퍼니는 더 이상 새로운 뮤지컬 수입 경쟁에 참여하지 않겠다”
⊙ “배우로서의 정신과 인격, 그리고 품위를 생각한다면 최정원씨가 최고의 뮤지컬 배우”
1998년 첫 계약에 성공한 뮤지컬 <더 라이프>는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제작비 6억8000만원을 훌쩍 넘는 수익을 남겼다. 이후 <렌트> <헤어스프레이> <아이다> <댄싱 섀도우> 등으로 ‘대박’을 터뜨린 그는 2007년 한국뮤지컬대상 최우수작품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덕분에 그는 한국 뮤지컬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통한다.
그랬던 그가 최근 해외 뮤지컬 수입 과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공개하고 나서 파문이 일었다. 계약 과정에서 국내 뮤지컬계의 경쟁이 벌어져 로열티 선급금(공연 계약금)이 과도하게 폭등했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계약서에서도 못 밝히게 돼 있는 로열티를 언론에 공개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한국 뮤지컬 시장이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회사가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습니다. 공급(작품)은 한정돼 있는데, 수요가 과다해진 거죠. 덕분에 저작권료를 3만 달러만 줘도 될 것을 30만 달러까지 부르는 곳이 나오는 등 거품이 형성됐어요. 흥행이 될 만한 작품의 저작권 계약을 따내기 위해 국내 업체들끼리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니 그 거품 때문에 관련업체 모두가 죽게 생겼습니다.”
박 대표는 지난 9월 1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신시컴퍼니가 초연한 해외 화제작들의 로열티를 공개했다. 1999년 초연한 <시카고>는 선급금 2만 달러, <렌트>는 3만 달러, 2002년에 계약하고 2004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초연한 <맘마미아>는 선급금 2억원에 로열티가 13.5%(매출액 기준)에 불과했다.
박 대표는 “지난 10년 동안 로열티가 비정상적으로 폭등했다”면서 현재 로열티 수준이 10년 전에 비해 최소 5배 이상 올랐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요즘은 소규모 뮤지컬도 선급금을 15만 달러는 줘야 겨우 경쟁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라며 “지금 <맘마미아>를 계약한다면 최소 10억원이 들 것”이라고 토로했다.
출혈 경쟁을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을 묻자 박 대표는 “공연계에 퍼진 한탕주의”라고 지적했다. 박 대표의 신시컴퍼니 등 몇몇 국내 뮤지컬 제작사가 해외 작품을 수입해 흥행에 성공하자 대기업 자본 등 투자자들의 자금이 공연계로 흘러 들어왔다. 작품성이나 관객의 호응도보다는 일단 유명 작품을 수입해 ‘대박’을 터뜨리겠다는 한탕주의로 인해 무리한 계약을 남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국내 뮤지컬계에 사실상 처음으로 ‘정식 수입’ 개념을 들여온 박 대표는 지난 9월 “더 이상 시장을 어지럽히는 소모적인 수입 경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10년이 한국 뮤지컬과 박 대표의 마음을 어떻게 바꿔놓은 것일까.
그는 1962년 전남 해남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천상 ‘촌놈’인 까까머리 고등학생의 마음을 뒤흔든 것은 車凡錫(차범석)의 <산불>이란 연극이었다. 1979년, 광주 서석고에 재학 중이던 박명성은 당시 상황을 그의 저서 <뮤지컬 드림>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진짜 촌놈이었던 나는 극이 시작되자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공산당이라면 무조건 때려잡거나 물리쳐야 했던 시절, 극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여자들만 남겨진 마을에 낙오된 북한군이 숨어들고 두 여자가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때려잡지는 못할망정 ‘괴뢰군’과 사랑에 빠지다니,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인생을 바꾼 한 편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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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시컴퍼니가 국내 최초로 정식 수입 계약에 성공한 뮤지컬 <더 라이프>. |
그날 시골 학생 박명성의 장래가 결정됐다. 배우. 그에겐 한 편의 연극 관람이 ‘혁명에 버금가는 일대사건’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청소년 시절엔 한 권의 책이, 사람의 말 한마디가, 한 번의 음악회가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잖아요. 저는 연극 한 편이 제 인생을 바꾼 셈이죠.”
이듬해 대학에 낙방한 그는 무작정 上京(상경)해 극단을 찾았다. 우연히 전봇대에 붙은 연구생(연습생)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이 ‘동인극단’이었다. 서울에 친구도, 친척도 없었던 그는 극단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온갖 잡일을 도맡아 했다. 이듬해인 1983년, 그는 서울예전(現 서울예술대학) 무용과에 입학했다.
―포기했던 대학에 다시 도전한 이유가 뭐였습니까.
“불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죠. 당시엔 대학 안 가고 연극만 하면 말 그대로 ‘딴따라’였잖아요. 기왕 대학 가는 것, 연극과 관련된 학과를 찾았죠. 연극과와 무용과를 놓고 고민했는데, 경력자들이 많이 지원하는 연극과보단 남자가 귀한 무용과가 낫겠다 싶어 지원했습니다.”
―연극과 무용은 많이 다른 분야 아닙니까.
“대학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는데, 너무 재미가 있어 ‘그냥 무용을 계속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자가 귀하기도 했고, 저의 체형도 무용에 유리했습니다. 한국무용은 170cm를 전후한 무용수가 가장 적합한 체형이라고들 하는데, 제 키가 171cm예요.”
하지만 ‘무용의 꿈’은 잠깐이었다. 그는 다시 배우로 돌아왔고, 학교보다 극단을 더 많이 찾아다니는 연극인이 됐다. 그의 연극계 첫 데뷔작은 <여자의 창>이란 작품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된다.
“제 평생 그렇게 긴장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분장실에서 무대까지 가는 길이 한없이 멀게 느껴졌어요. 갑수 형(金甲洙)이 주인공이었고 저는 그 친구역이었는데, 대사도 열 마디가 채 안되는 단역이었습니다. 연극을 끔찍하게 사랑했지만, 배우로선 소질이 없었나 봐요. 사실 지금까지 배우로 3분 이상 무대에 서본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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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명성 대표의 연극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 (왼쪽부터) 정우스님, 연극인 故 김상렬, 김갑수, 허준호. |
배우의 길 포기
함께 연기한 배우 김갑수씨와의 인연이 ‘박명성 연극인생’의 시작이었다. 차세대 배우로 각광받고 있던 김씨는 출연섭외가 들어오는 대로 작은 배역이나마 박씨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장충동에 ‘연극촌’이란 소극장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2년 넘게 갑수 형과 함께 살았어요. 둘 다 결혼 전이었고, 어려운 시절이었죠. 같이 라면 끓여먹고 족발 시켜 먹으면서 연극인의 꿈을 키웠습니다. 극단이 없어진 후에도 갑수 형이 저를 여러 군데 소개시켜줬어요. 제가 함께 출연하거나 조연출을 맡는 조건으로 자신의 출연을 결정하기도 했고요.”
연출가 故(고) 金相烈(김상렬)씨와의 만남도 김갑수씨를 통해 이뤄졌다. 극작...
계속...
월간조선 2009년 12월호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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